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단순히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인 줄 알았다. 그건 그렇긴 하지만 전쟁 직후의 인간 군상과 이루어질 수 없는 인종 간의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생각해 보면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많지만 이렇게 전쟁 이후를 보여주는 소설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물론 찾아보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제목이 독특하다. 그레첸을 멀리하라니. 무슨 말인가 했더니, 2차 대전 직후 독일은 아직 자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외국인 병사들과 흥청망청 술렁거리는 문화가 팽배했다. 그래서 그 외국 병사들에게 성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종의 그들만이 통하는 은어 같은 지침을 하달한 것으로 한마디로 독일 여자를 조심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마음껏 자유를 누렸다. 아마도 그레첸은 독일 여성을 지칭하는 일종의 대명사 같은 이름인듯하다. 우리나라에 순희나 영희가 여자 이름의 대명사인 것처럼.
그렇다고 전후의 모든 독일 여성이 다 성적으로 문란했던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주인공 그레타는 순결했다. 전쟁 중 여성들이 어떻게 착취 당하고 소모되는지 아는 가족들은 아직 어린 그레타를 보호하기 위해 일찌감치 남자아이처럼 머리를 짧게 해 사람들의 의심을 피했다. 그런 그레타가 미국의 흑인 병사 밥 쿠퍼를 만난 건 우연 마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를 전장에 보내고 너무 오랜 나날 그리워하던 그레타가 밥 쿠퍼를 의지했던 건 당연했을 것이다. 처음엔 그저 인간적인 호기심과 연민 뭐 그런 이끌림으로 가까워지고, 결국 자연스럽게 살을 섞고 딸 마리까지 낳았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마리는 애초부터 환영받을 수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적어도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고 상황은 역전된다.
그렇게 그리워했던 다정한 아버지가 돌아왔지만 전쟁 후유증을 겪는지 전같지가 않다. 가족들에게 까칠하게 대하고, 그렇게 사랑했던 딸 그레타가 미국 양놈 그것도 깜둥이와 놀아나더니 급기야 족보에도 없는 딸까지 낳았다고 대놓고 혐오한다. 결국 집에서 마리를 안전하게 키울 수 없다고 판단한 그레타는 마리를 어느 가톨릭 아동보호단체에 맡기게 되지만 자식을 버린 죄책감과 사라진 밥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으로 정신병원과 교도소를 번갈아 드나드는 신세가 된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그레타가 병원에 있을 때 알게 된 몬테라스란 의사와 정식으로 결혼도 하고 아들 톰을 낳고 그럭저럭 안정적인 삶을 살지만 마음속엔 늘 잃어버린 딸과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밥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과 죄책감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나이 들어 80대 중반의 노인이 된다. 하지만 편안히 죽을 일만 남을 줄 알았던 그녀에게 치매가 왔다. 하지만 그때까지 아들 톰은 엄마가 그런 어려운 삶을 살았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평소 그다지 좋은 모자관계는 아니었으니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엄마의 과거를 안 이상 톰은 엄마가 기억을 더 잃기 전에 물음표로 남아 있는 엄마의 연인과 이제까지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엄마의 딸이자 피부색이 다른 누나를 찾기로 결심한다. 이 소설은 그런 톰의 여정을 그레타의 과거와 톰의 현재를 번갈아 가며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새삼 제일 먼저 깨달은 건, 전쟁 후의 상황은 어느 나라나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나라만 다르다 뿐 등장인물을 우리 식 이름으로 바꿔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전쟁이 끝나면 곧 안정을 찾을 것 같지만 그때부터 새로운 문제와 고통이 시작된다. 그런데 소설은 소설인가 보다. 흑인 병사와 독일 소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리고 있으니. 물론 그런 사랑이 없으란 법은 없겠지만 현실은 그보다 몇 배는 더 혹독하고 참혹하지 않을까.
전쟁 직후 흥청망청 댔다는 건, 단순히 전쟁이 끝난 것을 안도하고 축하하기 위한 것마는 아니라는 것쯤 독자는 알 것이다. 그것은 집단 스트레스를 광적이면서도 극단적인 방법으로 풀어 내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서로 다른 인종끼리 피와 살을 섞어 태어난 제3의 인종을 보통 혼혈아라고 하지만 그들이 또 어떻게 자신의 부모와 나라로부터 버림을 당했을지 알 수가 없다. 아마 그래서도 그레첸을 멀리하라는 뜻이었을 텐데도 말이다.
이 책이 쓰인 건, TV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일했던 저자가 우연한 기회에 입양의 문제를 다루다가, 전쟁이 끝난 직후 10년 동안 브라운 베이비 즉 그레타와 밥처럼 서로 다른 인종에게서 태어난 혼혈 아이를 해외 입양시켰던 사례를 처음 접하고 충격을 받아쓴 것이라고 한다. 책에선 이것을 '브라운 베이비 플랜'이라 하여 국가적 프로젝트로 실시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해외 입양이라면 그 비슷한 일은 우리나라도 있었다. 전쟁 직후와 산아제한이 없던 시절 가난해 아이를 키울 수 없어 해외입양을 보내야 했던 시절이 있지 않은가. 두 나라 다 아이의 행복을 위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과연 그들이 행복했을까? (거기에 우리나라는 인종의 문제는 빠져 있다.)
또 읽는 내내 드는 생각은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들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당장 떠오르는 나라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전쟁에서 이기느냐 지느냐에 그야말로 모든 사활을 걸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전쟁이 끝나면 그 나라 국민들이 감당해야 할 상처와 트라우마는 실로 재앙적 수준이 될 것이다. 또한 그건 승전국이나 패전국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승리했다고 좋아하고, 패했다고 슬퍼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나라의 지도자는 샴페인을 터뜨릴지 몰라도 전쟁의 상처를 떠안는 건 국민의 몫이다. 그런 가운데 제2, 제3의 그레타와 마리는 또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올지 상상할 수가 없다.
모르긴 해도 독일에서는 혼혈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낸 사례는 있지만 '브라운 베이비 플랜'이란 공식 명칭을 달고 시행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건 소설의 사실적 묘사를 위해 저자가 자의적으로 지어낸 명칭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또 그런 만큼 이 책은 소설임에도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실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물론 소설이 순수 허구만을 다루는 장르는 아닌지라 사실을 각색해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가히 가슴을 울리는 문제작이란 생각이 든다. 특히 그레타가 마리를 잃고 생일 때마다 썼던 편지 부분을 읽는데,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간혹 우는 적은 있어도 책 보고는 여간해서 울지 않는 내가 이 책을 보고는 눈물이 났다.
답장이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어미의 마음이 어떨까. 우리 역시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내고 그 생모들은 얼마나 많은 편지를 썼을까 상상해 본 적이 없다. 그래도 세상이 좋아져 그 나라나 이 나라나 그렇게 헤어진 부모와 자식이 만나는 일도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직도 만나는 것이 못 만나는 것에 턱없이 낮을 것이다. 도대체 이 아픈 인간의 역사는 언제 누구에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 그래도 소설이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걸 보면 그건 모르긴 해도 저자가 대중을 의식한 결과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솔직히 약간은 동화적인 느낌도 들어 나 개인적으론 그게 왠지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참고로 톰은 저자의 페르소나다.
이 책을 번역한 김동언 번역가는 이런 말을 '옮긴이의 말'에서 남겼다. 무릇 소설이란 현실과 맞서는 장르이며, 현실을 넘어서고자 하는 장르임은 여전히 유효하다. 더욱이 시대와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야말로 우리 소설의 전통이며 미덕이라고 했다. 저자는 이 미덕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잘 구현해 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 전쟁 후를 생각하라고 지금의 전쟁국에 촉구하는 것도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세기 때 전쟁의 후유증은 오늘날에도 지문처럼 남아 아직도 인간을 괴롭히고 있다. 모르긴 해도 그 후유증은 다음 세기에도 계속 이어질 것 같다. 그렇지 않더라도 역사가 기억하겠지. 또 오늘날의 전쟁은 훗날 어떻게 사람을 괴롭힐지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하다. 지금 전쟁을 벌이고 있는 나라들은 부디 지금이라도 전쟁을 중단해 주길 이 지면을 통해 촉구한다. (알 리없겠지만.ㅜ)
#뒤란 #그레첸을 멀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