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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호사라는 일의 성격으로 보아 모든 변호사는 말이다. 적어도 평생에 한 번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건을 맡게 마련이란다. 내겐 지금 이 사건이 그래(147p)”

애티커스 판사의 말이다. 그의 이러한 고민은 이 소설의 마지막 사건에서 반전을 만드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 소설은 두 개의 층위가 있다. 한 층위는 스카웃과 젬의 일상 속 사건들과 그들의 시선에 비친 메이콤의 어른들의 모습이다. 이웃집 부 래들리에 대한 소문이 첫 번째 사건이다. 그는 청소년 시절 비행으로 아버지에 의해 집안에 갇혔다. 직업학교에 보내라는 판결을 거절하고 집안에 가두는 것이 아들을 보호하려는 뜻이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판단은 아들의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광견병에 걸린 것으로 보이는 개를 사살한 애티커스의 신중함은, 겉으로 보이는 현상으로 예단하는 것을 극도로 조심하려는 태도다. 앞으로 있을 메이콤 뿐 아니라 앨러바마 주를 떠들썩하게 할 재판을 전망하는 사건이다. 애티커스가 변호하는 톰의 재판이 또 다른 층위다. 정황과 증거가 무죄임에도 유죄선고를 받는 흑인 톰을 암시하고 있다.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앵무새(mockingbird,흉내쟁이 지빠귀)는 죽이지 않는다는 명제는 제목 ‘To kill mockingbird’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깨진다. 위험의 가능성 때문에 사살되는 개는 그 복선이라 할 수 있다. 애티커스의 망설임은 ‘과연 해악을 끼치는 존재인지에 대한 인간의 판단기준은 옳은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에는 편견과 두려움의 대상들이 등장한다. 부 래들리, 듀보스할머니, 톰이 그들이다.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편견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이 밝혀진다. 등장 인물들과 익명의 마을 사람들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타자화 하는 주체가 되기도 하고 그 대상이 된다. 사물들의 관계와 질서를 파악하고 판단하여, 다시 질서를 부여하는 ‘인식틀’은 동일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 동일성 밖에 존재하는 타자들을 만들어낸다. ‘이성’이라고 이름지어지는 것으로 보아, 이성이라고 생각하는 영역도 왜곡되고 오히려 그 경계가 모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대표적 예가 게이츠 선생님이다. “박해는 편견에서 나온다”며 히틀러를 비판하던 그는 법정에서 나오면서 흑인을 향한 증오를 내뱉는다. 이것이 메이콤에서 벌어진 재판의 다른 모습이다.

 

변호사로서 “적어도 평생에 한 번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건”을 맡았던 애티커스 변호사는 톰의 유죄 판결과 그의 죽음으로 인해 부 래들리의 정당방위 사건을 재판에 넘기지 않고 덮기로 한다. 사법 정의에 대한 신뢰가 깨졌음을 보여준다. 청소년기에 재판을 받았던 부 래들리, 그리고 그 후에 불미스러운 소문이 무성했던 그가 재판에서 무죄를 받는 것을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애티커스의 이 결정에서 의문을 갖게 된다. 더 나아가 위험하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사법을 믿지 못하는 법조인’, 생각해보면 참 흔한 말이다. 사실은 모두가 사법에서의 정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은 지금의 현실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 의심은 존재해왔다. 그럼에도 사법(司法)이 있어야 할 당위성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때론 불안함을 떨쳐버리고 그 정의에 기대보기도 한다. 왜 불안할까? 역사나 우리가 사는 시대 속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그것이 완전하지 않음을, 완전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법철학과 관련하여 검색하다 우연히 읽게 된 『철학적 사유와 인식』 시리즈 중 「법적 실증주의와 자연법 사상 비교」를 읽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연법과 실정법이 어떻게 대립되고 상호 보완되어 왔는지의 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한 책이다. 참 쉽게 읽히지만 법의 적용에 있어서는 그리 간단하지 않고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실정법과 자연법이 대립하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소크라테스는 보편적 가치는 국가의 법보다 상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실정법과 자연법의 긴장 관계를 처음으로 철학적 담론의 장으로 끌어올린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크리톤과 안티고네의 비극에서도 나타난다. 홉스는 법 실증주의의 토대를 마련했다. 정당성은 도덕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와 주권자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다. 이 법 실증주의는 실정법과 자연법의 대립의 오랜 역사를 통해 발전해왔다. 그러면 오늘날 과연 재판은 법 조항에 의해서만 판결이 내려지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드워킨의 생각이고 뉘른베르크 재판의 판결은 인간의 보편정의가 실정법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재판장의 판결에 법 조항 외에 다른 요소가 개입될 수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사법에서 실정법과 자연법의 오래된 갈등의 역사를 읽다 보면, 법에서 정의라는 것이 참 위태롭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입법과 사법의 과정에서 정의를 세우려는 의지는 개혁하고 보완하는 과정을 통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히틀러의 법률가』들은 법의 전문가들이 어떻게 전체주의와 독재에 입법과 사법을 통해 정당성을 부여했는가를 보게 해준다. 실증주의를 악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까? 반면,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는 보편적인 인간애, 도덕 등의 자연법이 실정법을 이기는 사례들을 보여 준다.

 

개혁과 변혁은 거센 저항이 있게 마련! 지치고 흐려진 눈을 똑바로 뜨고 오늘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본질을 알려면 역사를 쭉 훑어보는 것도 방법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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