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뭐랄까, 편집부터 마음에 든다. 여름의 더위를 조금은 식혀줄 요량으로 만든 것 같다.
옅은 핏물이 배인 것 같은 책장을 넘기다 보면 음산하면서도 섬뜩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욕조에 처녀들의 피를 받아 목욕했다는 '피의 백작부인' 에르제베트 바토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의 장면에서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책의 낱장 가장 자리에 고여 있는 피를 본 순간, 우아한 알몸을 욕조 안의 붉디 붉은 핏물 속에다 밀어 넣고는 손가락 끝으로 한방울 떨어뜨린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키게 한다. 혹은 반항하는 처녀의 심장을 찌르는 순간 튕겨진 핏물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아무튼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책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다.
뱀파이어 이야기는 어째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에서부터 비롯되어 21세기 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 질긴 생명력의 원동력은 무엇일까를 탐구한 저자는 역사적 문헌이나 텍스트, 종교 영화 등을 살펴봄으로써 뱀파이어의 원류와 패러디, 외피를 바꿔입고 나타난 진화의 과정을 짚어 나가고 있다.
'뱀파이어에게 물린 사람은 뱀파이어가 된다.' 햇빛은 뱀파이어에게 치명적이다' 그러다 드디어 " 이 모든 악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이런대도 신은 존재한단 말인가?" 자기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는 뱀파이어까지 등장하기에 이른다. 또한 뱀파이어는 그림자가 생기지 않고 거울에 모습이 비치치 않는다는 설정은 낭만주의의 오싹한 도플갱어 이야기에서 차용한 것이다.(p.170) 라는 흥미로운 사실도 일러준다.
그렇다면?
뱀파이어를 있게 한 요인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바로 에로스와 죽음에 대한 공포다.(불가사의한 일을 설명할 길이 없는! 그리고 악령들!) 어쩌면 '뱀파이어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병든 자의 혼란스러운 상상력의 산물이자 살아남은 자의 미신일 뿐이다.' (p.57)라고 한 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하렌베르크의 지적과 함께, 여러 학자들은 뱀파이어에 관한 히스테리를 심리적 근원에서 찾고 있다. 하여간 인간의 상상력이란!
우리나라도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구미호가 있다. 남자들을 홀려 간을 빼먹으며 천년을 산다고 하는 구미호와 뱀파이어가 공통점이 있다면 주로 이성을 선택한다는 점에 있다. 매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놓고 있는 순간, 구미호는 간을 빼내기 위해 날카롭게 갈아둔 손톱을 치켜세우고는 남자의 가슴을 움켜뜯었을 것이다. 하룻밤의 황홍경이 죽음으로 대체되는 순간이다.
오늘의 주인공, 뱀파이어는 어떻게 할까? 치명적일 만큼 매혹적이고 에로틱하게 부드럽고 깊숙한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댄다. 나른한 에로티시즘에 빠져버린 그녀(혹은 그)는 자신의 피가 빨리는 줄도 모른 채 몸을 맡겨두고 있다. 왜 하필 목덜미인가? 뜨거운 입술로 목을 덮치는 성질 급한 뱀파이어든, 긴 머리카락을 헤치며 부드럽고 향기나는 목덜미를 찾는 뱀파이어든, 에로스와 죽음, 이 모두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죽어야 사는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 자기 파괴적이면서도 영원한 삶을 갈망하는 이 둘은 길항적인 관계 속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가 자신의 목덜미를 덥썩 물었을 때. 순간 생명의 위협과 함께 에로티시즘을 경험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를 눈치 챈 영리한 뱀파이어들은 동일한 방법으로 피를 빨기로 합의하였고 그 전통을 아직까지 고수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건 이 글을 쓰는 사람의 상상력의 소산이다. 뱀파이어와 관련해 무엇인들 상상하지 못하겠는가?....
어쨌든,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이든.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음침하게 자리잡고 있는 불가사의한 실화이든, 뱀파이어 이야기는 각색되고 윤색되어져 무궁무진한 이야기로 거듭나고 있다. 한 마디로 네버 앤딩 스토리다. 여기에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할만한 문구를 하나 발견했다.
"그녀는 시간의 뿌리에 자신의 피로 거름을 준다"- 찰스 스윈번 <비너스 찬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