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다산초당을 찾은 것은 추사의 편액을 보기 위해서였다. 처음 갔을 때보다 길이 완만하게 닦여 있어 오르기가 편했다. ‘다산초당’이라는 글씨는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해서 당시 목수가 새긴 것이라 행서와 전서처럼 보이는 글씨가 섞여있고 고르지가 않다. 그 옆 동재에는 김정희가 직접 썼다는 ‘보정산방’이라는 예서체이지만 추사다운 독특한 글씨체의 현판이 걸려있다.
2주 전, 귀국을 앞둔 덴마크인 청년 A와 국립박물관에 갔었다. 그래도 우리나라에 1년을 있었는데 박물관은 보고 가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안내하기로 했다. 서화관에서 김정희의 작품 몇 점을 보면서 짧은 영어로 그를 calligrapher로만 소개했다. 독특한 글씨체라든지, 금석학, 고증학, 실학, <세한도>와 같은 유명한 사의화를 남긴 문인이라는 말은 자세히 전하지 못했다. 신라 전시관 마지막 지점에 세워져 있는 진흥왕 순수비 옆면에 추사가 새겨 넣은 글을 알려주려 하니, 삼국시대, 신라 진흥왕, 금석학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기에 간단히 넘어갔다. 나의 영어 실력이 짧아 아쉽다고 그녀에게 거듭 사과하면서도, 추사의 글씨를 전과는 다르게 감상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추사 김정희와 관련된 책들을 읽고 정리한 후라 그런 듯하다. 이제는 진부한 표현이 되었지만 “아는만큼 보인다.” 그리고 느낀다. 어쩌면 나이 때문일수도...^^
연행에서 옹방강과 완원과 같은 문인들을 만나고 돌아온 후 옛 비문들을 연구하던 그가 1816년과 다음해에 북한산 비봉에 올라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하고,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이다. 병자년 7월 김정희·김경연이 오다. 정축년 6월 8일 김정희 조인영이 함께 와서 남아 있는 글자 68개를 면밀히 살펴보았다.(『추사 김정희』 유홍준 101p)”
라고 새겨 넣은 글씨가 더 감격적으로 다가온다. 황초령비 연구와 함께 진흥왕 당시 신라의 영토에 대한 고증을 할 수 있는 증거를 발견한 것도 역사적이지만, 발견한 후 소회를 적어 조인영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이듯, 산을 오르고 거듭 탁본을 뜨고 희미해진 글자들을 읽어내기를 반복하다 진실을 만났을 때의 기쁨이 뿌듯하게 전해져 온다.
내가 추사를 본격적으로 읽고 알게 된 것은 박철상의 『세한도』라는 책을 통해서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세한도>라는 그림을 보고 궁금해서였다. 10년 전 쯤 한 대학 논술 시험에서 이 <세한도>가 제시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논술 문제를 찾아봤었다. <세한도>에 얽혀 있는 추사와 우선 이상적의 에피소드와 발문을 제시하고, 도상으로 고흐의 <구두 Shoes>를 감상한 예시문의 방법대로, 감상을 쓰라는 문제였다. 이렇게 해서 더 자세히 본 그림은 마음을 묵직하게 움직이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박철상의 『세한도』를 찾아 읽게 되었다. 추사의 연행과 연경에서 옹방강과의 만남, 청나라 문인들과의 학예연찬, 돌아와서도 완원, 주학년과 같은 학자들과의 서신 교류, 제주도 유배와 제자 우선 이상적의 변치 않는 마음 등 <세한도>가 그려진 배경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명문가 출신으로 증조부가 영조의 사위인 명문가 출신으로, 황산 김유근이나 이재 권돈인과 같은 벗을 두고, 병조참판에까지 오르는 입신(立身)을 한 그가 정적에 의해 무고를 당하고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서 제주도 위리안치 유배형을 받았다. 멀리 떨어진 외로운 섬에서 “날이 차가워진(歲寒)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松柏)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라고 한 공자의 말을 인용한 발문은 추사의 외롭고 쓸쓸한 마음이 더 절절하게 느껴졌다. 역관인 이상적이 자신을 잊지 않고 북경에 가서 귀한 책을 가져다주는 그의 선의와 정성을 칭송하는 추사의 말이 감동보다는 오히려 차가운 쓸쓸함으로 다가왔다. 세한도에 그려진 핍진한 소나무와 잣자무(혹은 측백나무), 아무 장식도 없이 비어있는 듯 보이는 집 한 채 역시 그의 고독한 마음을 대변하는 듯 했다. 이 제주 유배기간 동안 추사의 글씨는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형성했다. 얼마나 쓰고 또 쓰면서 외로움을 달랬을지를 짐작하게 한다.
유홍준의 『추사 김정희』에는 좀더 자세하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등장한다. 그의 그림이나 글씨에 나타나지 않은 것들에 관해 작가의 고증과 상상력으로 엮어가는 지점들이 있어 더욱 흡입력이 있다.
추사의 독특한 글씨만큼이나 성격도 남달라서 주변에 정적을 만든 것으로 작가는 짐작한다. 그의 결기는 유배지를 향하는 중에도 보였던 것 같다. 대둔사에서 초의를 만났을 때 추사는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 대신 자신이 써준 글씨를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성격도 제주도 유배기간 동안 다듬어져서 유배생활을 마치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이광사의 글씨로 바꿔달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지금은 원교 이광사가 신지도에 유배되었을 때 쓴 ‘대웅보전’이라는 글씨가 걸려있다고 한다. 완당의 예서체를 보면 인생을 생각하게 된다. 그의 인생이 담겨 있어서 추사체라 불리는 것이 아닐까?
유홍준의 책은 수록된 작품 사진들 중에 위작 논란이 있는 듯하다. 그런 내용들만 빼면 내게는 많은 것을 알게 해준 책이었다.
유홍준의 『추사 김정희』에는 ‘완당바람’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추사가 연경을 다녀온 후 연경의 문인들과 교류를 하며 서화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추사의 영향을 받거나 그와 함께 했던 당시 조선의 문인들을 소개하고 있던 그의 벗 권돈인은 추사의 그림과 글씨를 그대로 따라 했던 절친한 관계였다. 추사의 제자 중에는 이상적처럼 중인 출신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 ‘완당바람’이란 용어는 이동주교수가 사용한 것이다. 그는 완당이 “난초 그리는 법은 또한 예서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의 향기와 서권의 기미가 있는 연후에 얻게 되느니라. 또 난초 그림의 법은 가장 화법이라는 것을 꺼리느니 만일에 화법이 있으면 한 붓도 그리지 않는 것이 가(可)하다”고 하였는데, 문인화의 묘미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그의 “불이선란(부작란)”에 그의 이런 정신이 잘 나타나있다. 이 문인화의 새바람은 석파 이하응과 운미 이하응에게 이어진다. 이동주 교수는 이 ‘완당바람’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완당 생전과 죽은 뒤의 석파 · 운미시대를 통하여 일종의 완당바람이 불고, 이 바람을 계기로 하여 문인화의 새 바람이 한국의 화단을 덮어서, 그때까지 유행하던 사경산수 · 속화의 터전을 일조에 부숴버리게 되었다. 그런데 야릇한 일은 김 완당과 석파 대원군, 민 운미가 살던 시대의 성격이다.…… 그렇다면 위데 든 완당바람을 타고 온 문인화의 절묘한 맛이 과연 어느 시대, 어느 사회층의 풍조를 상징하느냐 하는 의문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옛그림』이동주 334p)”
이동주 교수가 이렇게 부정적으로 사용한 ‘완당바람’이 유홍준 교수에게 와서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3권의 책 모두 완당, 추사, 보담재… 김정희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나 그들이 중점을 둔 작품들이 약간씩 다르기는 하다. 내겐 첫사랑처럼 설레고 처음 아는 지식들을 서투르게 마주쳤던 박철상의 『세한도』가 추사에 관한한 최고의 책이다.
22년 전 아이들과 함께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던 기억이 내겐 특별하다. 큰 아이가 여섯살 작은 아이가 세살, 게다가 막내는 뱃속에 있었을 때였다. 큰 아이가 세네번쯤 "엄마 얼마나 남았어?" 라고 묻고, "다왔어"라고 대답하는 내게 아이는 "엄마도 거짓말하네!"라고 해서 남편과 내가 웃었다. 바로 직전 월출산에서 아빠의 거짓말에 속아 출렁다리까지 갔다왔으니, 불안하고 의심할 수밖에. 그래서 강진 다산초당을 생각하면 이 대화와 풍경이 함께 떠오른다. 그때를 아이들은 기억도 못하지만 비오고 무더운 산길을 오르며, 나는 그 기억때문에 또 혼자 웃었다.
이번 가족 여행은 완도, 신지도, 고금도, 해남, 강진, 광주, 전주를 잇는 남도 여행이었다. 남도에는 유배지가 많다. 김정희의 부친 김노경이 유배되었던 고금도까지는 완도에서 신지도와 고금도까지 이어지는 다리가 놓여있었다. 신지도의 절경 명사십리와 강진 다산초당과 같은 풍경 속에 유배형을 살고 있던 사람들의 외로움과 회환을 떠올려 본다. 절로 글이 써지고 붓이 달리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