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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떳떳하면 된다.”
한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요.
근데 지금은 그게 순진한 생각이란 걸 알겠네요.
어떻게 프레임을 짜느냐에 따라 한 인간이 대선후보급 인물에서
구속돼야 마땅한 나쁜놈이 돼버리더군요.
조국이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제 전문분야, 그것도 제가 속한 대학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선
제 나름의 진실을 전해드리자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이렇게 변명해서 뭐하나, 어차피 아무도 안 믿을 텐데, 하는 회의감도 들지만,단 몇 분이라도 이 글을 읽고 오해를 풀면 좋겠고,
부당하게 오해받는 저희 대학 구성원들을 위해서도 글을 쓰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1. 논문분석

이 연구는 주산기, 즉 태어날 때 산소부족으로 뇌손상을 받는 아이들의 유전자를 분석한 것입니다.
어떤 유전자를 가진 아이들이 이런 일을 더 많이 당하는가,인데요,
이 연구는 2008년 이루어졌고, 그 해 말 투고돼 2009년 병리학회지에 실립니다.
참고문헌 서른 개의 연도를 보면 놀랄 것입니다.
2000년 이전 연구결과들이 대부분이고, 2005년 이후 것은 단 4개에 불과합니다.
이 말은 그다지 새로울 게 없는 연구라는 얘기입니다.
주산기 산소부족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찾는 연구는 오래전부터 있었고,
여러 유전자가 이 현상과 관계가 있다는 게 이미 밝혀졌습니다.
“그래? 그럼 나는 혈관 상피세포의 NOS 가지고 해봐야겠다”
한 사건은 수많은 요소가 결합돼서 일어납니다.
당연히 NOS란 유전자도 산소부족과 관련이 조금은 있고, 실제 결과도 그렇게 나왔습니다만,
그래 봤자 남이 한 연구를 조금 변형시킨 것에 불과하지요.
Originality가 없어서 해외학술지, 특히 좋은 학술지에는 실리지 못할 테지만,
국내학술지에는 얼마든지 실릴 수 있지요.


이 연구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샘플을 모으는 것인데
이 일은 2002-2004년에 이미 끝났습니다.
연구자는 이 샘플에서 DNA를 뽑아 PCR이란 기계로 증폭하기만 하면 됩니다.
사이언스, 네이처에 실리는 논문들을 보면 연구방법이 굉장히 길어요.
그런데 이 논문은 한 페이지가 채 못됩니다.
실제로 간단한 연구니까요.
DNA를 뽑아서 PCR을 돌린 연구자가 있다면, 1저자를 줘도 무리가 아닙니다.


2. 숟가락만 얹었다?

8월 22일자 조선일보 기사는 연구가 끝난 논문에 조국딸이 이름을 얹었다고 합니다.
이게 진짜 황당한 일이지만, 기자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만 합니다.
논문 안에 ‘이 연구는 2006년 한국연구재단에서 받은 연구비로 이루어졌다’는
소위 ‘연구비 사사’가 들어 있거든요.
기자 입장에서는 2006년에 받은 돈으로 조국 딸의 연구를 지원했다고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요즘은 연구비가 현금으로 나오지 않고 카드로 나오니,
2006년 한 해 동안 다 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니 저 가설은 맞지 않아요.
그 대신 이런 추측은 할 수 있지요.
2006년에 연구비를 다 썼다면 연구도 그때 이루어졌겠지?
그러니까 조국딸은 그 연구에 숟가락만 얹은 거겠네?


한 언론에서는 이 연구비를 받은 분-논문에서는 6명의 저자 중 5번째 저자-이
“조국 딸을 본 적이 없다”고 하는 바람에 잔잔한 파문이 일기도 했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분은 실제 실험을 한 게 아니어서입니다.
나온 결과를 해석할 때 주저자인 장영표 교수에게 도움을 준 것이
공저자로 들어간 이유지요.


그렇다면 연구비 사사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5번째 저자분-이하 5저자-은 2006년 연구재단에서 연구비를 받습니다.
그 목적에 맞게 연구를 수행했고, 2007년 비교해부학회지라는 해외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했습니다 (Comparative Medicine 2010년 인용지수 1.25)
그리고 그는 조국딸이 1저자가 된 그 논문에서 일정 역할을 수행합니다.
조국딸의 연구는 별다른 연구비 지원 없이 수행됐기에,
그는 그 논문에 자기가 2006년 받은 연구비 사사를 넣습니다.
주저자가 아닌, 5저자가 사사를 넣는 것이 조금은 이례적이지만,
연구자 입장에선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연구비를 받으면 그에 걸맞은 업적을 내야 하는데,
이왕이면 그 업적이 많을수록 다음에 연구비를 딸 때 유리하거든요.
같은 연구비로 논문 1편을 낸 사람과 5편을 낸 사람을 상상해 보시면 됩니다.
5저자는 그런 차원에서 약간의 욕심을 부린 것인데,
그게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기사가 만들어지네요.


3. 왜 장교수는 조국딸을 박사로 표기했을까요?


논문이 나오면 교내 시스템에 등록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승진이나 호봉승급 등에 반영이 되니까요.
정보를 입력할 때 중요한 것은 논문제목과 학술지이름, 게재연도입니다.
나머지 사항은 다 부수적이어요.
학교 행정팀에서는 이 정보를 가지고 해당 논문을 웹에서 검색하고,
이 교수가 저자에 포함이 됐는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따진 후 점수를 부여하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내 구성원인 장교수지,
다른 사람은 소속이 뭔지, 학위가 뭔지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학내 구성원이 대부분 박사인지라,
학위의 디폴트 값이 ‘박사’로 돼있다는 점이지요.
석사학위를 가진 저자를 입력한다면 박사를 석사로 고쳐야 되는데,
솔직히 이게 귀찮거든요.
그래서 그냥 다 박사로 놔두는 경우도 종종 있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제가 저자로 넣은 고교생도 찾아보니 박사로 돼 있더군요.
이게 학내검증을 피하기 위한 꼼수다, 라고 하는데,
저자가 고교생이라고 행정팀에서 따지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 논문에 등재된 저자를 다 입력 안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저자가 10명, 20명인 경우 그 사람들을 어떻게 다 입력합니까?
그냥 자기 자신만 입력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기에,
저 혼자만 써넣은 경우도 제법 됩니다.
어차피 교학팀에서 논문 원본을 보면서 저자 수를 카운트한 뒤
교수업적 점수를 부여할 테니까요.


이건 그 당시 그랬다는 것이고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교내입력 시스템이 바뀌더군요.
미성년자 논문이 문제가 되니까 저자에 미성년자를 체크하는 칸이 생겼고,
박사학위 기재가 문제가 되니까 디폴트 값이 ‘학위없음’으로 바뀌더군요.
한 가지 의문은 조국딸의 소속을 왜 의과학연구소로 했는가, 입니다.
동명이인도 있을 수 있으니, 입시에 써먹으려면 해당 고교 이름을 써넣는 게 나았을 텐데 말입니다.
의과학연구소 인턴쉽을 내세우고 싶었어도, 해당 고교도 같이 병기하는 게 맞거든요.
여기에 대해선 고교생이 1저자인 걸 숨기려는 의도도 있지 않았을까 의심이 됩니다.


오늘 단국대에선 다섯명 정도가 플래카드를 들고 장교수의 파면 & 구속을 주장했습니다.
정의에 대한 그들의 용기를 높이 평가합니다만,
제 기준엔 장교수가 그럴만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건 조국딸도, 최소한 이 연구에 있어서만큼은,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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