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쇄가 떨어졌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던 나의 마음속에서 ‘철커덕’ 하는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이 소설은 이 장면으로 기억하게 될 듯하다. 형기를 마치고 유형지를 떠나던 날 그의 다리와 손을 연결해 묶고 있던 사슬을 푸는 장면!
“나는 그것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들어 올려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것들이 내 발에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레 놀라웠다.”
10년 동안 항상 몸에 붙어 있던 것이었음에도, 그에게서 떨어져 나온 그 물건은 그에게 생경한 외형과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족쇄 자체의 무게만이 아닌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들이 읽혀진다.
족쇄를 풀고 그것을 손으로 들어 올려 바라보는 이 행위는 유형 생활의 시작부터 마치는 순간까지 화자의 마음속에서 되풀이되는 주제, 인간의 ‘자유’를 극적으로 나타내는 퍼포먼스다. 독자로서 이 마지막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白眉)라고 생각한다.

『죽음의 집의 기록』은 도스토옙스키의 자전적 소설이다. <페트라솁스키 서클>의 일원이었던 그는 내란음모죄로 체포된다. 이후 독방 수감, 신문, 재판, 가짜 처형, 유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경험들은 그의 소설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더구나 사형장에서 벌인 황제의 반인륜적 처형놀이는 그의 삶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는 군사재판정에서 시베리아 유형지 4년 징역과 사병복무 형을 언도받는다. 옴스크 수용소에서의 생활이 이 소설에 담겨있다. 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수용소 병원의 원장과 초소 위병들의 배려로 책을 읽고 쓸 수 있었다. 『작가의 일기』 중 이 시기의 기록을 보면 당시 직접 경험한 많은 사건들과 감정이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에 담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3부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1부 서론으로 시작한다. 서론에서 기록자(전달자)는 시베리아에서 만난 이주민 알렉산드로 뻬뜨로비치 고랸치코프의 수용소 일기를 선별하여 옮긴다고 밝히고 있다. 이 서론은 소설의 형식인 것이다. 다음 1부 1장부터 화자는 알렉산드로 뻬뜨로비치다. 그는 살인죄로 10년 형을 살고 나와 시베리아에 정착해 살고 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소설 후반부로 가면서 화자(주인공)는 알렉산드로 뻬뜨로비치에서 작가 자신—살인범에서 정치범—으로 바뀐 듯 보인다. 이 현상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고 한다. 나는 작가가 경험한 4년의 수용소 기억이 그의 삶에 깊이 각인되어서 주인공을 타인으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도스트예프의 삶에서 이 경험이 그의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 그의 작품의 방향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그가 불안정하고 불안한 심리, 특정한 상황에 대한 분노와 같은 부정적 심리를 갖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수용소의 풍경을 그리며,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존재이며, 나는 이것이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반복하는 화자의 말은 인간 존재의 진실이라는 동의와 동시에 비참한 수용소 환경에 대한 역설로 다가온다. 부친 살해범, 아내를 죽이고도 자랑스럽게 떠벌이는 죄수, 쾌락을 위해 살인하는 사람, 굶어죽지 않으려고 살인한 죄수, 태어날 때부터 산적질이 생업이었던 공동체와 가족의 일원이었던 타타르족 소년 등 별의별 사람들이 다 같은 감옥에 갇혔다. 농노, 평민, 귀족 계급도 상관없다. 수용소는 그들의 변수와 차이를 없애버린다. 기결수와 미결수, 형기간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미결수란 아직 형 집행을 받지 않은 죄수를 말하는데 이때 형은 체형을 말한다. 몇 천대의 태형을 받은 죄수의 경우 몸이 견딜 수 있는 정도로 나누어 받는 동안 그는 형장과 수용소 병원을 오간다. 그 기간 동안 그 죄수가 겪게 될 불안과 공포는 가히 상상하기 어렵다. 형 집행 전날 자해나 폭력행위로 시간을 벌려는 시도에서 그 극단적 공포 심리를 읽을 수 있다.
그가 죄수로서 자유를 잃어버린 존재라는 분명한 가시적 이미지가 바로 족쇄다.
“거의 손가락만 한 굵기의 철선 네 가닥을 서로 세 개의 고리로 연결시켜 놓은 것으로, 그것들은 바지 밑에 차게 되어 있었다. 혁대는 중간의 고리에 매게 되어 있어서, 이번에는 거꾸로 그것을 루바쉬까 셔츠 위에 직접 입는 허리 혁대에 고정시켜야 했다.”
처음 그것이 채워졌을 때의 무게, 소리, 불편함이 묘사된다.
그는 감옥 생활의 첫날부터 자유를 꿈꾸기 시작했다고 적는다. 봄이 오는 4월 노역을 나간 죄수들이 먼 들녘을 바라보며 어떤 초조함이나 충동적인 욕구를 강하게 느끼며 쉬는 한숨은 마음을 저릿하게 한다. “초원의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며 족쇄에 갇혀 있는, 시들어 가는 영혼을 달래 보려는 한숨”이다.
목욕장에서 족쇄를 한 채로 옷을 벗는 화자의 어설픈 동작, 벗은 몸에도 여전히 족쇄를 차고 목욕하고 있는 죄수들의 모습들, 병원에서 폐병으로 죽어가는 죄수들의 깡마른 몸에도 족쇄에 채워져 있는 모습, 족쇄가 채워진 채 죽어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화자는 질문을 한다. “도대체 왜“라고! 족쇄는 단지 탈주를 방지하기 위해 채우는 것이 아니라 ”족쇄란 하나의 수치심이며 굴욕이고 육체적, 정신적 부담“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죽어 가는 자에게도 과연 형벌이 필요한 것인가?”라고 다시 묻는다. 수용소에는 인간 존재로서의 존중은 한 치도 고려되지 않는다.
대재기(大齋期, 러시아 정교에서 부활절 전 6주 동안의 근행기)가 끝날 무렵 죄수들이 조별로 교회에서 하는 재계(齋戒, 고백 미사와 영성체를 하는 러시아 정교 의례)의 장면은 도스토옙스키의 유형지 경험이 그의 삶에 일으킨 변화의 심리적 근원을 보게 된다. 죄의식!
“사제가 두 손에 성배를 들고 < ……그러나 우리를 강도들처럼 여기소서>라고 기도서의 한 구절을 읽자, 모든 죄수들은 이것을 말 그대로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며, 족쇄를 절그럭거리면서 바닥에 엎드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강도, 살인죄로 이 곳에 족쇄를 절그럭거리면서 엎드리고 있지 않은가? 너무나 생생하게 그들이 죄수임을 각인시키는 시청각 효과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느새 바뀌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나는 갑자기 이들 불행한 사람들을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곤 갑자기 마치 어떤 기적에 의해 내 가슴 속에서 모든 미움과 분노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걸으며 내 눈에 들어오는 얼굴들을 자세히 쳐다보았다.(『작가의 일기』 도스토옙스키 75p)”
작가는 “머리를 깎이고, 얼굴에 낙인이 찍힌” 죄수들에게서 유년시절 그에게 친절을 베풀던 농부 마레이를 떠올린다. 사형선고와 10년간의 시베리아 유형 및 강제복무 이후 그는 심리· 철학·윤리·종교적 관점에서 인간과 민중의 문제에 천착하고 『죄와 벌』·『악령』·『백치』·『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같은 역작을 쓰게 된다. 그렇지만 나는 이 비인간적 경험을 겪은 그의 삶에, 주인공과 자신을 분리할 수 없는 감정에 연민을 느낀다.
“얼마나 많은 젊음이 헛되이 매장되었으며, 여기서 얼마나 위대한 힘들이 덧없이 파멸해 버렸는가!”
형기를 마치는 날, 익숙해지고, 어찌할 수 없는 신체의 일부쯤으로 여길 정도가 되었던 족쇄가 풀어지고 낯선 그것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죄수 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평소에는 아무 문제의식조차 갖지 못했던 제도, 관습, 프레임으로서의 관념들을 벗어나 그 억압의 무게를 깨닫는 순간이 온다. 진부한 질문인 듯 느껴지지만 내 인생의 족쇄는 무엇일까?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