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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Z’ 딱 봐도 기호학인 듯 보이는 이 책은 롤랑 바르트라는 작가만 보고 사두었었다. 기억에는『이미지와 글쓰기』라는 책을 읽고 좋아서 책을 몇 권을 구입했는데, 읽어내는 속도는 몇 권 되지도 않은 구매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이 책은 책장에 꽂혀만 있는 신세였었다. 결국 바르트 읽기도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 이번에 발자크 읽기를 하면서 다시 이 책을 펼쳐들었다.


『S/Z』는 바르트가 발자크의 『사라진느』를 텍스트로 해서 강의한 내용이다. 제목의 S는 사라진느, Z는 잠비넬라의 첫 알파벳이다. 둘 다 이 소설 속에서 화자가 한 여성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문장과 서로 상호작용을 한다. 이때 텍스트는 5가지 코드로 읽혀지는데, 해석학 코드(Hermeneutic code, HER.), 행동적 코드(Proairetic code, ACT.), 문화적 코드(Referential code, REF.), 의미론적 코드(Semic code, SEM.), 상징적 코드(Symbolic code, SYM.)이다. 어떤 말과 행동 인물을 표현하는 텍스트에서 독자는 의심하고, 재생하고, 정보를 얻고, 짐작하고, 교감하는 상호작용을 한다. 바르트는 이 소설을 561개의 렉시아(lexia, 독해 단위)나누고 그것을 코드 기호를 달아놓고 분석한다. 이렇게 조각조각 내서 읽는게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데, 가끔은 내가 텍스트와 상호작용하며 얻은 의미들이 일치하는 지점에서는 작은 희열을 맛본다.

 

바르트는 이 강의를 통해『사라진느』를 세상에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이 책은 텍스트를 읽는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므로 전적으로 그것에만 의존해서 소설을 읽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품 『사라진느』를 먼저 읽고 감상을 한 후에 참고한다면 확장된 독서경험이 될 것이다. 어쨌든 나는 도움을 받았다.


 『사라진느』는 문학과 지성사의 책으로 처음 읽었다. 힘들게 읽었던 생각이 난다. 『S/Z』에도 본문은 수록되어 있다. 두 권이나 있는데 민음사 책을 또 산 이유는 전적으로 제목을 오독한 탓이다. 검색하던 중 『사라진 샤베르 대령』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발자크 읽기를 하던 중이라 망설이지도 않고 구매버튼을 눌렀고 받아보고서야 ‘사라진’과 ‘샤베르 대령’ 사이에 점 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라진∙샤베르 대령』

“아! 샤베르 대령은 사라지지 않았다.” (ㅋㅋㅋㅋ)

 

그러면 문지사는 ‘사라진느’, 민음사는 ‘사라진’이라고 했을까? 프랑스어에서 Sarrasine는 Sarrasin이라는 남성명사에 e를 붙여 여성명사를 만든 것으로 사라진느로 읽는다.(전자사전에서는 사람이름이 아닌 일반명사는 사라진으로 발음이 나온다.) 여기서 또 의문! 왜 남자 주인공에게 여성이름을 붙였을까?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그 의문이 어느 정도 풀렸었다. 거세당한 카스트라토 가수 잠비넬라를 사랑했던 사라진은 나중에서야 그 정체를 알게 된다. 사라진에게서 이중적인 심리를 읽게 된다. 그가 진실을 알고 잠비넬라에게 퍼붓는 분노는 속은 것에 대한 화이기도 하면서, 자신 안에 있는 동성애적 성향을 거부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바르트는

“사라진(Sarrasine)이라는 낱말은 프랑스인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여성성이라는 또 다른 함축 의미를 실어 나르고 있다. 특히 프랑스어의 고유명사 연구를 통해 남성(Sarrazin)이 통상적으로 확인되는 고유명사인 경우, 이 여성성은 여성의 특수한 형태소로서 마지막에 e를 일반적으로 받는다. (함축된) 여성성은 텍스트의 여러 장소에서 고정되도록 되어 있는 하나의 기의이다. 그것은 성격 분위기 수사 상징을 형성하기 위해 동일한 종류의 다른 요소들과 결합될 수 있는 이동성 요소이다.(『S/Z』 롤랑 바르트 93p)”

그는 사라진이 보인 난폭한 분노는 잠비넬라로부터 온 거세공포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다시 이야기를 청취하던 여인의 분노로 나타나는데, 그녀 역시 같은 공포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글쎄 여기까지는 내 지식이 짧아서 동의하는 것을 유보하고 싶다. 제목에 대한 비슷한 해석을 하고 있어서 반가웠다. 남성명사는 사라쟁, 여성명사는 ‘사라진’과 ‘사라진느’ 두 가지 발음이 다 검색된다. 그러나 제목이 전하는 의미들을 생각해 본다면 나는 고유명사를 읽는 발음 ‘사라진느’로 표기하는 편을 선택하겠다.


민음사 번역 『사라진』은 너무나 매끄럽게 잘 읽혔다. 『S/Z』에 실려 있는 번역문과 비교했을 때 좀 더 의역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감춰져 있는 의도, 기호, 의미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키면서 눈과 의식을 이끌어가는 힘은 민음사 번역에 더 있었다. 잠비넬라의 정체가 드러나는 지점까지 빠른 속도로 끌려가게 된다.

 

떠들썩한 연회장과 추운 겨울 회색빛 정원의 이미지로 시작된 대조법은 한 존재에게서 보여지는 상반된 이미지를 향한다. 랑티 백작 저택의 떠들석한 연회 한 가운데 홀연히 나타난 정체불명의 노인, 그 노쇠한 육체 위에 입혀진 화려한 의상은 누더기로 보이고, 보석들은 기괴한 존재의 모습을 더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를 낸다. 더욱 의미심장한 대조는 이 환상적인 인물에게 강렬하게 느껴지는 여성적 교태다.

“이 병약한 육신에 새겨진 노쇠의 흔적에 별수 없이 주목하다 보면 인간에 대한 깊은 혐오가 마음을 죄어 왔다(25p).”

이질적인 요소들은 눈길을 끌고, 호기심을 갖게 하고, 심지어 혐오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 인물의 등장에 집안이 발칵 뒤집히지만, 그를 감시하고, 부축하고, 그 앞에서 웃음 짓는 랑티가 사람들의 모습은 더욱 수상쩍다. 그는 그들의 “행복, 목숨, 재산을 움켜진 마법의 인물 같았다(20p)”라는 말을 통해, 랑티가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부와 사치가 그에게서 오고 있음을 암시한다.

 

아도니스, 엔디미온은 그 노인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등장한다. 벽에 걸려 있는 아도니스는 사라진의 조각을 보고 그린 것이고, 그 모델이 잠비넬라라는 사실이 구술되는 순간, 존재는 베일을 벗기 시작한다. 결국 추기경의 노리개였던 카스트라토 가수 잠비넬라의 정체가 밝혀지고, 피그말리온의 욕망을 갖고 있던 사라진은 분노한다. 잠비넬라를 사랑했던 사라진의 당혹스러움에는 공감할 수 있으나, 분노에는 그럴 수 없다. 그의 분노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군중 속에 기괴한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병들고 노쇠한 잠비넬라에게 연민을 갖게 된다.

 

이질적인 요소들은 내러티브를 통해 연민을 일으킨다. 외부로 보여지는 이미지, 그 존재가 갖고 있는 사회 통념적 시선으로는 배척될 수밖에 없는 이미지의 근원에 타인의 욕망에서 비롯된 폭력이 있었음을 알게 될 때, 그에게서 비애를 느낀다. 그리고 그 폭로된 정체 앞에서 공포로 절규하는 사라진느, 그의 분노는 측은하다. 인간은 보여지는 것에 의해 눈이 멀 수 있다.

 

이번에는 발자크에게 묻고 싶다. 글을 쓴 의도가 무엇이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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