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는 그들의 공저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빌레뜨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샬럿 브론테의 가장 명백하고 절망적인 페미니즘 소설”이고 주인공 루시 스노의 이야기는 “아마도 지금까지 여성의 박탈을 다뤄왔던 이야기 중 가장 감동적이며 무시무시하다”고 했다.
『빌레뜨』의 화자이자 주인공 루시는 체념적이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고 런던을 경유해 바다를 건너 빌레뜨로 가는 그녀의 여정을 보면 그녀는 충동적이고 욕망에 즉각적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 여행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면 수동적인 듯 보이지만, 당시 낯선 곳을 향해 그렇게 쉽게 떠날 수 있었을까를 상상해보면, 그렇게만 볼 수 없는 타고난 기질이 그녀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 황야를 떠나자.” 그런 말이 들렸다. “그리고 이제는 나아가자.”
“어디로?” 그리고 떠오른 물음이었다.
멀리 볼 것도 없었다. 풍요로운 영국 중부의 평야에 있는 이 시골 교구에서 나는 육체의 눈으로는 아직 본 적이 없는 그곳을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곳처럼 떠올렸다. 런던이었다.
- 『빌레뜨 1』 5장. 66-67p
그녀가 마치몬트 여사의 시중을 들 때나 빌레뜨의 기숙학교에서 교사로 있을 때 복종과 침묵으로,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하려 한다. 이 태도는 몸에 배어 있다. 그러나 가끔씩 드러나는 충동적 행동과 반발은 숨겨져 있는 욕망을 엿보게 한다.
영국에서 가정교사나 하녀 그리고 빌레뜨의 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루시는 가부장 사회의 구속을 내면화한다. 단조롭고 위장된 모습으로 뒤로 물러나 고통을 회피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다. 그런 태도로 더 이상 도피할 곳이 없다는 것과 자신 안에 있는 욕망으로부터 그녀가 될 수 있었던 모습, 의미, 목적, 정체성 힘 등을 박탈당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직관적일 수도 논리적일 수도 있다.
그녀가 이방인으로서 도착한 빌레뜨라는 도시는 가부장적 전통과 구교의 계율이 어둡고 강력하게 지배하는 곳이다. 그 지배 방식은 비밀스럽고 음모적이다. 성적인 범죄를 당한 수녀가 묻혀 있는 오솔길, 죽은 영혼이 나타나는 다락방, 교장의 감시와 검열이 그것이다. 산책길과 다락방은 그녀의 유폐된 욕망을 상징한다. 주검이 묻혀 있는 산책을 즐기고 다락방에서 비밀을 즐기려는 그녀의 충동은 억압과 부딪힌다. 두드러지지 않게 조용히 존재하기를 좋아하는 그녀는 모두가 피서를 떠난 텅빈 도시에서 심리적 불안을 느낀다. 양가감정이다. 욕망과 죄의식으로 인해 분열을 일으킨다.
기숙학교 교장 베끄 부인이 루시를 감시하고 그의 사물을 몰래 뒤지고 검열하는 모욕적인 행위를 참고 묵인하는 루시는 역으로 폴리나와 지네브라와 베끄 부인을 관찰한다. 그녀에게도 관찰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이 감춰진 존재이다.
존 그레이엄 브레턴의 편지를 기다리는 그녀는 ‘이성’과 ‘상상’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킨다. 이성과 감정이 아닌 이성과 상상이라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외적인 행동이 아닌 내면에서만 일어나는 갈등인 것이다. 수동적인 삶의 태도이다. 이성은 우리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주로 금지로 지배한다. ‘감정’과 ‘상상’도 왜곡될 수 있지만, ‘이성’도 왜곡된다. 통제와 억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이성은 왜곡된다. 그녀는 이곳 빌레뜨에서 어떻게 그 지배를 벗어나 주체적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방인의 신분을 벗고 동일성 아래로 들어갈 것인가?
그녀를 감시하고 통제하던 기숙학교로부터의 해방은 뽈 에마뉴엘로부터 왔다. 진정한 해방이라고 볼 수 없다. 뽈은 감시하고 통제하는 방식으로 그녀를 사랑한 남자다. 그녀의 재능과 지적 능력을 발견하고 고양시킨 사람이지만, 현대의 눈으로 보면 그의 사랑은 폭력적이다. 빅토리아 시대라는 한계를 경험하는 부분이다. 그를 사랑하는 루시는 또 다른 지배 권력에 예속된다.
한편 뽈 역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사회의 희생자이다. 구교의 신부에 의해 마치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듯 보이고,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다. 또한 루시를 사랑하는 그를 멀리 떠나보내려는 외적인 방해와 금지 보다 출몰하는 유령에 의해 심리적인 억압을 당한다. 그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함으로 인해 마음이 아프지만, 한편 돌아온 후 루시와의 사랑이 이루어진 그 이후의 시간이 더 걱정스럽다.
“명백하고 절망적인 페미니즘 소설”이고 “여성의 예속에 관한 무시무시한 소설”이라고 할 만하다. “자유”와 “쇄신”을 얻었다고,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찾았다고 생각하지만, 하루가 지나기 전에 사랑에 얽매이고 조바심을 내는 그녀를 본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소외 시키고 타자화 하는 듯하다. 그 관계가 불평등할 때 더욱 그렇다. 전통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사랑은 여성을 더욱 예속시킨다. 오늘날엔 무엇이 여성을 타자화하는지. 나는 자유로운지, 그렇지 않다면, 무엇에 의한 것인지 질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