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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뭐하게?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사사키 아타루
  • 12,150원 (10%670)
  • 2012-05-18
  • : 4,508

 

 

요 며칠, 책을 손에서 놓았다. 그저 먹고 마시고, 깔깔대고 원초적(?) 본능에만 충실했다. 행복했다. 여름휴가에서 돌아와서 마감을 넘겨버린 리뷰를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상하다... 조금 낯선 이 느낌은 뭘까?

어김없이 돌아가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는 않았다. 읽는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쓴다는 것은 분명 행복하고 조금의 고통이 동반된 즐거운 일이지만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것으로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물음과 함께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책 읽기와 쓰기의 맨 몸과 마주한 느낌이다. 아직도 시작인가?.... 이적지 무수한 책들을 읽었지만 잊기 위해 읽었다는 것(나는 정말 그랬다), 읽을 수 없는 책들을 읽어 냈다는 것,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하루 종일 책만 끼고 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은, 책을 사랑해서 일까?...단지 사랑말이다. 읽기 위한 광기가 아닌 그저 단순한 사랑, 타인을 꿈꾸며, 사유의 바다에서 헤엄치기를 꿈꾸며, 책의 깨알같이 박힌 글자들을 어루만지며, 표지의 관능미에 끌려 끊임없이 탐닉하는 일 말이다. 저자도 지적했듯이 자신을 하나의 '우뚝 솟은 전체'의 모습으로 제시하려는 필루스적 향락에 젖어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집안에 쌓아 올려진 책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지럽다. 소중하게 어루만지고 더듬었던 것들이다. 어쩌면 팔루스적 향락에 젖어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에 잘라라 향락에 젖어 있는 그 손으로 대체해본다. 책이 혁명이 되지 못하는 아니 책이 혁명이 될 수 없는 시대에 기도만 하는 손을 자를 수도 없겠거니와 대다수의 사람들은 읽기의 혁명보다는 그냥 편하디 편한 손을 걷어 올리고 기도하고 말리라.  

 

 

 

인간에게는 분명 읽고 기록할 수 있었던 문자는 혁명이었다. 혁명에는 항상 책이 있었고, 읽기의 능동적인 행위가 있었다. 루터의 종교혁명을 근대의 여명으로 보는 이유도 읽고 쓰고 사유하고 행동하는 주체적인 인간과 인쇄술, 제지 안경 등의 물질적 기반이 거기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건 광기의 행위라고, 책을 '읽을 수 없음'과 '읽기 어려움'에 맞설 용기와 힘을 필요로 한다고 하였다. 책을 읽으면 아무래도 내가 잘못된 건지 세상이 잘못된 건지, 몸과 마음을 애태우는 이 물음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게 되는 게 책 읽기라는 것인데(p.153) 저자는 한마디로 혁명은 폭력이 아니라 문학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밤에 글을 썼는지 총 다섯 밤에 걸쳐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첫째 밤, 문학의 승리, 둘째 밤, 루터, 문학자이기에 혁명가. 셋째 밤, 읽어라, 어머니인 문맹의 고아여-무함마드와 하디자의 혁명 넷째 밤 우리에게 보인다-중세 해석자 혁명을 넘어. 다섯째 밤, 그리고 380만 년의 영원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의 문학은 요즘 통용되고 있는 소설이나 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애초 문자로 쓰인 모든 텍스트에다 춤이나 음악까지도 포함한 것을 문학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문학은 죽었다고 떠들어대는 시대에 저자는 문학은 절대로 죽지 않았다고 항변하고 있다. 또한 역사의 종말을 운운한 일본인 학자를 향해 빈정댈 줄 아는 호기도 보인다.아무튼 이 책은 읽기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잡소리 집어치우고 읽기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 기도만하는 손보다 성경을 잡고 읽기부터 하라는 충고는 참으로 적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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