청각적 시각적 이미지들이 상징과 묵시를 만들어 낸다. 무엇이 진실이고, 내가 알고 믿고 있는 것들은 과연 실제로 있는가? 도무지 일어나지 않을 것같은 일들은 일어나지만 사람들은 믿지않고, 허상에서 의미와 암시를 받는다.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세계를 오독하고 오해함으로 오류를 행한다.
종소리
아침에 종소리를 듣고 깨어나는 후터키의 장면은 카프카의 『소송』을 떠올리게 한다. 아침에 눈을 뜬 요제프 K 앞에 나타난 검은 색 재킷을 입은 낯선 남자들처럼(『소송』 카프카), 종탑이 없는 마을에서 종이 울리는 것은 기이하다. 후터키의 감정은 주변의 사물이 내는 소리로, 작은 창을 통해 본 새벽의 적막한 마을의 묘사로 읽고 있는 나(독자)에게 전달된다. 종소리는 곧 후터키로 하여금 “요람과 관의 십자가에 결박되어 경련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답답하고, 무기력하고, 불안하다. 종소리에서 죽음, 심판의 암시를 받는다.
“어느 시월의 아침 끝없이 내릴 가을비의 첫 방울이 마을 서쪽의 갈라지고 소금기 먹은 땅으로 떨어질 즈음(이제 첫서리가 내릴 때까지는 온통 악취 나는 진흙 바다가 펼쳐져 들길로 다니기도, 도시로 가기도 어려울 터이다), 후터키는 종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유령같은 종소리보다 그를 더 놀라게 한 건 갑작스러운 정적, 위협적인 침묵이었다.……돌연 주위의 말 없는 물건들이 신경을 건드리는 대화를 시작했다(찬장이 삐걱 소리를 내고 냄비가 덜거덕거렸으며 사기 접시가 딸깍 내려앉았다).(Ⅰ부 1장14-15p)”
후터키의 불안이 전달되어 나(독자)는 암시와 음울한 전망을 하게 된다.

비, 길
헝가리 공산당 체제의 몰락의 시기 집단 농장의 해체와 함께 사람들이 떠난 후 남아있던 사람들은 이곳을 떠나길 원하지만 떠나질 못하고 있다. 농장의 길은 마차 몇 대만 지나다니고 그들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갇혀 남지도 떠나지도 못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1년 반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이리미아시가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마을의 술집으로 한 사람씩 모여 든다. 이 술집에 한 사람씩 등장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영화의 POV 샷 (Point-of-View Shot), 등장인물의 시점으로 카메라를 전환하여, 그 인물이 고개를 돌렸을 때 다른 인물이 화면에 들어오도록 하는 방식과 같다. 그들은 언제인지 그 공간에 들어와 있고, 갑자기 그의 존재가 인지된다.
사람들은 각자 다른 욕망 때문에 이리미시아의 귀환에 대해 서로 다른 기대감을 안고 있다. 술집에 모인 사람들의 기다림과 불안의 양가감정은 메시아니즘적 분위기를 전달한다. 어쨌든 마을은 묘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그들의 기대감, 특히 후터키의 기대감과 달리, 귀환한 이리미아시는 연설을 통해 에슈티케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을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고 그들이 농장을 떠나도록 선동한다. 사실 이리미아시의 정체는 그들의 기대감과 달리 정보원이고 감시자이며 사기꾼이다. 역설적으로 이리미아시의 선동은 사람들이 농장으로부터 떠날 수 있게 해준다. 후터키의 경우 그는 “머물러 살 용기”도 “떠날 용기”도 없었음을 깨닫는다.(271p)
그렇게 그들은 농장을 떠나고, 길에서 “흥분과 열정, 불안이 뒤섞인 감정(277p)”을 느낀다. 크라네르가 큰소리로 농장을 향해 저주와 욕을 하는 감정은 희망일까? 불안일까? 그들의 환호는 불안에 대한 반어적 표현으로 보인다. 이내 엄습하는 절망과 불안 때문에, 그들은 대부분의 길을 깊은 침묵 속에서 걷는다. 비가 내려 진흙으로 뒤덮인 길은 그들을 끌어내리는, 오래된 습관이 되어버린, 절망과 무기력을 상징한다.
탱고, 거미줄
기다리던 그들이 추는 탱고는 그들 속에 감추어진 욕망과 기대감을 주체할 수 없어 표출하는 행위라고 생각된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 없고, 무엇이라도 해야 하기에. 이 탱고는 6스텝 만에 제자리로 돌아오는 발도사 스텝이고 앞뒤로 반복하는 것이 한 세트로 이루어져 있다. 기다리다 지쳐 아코디언은 느리게 연주하고 그 리듬에 맞춰 말파리는 8자를 그리며 날아다닌다. 이 8자는 탱고 스텝이 그리는 이미지와 겹쳐진다. 그들은 지쳐 잠이 들고 조용히 거미는 거미줄을 친다. 이 거미줄은 그들의 무기력을 보여주는 이미지다.
“아코디언의 비단결 같은 곡조를 타고 거미들이 마지막 공연을 감행했다. 거미들은 술병과 유리잔, 찻잔과 재떨이에 느슨하게 거미줄을 드리웠고, 테이블 다리와 의자 다리를 가느다란 실로 은밀히 연결했다. 마치 눈에 띄지 않게 그물망을 쳐서 미세한 움직임과 소리라도 즉각 감지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처럼. 거미들은 잠자는 사람들의 얼굴과 다리 그리고 손에도 거미줄을 쳤고, 그런 뒤에 번개같이 은신처로 퇴각하여 거미줄이 미세하게라도 흔들릴 때를 기다리다가, 그러다 다시 거미줄을 칠 채비를 했다. 말파리들은 거미줄과 밤으로부터 피신하여 기운 없이 빛나는 불빛 속에서 끊임없이 8자를 그리며 날아다녔다 (Ⅰ부6장 228p)”
이 거미줄은 Ⅱ부에서 그들의 꿈이 연결되는 웹(web)으로 발전 진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꿈
폐허가 된 알마시 저택에 도착해서 함께 잠을 자던 그들은 꿈을 꾸고, 이들의 꿈은 서로 연결되고 있다. Ⅰ부6장 술집에서 잠들었던 그들 몸 위로 거미줄을 치고 있는 이미지 이 연결된 꿈의 이미지가 된다. 한사람의 꿈은 다른 사람의 꿈으로 건너가고 또 다른 사람의 꿈으로 이어진다. 꿈이 깊어지고 서로 연결되면서 문장 부호가 사라진다.(296~299p) 집단 농장 폐쇄되고 공동체는 몰락을 향해 가지만 남아 있던 그들은 여전히 옛 공동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함께 타락하고 함께 죄의식에 빠지고 함께 무기력해지고 함께 불안하다. 그러기에 폐허가 된 저택에서 함께 잠을 자며 욕망은 다르지만 그 꿈이 연결된다는 작가의 글쓰기는 경이롭다. 그 심연에는 불안이 가라앉아 있다.
창
종소리에 잠이 깬 후터키가 내다보던 작은 창으로 시작되어 창(窓)의 이미지는 의사의 감시대, 에슈티케가 매달려 들여다보던 술집의 창, 마을을 떠날 때 크라네르가 부셔버린 창문으로 이어진다. 후터키의 창은 적막감과 불안을 암시하고 의사의 창은 감시를 상징한다. 의사는 창을 통해 관찰한 사람들의 일상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어린 소녀 에슈티케가 들여다보려 했던 창은 그녀의 소외와 타자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 농장의 사람들은 감시에 적응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의를 하던 슈미트와 슈미트 부인과 후터키는 이른 아침 찾아온 헐리치 부인과 크라네르 부인의 시선이 창을 통해 그들의 진실을 볼까봐 경계한다. 오랜 세월 관계를 통해 서로를 잘 알지만 그것이 감시자와 감시당하는 자의 관계로 순식간에 바뀔 수 있는 시절을 살았음을 폭로한다. 농장을 떠날 때 크라네르가 집의 창을 깨는 행위는 이 경계를 부수고 싶은 욕망과 충동의 표출이다. 그리고 창을 부숨으로 안과 밖의 구분은 사라진다.
다시 종소리, 의사의 글쓰기
안과 밖의 구분이 사라지는 것은 이 창을 통해 관찰하고 글을 쓰던 의사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그는 집단농장의 해체로 직장을 잃어버린 알콜 중독에 걸린 심장병 환자다.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창을 통해 그들을 관찰(감시)한다. 심장병 발작으로 입원했던 그는 집으로 돌아오고, 사람들이 농장을 떠난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는 창을 통해 내다보지만 사람들을 볼 수가 없고, 상상으로 글을 쓴다. 문득 그는 자신의 글이 예언적 행위라고 깨닫는다. 자기가 쓰는 글이 일어날 것임을 확신한다. 오랫동안 해온 작업이 결실이라 생각한다. 그러다 종소리가 들려오고 그는 그 종소리가 그에게 이런 능력을 준다고 생각한다. 종소리의 근원을 찾아 나선 그는 그의 상상과 달리 무너진 교회 종탑의 종을 치고 있는 미친 노파를 발견하고 실망한다.
기록자(혹은 작가) 역시 진실을 모르고 거짓된 암시를 씀으로 누군가를 기만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계속 쓴다. 그가 쓴 내용은 후터키가 종소리에 깨는 장면(Ⅰ부 1장)을 그대로 써내려 간다. 순서상 Ⅱ부는 6장에서 1장으로 진행되는 이유를 마지막 Ⅱ부1장에서 발견한다. 그러면 이 소설은 의사의 글인가? 의사는 소설의 등장인물인가? 그의 생각에서 힌트를 얻는다.
“그는 이제 유일무이한 능력의 소유자가 되었다. 그 능력으로 끊임없이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세계를 묘사할 수 있을 뿐만 아닐, 어느 한도까지는 혼란스러운 사건들 배후의 메커니즘에도 간섭할 수가 있었다!”(Ⅱ부1장,387p)
종소리는 하나의 상징이 되고 소설의 안과 밖 경계를 제거하고 방향을 사라지게 한다. 이 비가향성(Non-orientable)과 안과 밖, 앞면과 뒷면의 구분이 없는 곡면 도형이 ‘뫼비우스의 띠’이다. 이 소설은 점들로 이어진 위상 수학처럼 이미지들로 이어진 순환하는 ‘뫼비우스의 띠’를 형성한다. 작가의 천재성에 감탄한다.
에슈티케
에슈티케라는 연약한 존재가 이 소설에서 상징하는 의미를 찾는 것이 어렵다. 돌봄을 받지 못하고 방치된 다락방의 소녀 에슈티케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오빠 서니를 많이 의지하고 있는 반면, 그로부터 심리적으로 지배당하고 있다. 에슈티케의 죽음은 충격적이고 그로테스크하다.(Ⅰ부 5장) 그녀의 시체가 베일에 싸여 하늘로 올라가는 현상은 더욱 해석이 어렵다. (※문맥상 이 몸은 에슈티케의 것인데 그것을 지시하는 중요한 문장은 마치 아닌 듯 번역되어 있어서, 영어 번역을 찾아보았다. 영어 번역은 에슈티케임을 시사하며, 오히려 의미는 살아있는 몸처럼 보인다는 데 방점이 있는 듯 보인다.)
“세 사람이 며칠 전 크라네르가 짠 거칠거칠한 관으로부터 소녀의 시신을 들어 올리지 않았더라면, 맹세코 그들은 밀랍같이 하얀 얼굴에 붉은 기운이 도는 곱슬머리를 한 채 평화로이 잠자는 육신을 소년의 어린 여동생으로 믿고 말았을 것이다.("If the three of them hadn’t lifted the body out of the rough coffin Kráner had knocked together a few days before, they would have sworn that the body with the waxen face and the reddish curls, sleeping so peacefully, was the boy’s younger sister.")”(Ⅱ부 4장316p)
길을 걷던 이리미아시의 일행이 베일에 쌓인 에슈티케의 시체가 하늘로 올라가는 현상을 목격하고 이리미아시는 심리적 충격을 받는다.(320p) 특히 에슈티케의 승천은 꿈도 아니고 환각도 아닌 실제로 있는 현상으로 묘사된다. 미친 노파가 치는 종소리를 후터키와 의사가 묵시나 계시로 들었던 것처럼,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 현상이 실체로 드러나는 것을 그린 의미가 있다. 드러난 것이 진실인가? 감춰진 것이 진실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체인가? 질문을 남긴다.
작가는 노벨수상 연설에서 천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 곁에 있는 날개를 감춘 혹은 날개 없는 새로운 천사는 희생이고, 이 천사들은 우리 때문에 희생된 존재이다. “단 한번의 부당하고, 경솔하고, 품위 없는 행동”에 몸과 영혼이 상처 입은 희생된 천사, 그게 에슈티케다. 그 소녀는 그런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짓밟히고 냉혹한 조롱 앞에 무방비 상태로 희생되었다. 에슈티케가 의지하고 추앙했던 오빠 서니는 폭력적이고 거짓을 일삼는 존재다. 그를 따르는 에슈티케는 부조리함을 쫓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절망적인 세계에서 왜곡된 진실과 거짓된 대상을 향한 희생을 강요당하는 존재의 상징이다.
“그러면 차라리 기다리면서 만나지 못하렵니다.” - F.K.
이 책 면지에 인용한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기다리던 것이 도착하고 알기를 원했던 실체가 드러날 때 그것은 나를 기만하고 배반하는 진실이라면 차라리 기다리고 있는 상태가 더 낫다는 의지적 표현일 테다.
농장 연설과 모금 후 이리미시아는 그들과 만나기로 약속하고 먼저 떠난다. 그들은 이리미아시에게 더 머물기를 바라면서, 사람들은 그가 떠나자 해방감을 맛본다. 이 양가감정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을까? 내가 믿는 것들 중 나를 기만할, 진실이 아닌 것들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 존재로서 느끼는 불안이라 생각된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 못한 한계 때문에 당연한 감정일 것이다.
농장을 떠난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망과 불안의 상태를 반복한다. 약속과 달리 그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지게 되고, 트럭 안에서 불안해한다. 그들은 다시 모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각자 배정된 곳으로 이동하며 밝은 모습으로 인사하지만 뒤돌아서면서 절망할 것을 예감한다. 이들뿐 아니라 이리미시아, 의사 모두 기만당하고 있다. 희망에서 절망으로 돌아오는 이 사이클은 인간의 삶이고 역사일까? 이것을 벗어나려면, 아니 최소한 절망에 지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작가는 연설에서 ‘반역’을 말한다.
『저항의 멜랑콜리』, 『헤르쉬트07769』를 읽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