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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한 자리 차지하고는 있지만, 내내 읽을 기회를 놓쳐 ‘머무는 중’으로만 있던 세계문학 단편선 몇 권을 뽑아 들었다. 이 덩치들에게 숨통도 틔워줄 겸. 올해 안에 몇 권이라도 완독해 봐야지, 혼자 다짐을 실컷 하다가 이게 또 다짐까지 해야 할 일인가 싶지만, 다짐씩이나 필요하다. 몇 편 읽고 덮어도 좋고, 다른 책으로 넘어갔다 돌아와도 좋고, 이 책들과 조금 느슨하게 지내볼 생각이다.


랭스턴 휴스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 외 40편>

「떳떳한 코라」에는 멜턴이라는 아담한 마을에서 40년을 살아온 코라가 나온다. 주민들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사람. 그녀를 사람들은 흑인, 검둥이라고 부른다. 스튜더반 집안의 잡부로 일하며 개처럼 취급받아도 코라는 견딘다. 나가봤자 더 가난한 백인 집에서 학대받을 게 뻔하니까. 망할 아버지는 주정뱅이에다가 딸린 자식은 또 왜 그리 많은지, 그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부담감에 코라는 아이였을 때부터 놀 시간조차 없이 지내왔다. “예, 마님.”을 입에 달고 순종하며 지내는 코라가 백인 노동자 조와 짧은 사랑을 나누고 임신하지만, 그가 떠나고 혼자 낳아 키운 아이마저 백일해에 걸려 품에서 떠나보냈을 때서야 신에게 악다구니를 해 본다. 그래서 주인마님의 딸 제시를 속으로 제 딸처럼 여기며 사랑으로 보살폈는데, 제시마저 그 집안의 위선과 거짓에 둘러싸인 채 죽게 된다. 그동안 참고, 보고, 알고 있었던 것들이 장례식장에서 더는 눌러지지 않는다. 오래도록 꾹꾹 눌러두었던 말들이 결국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아가씨, 내가 잠깐 할 말이 있어요.”

이 단편선에 담긴 이야기들은 인종차별을 이야기하면서도 누군가를 줄곧 짓눌리는 사람으로만 두지 않고, 그렇다고 반대편 사람들을 악역으로 세우지도 않으면서도 사람을 좀 불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경매에 부친 소년」에서는 예술과 음악을 사랑하며 살아가던 백인 부부가 집에서 일하던 흑인 여성이 죽은 뒤, 그녀의 사촌인 흑인 소년을 집에 들이게 된다. 잘해준다. 친절하다. 그런데 그 친절 앞에 서 있으면 이상하게 한 발 물러서고 싶어진다. 선의라고 하기엔 어딘가 미심쩍고, 악의라고 하기엔 또 너무 멀쩡하다. 그래서인지 이 부부에게는 늘 이상한 이물감이 남는다. 흑인 예술에 관심이 많은 부부는 영감을 얻기라도 한 듯 아이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곡을 쓴다. 이렇게만 말하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어 보이지만, 노예를 그려보고 싶었다며 그림의 제목마저 ‘경매 부쳐진 소년’이라고 붙이질 않나, 속옷을 벗어달라고 하질 않나. 이들이 아이에게 보인 애착과 관심이 너무나 기괴하다. 여기서 만만치 않은 인물이 하녀 매티다. 다루기 힘들어졌다며 주인부부가 내보낼 생각을 하자 그녀가 받아친다.

“우리도 당신들 백인들의 멍청한 짓거리에 염증이 나던 참이에요!”

부부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만큼 맹랑한 말. 매티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말. 차별, 억압 등 익숙한 이야기를 가져와, 익숙한 사람을 만들어내지 않는 거, 당연한 스토리 안 만드는 거, 이게 매력이다.



허먼 멜빌 <선원, 빌리 버드 외 6편>

작년에 이 책에 실린 「꼬끼오! 혹은 고귀한 수탉 베네벤타노의 노래」를 읽다가 허먼 멜빌이 보통 입담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뒤늦게서야 알아버리고는, 선뜻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모비딕>을 샀건만 언제 읽게 될지는 모르겠다. 일단 맨 처음에 실린 「바틀비」를 읽어봤다.

화자는 변호사다. 자신의 법률 사무소에서 문서를 베껴 쓰는 필경사 몇 명과 함께 일하고 있다. 건물이며 직원이며 자기 성격까지 한참을 설명한다. 자신을 꽤 좋은 고용주라고 생각하는 이 변호사의 관찰력이 빛나는 온갖 설명과 변명을 잘만 듣고 있다가도 내심 속으로는 ‘아니 그래서 바틀비는 언제 나오는 건데’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는! 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일반적이지 않은 듯 보이면서도 그렇다고 주변에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변호사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해석하고, 혼자 이해하고, 또 납득이 안 돼서 머리를 굴리고, 속은 속대로 타는데 겉으로는 평화를 유지하느라 하루 에너지를 다 쓰는 것 같다. 모르긴 몰라도 집에 가면 씻지도 못하고 쓰러져서, “으으……” 영혼 빠져나가는 앓는 소리 내면서 잠들진 않을지ㅋㅋㅋ 이 와중에 드디어!!! 바틀비가 등장한다. 조용해 뵈는 바틀비가 새로 들어와 변호사는 너무나 만족스럽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참으로 예상 못 한 일이 벌어진다. 피식 대다가 의아스럽고 답답하다가 착잡해지고 씁쓸함까지 맛보게 된다.

아, 행복은 빛을 불러들이고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즐거운 곳이라고 여기는 반면, 불행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잠복해 있어서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지. 병적이고 어리석은 머리가 빚어낸 망상임이 분명한 이런 서글픈 상상은 바틀비의 기벽과 관련된 좀 더 특별한 다른 생각으로 이어졌다. 나는 뭔가 이상한 것들을 발견할 것 같은 예감에 휩싸였다. 무정한 낯선 이들 사이에서 하늘거리는 수의에 싸여 누워 있는 바틀비의 창백한 모습이 떠올랐다. (p. 35)



윌리엄 트레버 <그 시절의 연인들 외 22편>

맨 처음에 실린 「욜의 추억」은 시작부터 묘했다. 호텔 테라스에서 깜빡 잠든 미스 티처가 눈을 떠보니, 산책을 나간 친구 미스 그림쇼가 앉을 자리에 낯선 남자가 와 앉아도 괜찮겠느냐고 묻는다. 미스 티처는 차마 안 된다고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퀼런이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대뜸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고, 미스 티처는 그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준다. 나였다면 진돗개 하나 발령과 동시에 이 사람이 계속 앉아 있으면 어쩌지, 해코지하면 어쩌지, 나중에 따라오면 어떡하지, 아마 온갖 걱정과 추측부터 하느라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도 못했을 것 같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내 앞에 앉아 있게 되는 이 상황 자체를 이렇게 오래 두고 보지도 않았을 거다.

처음에는 ‘도대체 이건 무슨 상황이지?’ 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왜?’를 따지고 있을 틈조차 주지 않으니 말이다. 퀼런이 욜에서 보낸 불행했던 어린 시절과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려줄수록,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이 상황을 조금 더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됐다. 미스 티처가 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왜 낯선 남자의 사정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는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등등, 이 모든 걸 판단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고 다른 한 사람이 그것을 들어준다는 일이 더 중요하게 느껴질 만큼. 이때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미스 그림쇼의 등장으로 어색한 분위기가 흐른다. 여기서 흥미롭게 들여다본 것은, 미스 티처가 퀼런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은 아주 사적인 마음과 그 마음을 옆에서 너무 아무렇지 않게 끊어버리는 미스 그림쇼에게서 느끼는 미묘한 불편함이었다.

“우리는 추억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윗옷 어깨에 비듬이 내려앉은 지저분한 낯선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짜증이 나 있는 미스 그림쇼에게 아무렇지 않게 껄껄대며 말하는 퀼런. 마치 ‘당신이 하는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사실인지조차 알 수 없군’ 하는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가벼운 대답 정도만 해주는 미스 그림쇼. 그런데 그 ‘가벼운 판단’이 미스 티처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아직 이야기를 다 듣지도 않았는데 누군가의 아픔을 이미 자기가 아는 도식 안에 넣어버리는 모습에 실망한 것 같기도 했다. 이쪽도 저쪽도 이해는 갔다. 언제나 타인의 마음을 깊이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비난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막상 내가 아끼는 사람이 타인의 아픔을 가볍게 바라보는 모습을 마주하면 어쩔 수 없이 실망하게 되는 그 감정. 희한하게도 별 감흥 없이 읽어내려 간 줄 알았는데, ‘나란 사람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충분히 흘러갈 시간을 주었던가’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든다. 사람의 이야기를 오래 듣는다는 건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전처럼 낯선 사람으로만 바라볼 수 없게 만들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함께.

일상에서 흔히 일어날 수도 있지만, 이런 상황을 내가 맞닥뜨릴 일이 있을까 싶기도 한 묘한 어긋남이 「탁자」에서 이어진다. 지극히 계산적인 유대인 가구 중개업자 제프스는 탁자를 사고파는 일을 통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추측하고, 그들의 삶을 짜맞추며 거의 확신까지 한다. 상상은 자유. 게다가 돈도 안 들고. 그런데 짐작을 사실처럼 굳혀버리는 일에서 완벽히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사는 게 바빠 남의 일에 관심도 없고 신경 쓸 필요성을 모르겠다며 무심한 얼굴로 마음속으로 중얼거릴진 몰라도, 조각조각 쪼개서 들여다보면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타인의 삶에 참 관심이 많다. 문제는 자기 안에서만 완결된 해석을 붙들고 내 짐작은 틀림이 없다고 자부하면서 그 생각을 어느 순간 사실처럼 믿어버린다는 것. 이런 심리를 드러내고 끝이 나버린다면 아, 뭐야 싶을 텐데, 제프스에게서 느껴지는 건 뜻밖에도 그의 고독과 결핍이었다.

제프스는 눈을 감은 채 마음속으로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넓은 빅토리아풍 집에 홀로 서 있는 자기 모습을 보았다. 그의 집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러 달이 흐르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구는 단 한 점도 없었다. 그는 팔고 또다시 샀다. 그는 카펫을 깔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가 온전히 제 것으로 소유한 거라고는 예전에 누군가가 아무런 가치 없는 물건이라고 일러 준, 오래된 라디오 하나밖에 없었다. (「탁자」, p. 46)

조금 더 황당하고 조금 더 긴장하며 읽게 만든 「펜트하우스」는 런던의 한 건물에서 개 한 마리와 함께 사는 중년의 독신 여성 윈턴의 이야기다. 그녀가 사는 건물의 꼭대기층에는 돈 많은 런카 부부가 살고 있다. 그 집에서 일하는 비안카가 식료품점에서 만난 윈턴에게 펜트하우스 구경을 부추기고, 윈턴은 본의 아니게 자신의 개와 함께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게 된다. 수줍음이 많아 15년을 외롭게 지낸 윈턴이 먼저 다가와준 비안카의 손길을 저버릴 수가 없었나 보다. 마침 수도를 고치러 와 있던 관리인 모건까지 합세해 칵테일을 마시는 세 사람. 그런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던 모건이 꽃병을 깨트리고, 카펫 한가운데가 큼직하게 젖어버리는 대참사가 벌어진다. 뭔가 이럴 줄 알았어 싶은 일이 기어코 벌어지니 속이 탄다. 어휴. 게다가 오늘은 런카 부부의 펜트하우스를 잡지에 싣기로 한 사람들이 오기로 한 날. 당황스러운 윈턴 앞에서 모건과 비안카는 깔깔대고, 모건은 윈턴이 데려온 개가 꽃병을 깨트렸다고 하자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 그 뒤로도 짜증 나고 어이없는 상황이 이어지는데 나랑 윈턴만 쫄려 죽게 생겼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비안카와, 관리인으로 지내며 여러 세입자의 못 볼 꼴을 다 봐온 탓에 분노와 억한 심정으로 가득한 모건. 이런 두 사람을 보며 윈턴은 나이도 훨씬 많고,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p. 71)인 자신이 이 상황을 정리해야겠다고 느끼기라도 한 건지, 온갖 상황을 머릿속으로 상상한다. 곧이어 펜트하우스 주인 부부와 잡지사 사람들이 도착하고, 서로를 이해시키고 오해를 풀고 싶어 하는 마음은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는다. 윈턴이 이 집에 발을 들일때 부터 왜인지 그냥 제발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천만 번 했던 내 속도 점점 끓어올랐다.

재미? 글쎄. 집중하느라 손톱을 잘근거리며 읽게 만드는 그런 재미는 아마 이 책을 덮는 순간까지도 없을지도 모른다. 아직 이 한 권도 다 읽지 않은 터라 대단히 섣부른 판단일 수 있지만, 느낌상 그렇다. 그런데 왜 자꾸만 그 한 장면, 그 잠깐 느껴진 분위기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무심히 뽑아내는 한마디와 그 순간의 감정 속에서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마음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 굳이 재미를 찾지 않게 만드는 이유가 되어주는 것 같다. 「펜트하우스」의 윈턴만 해도 내내 외롭게 지내다가 타인의 손길에 15년 만에 용기를 냈다. 처음으로 남들처럼 평범하고 소소한 즐거움에 어렵게 한 발 내딛어 본 날, 그야말로 개떡같은 일에 휘말린 거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그럼 그렇지. 살던 대로 살지, 내가 무슨.’ 이런 자괴감에 다시 몸을 움츠리진 않을까. 그런데 또 누가 알아. 사람이라면 아주 진절머리가 나서 ‘아, 됐다. 나 혼자서 잘 먹고 잘 살 거야!’ 할지도 모르지.

윌리엄 트레버라는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 때문인지 궁금했었다. 그의 글이. 몇 편의 이야기를 읽으며 느낀 건, 이해가 필요한 여러 상황 속에서도 이상하게 낯설지 않은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는 거다. 인물의 말에 담긴 뉘앙스가 어느 순간 ‘아, 이거’ 하고 확 읽히면서 내가 알던 그 마음을 알아보게 되기도 하고,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한 번씩 붙잡히기도 한다. 잔잔하게 이야기가 흘러가다가도 어느 순간 공기를 확 제압해버리는 문장이 툭 등장한다. 그 갑작스러움에 쓸쓸했고 서글펐고, 때로는 간사했고 오만했고 외로웠던 그때의 내 마음들이 자연스럽게 불려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도 나의 곁이 필요한 때가 있다는 생각도 하면서. 그러던 중 최근에 받아든 헤르만 브로흐의 <현혹>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나에게 속하지 않고 인류에게 속해 있는 무한성, 어제를 지워버리고 내일만을 인정하는 무한성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시시한 일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 일이란 이제는 인식하는 일이 아니고 살기, 함께 살기, 필요할 땐 가끔 도움을 베풀기이다. 나의 내일이 점점 짧아지고 있으니 그렇게라도 해서 어제를 구원하고 싶은 모양이다”


8월이 가고, 9월이 왔다. 지나가고, 새로 왔다.
새로 온 것 중에는 책도 몇 권 있다. 그리고 커피까지. 드립백, 오랜만이다. 알라딘에서 커피를 사는 건 처음이다. 디카페인은 제외하고 싱글 오리진으로만 고르다 보니 종류가 몇 가지밖에 없어, 일단 종류별로 골라봤다. 궁금하니까. 이제 차가운 컵을 쥔 손의 시원함보다 온기를 찾게 되는, 따뜻한 커피가 생각나는 계절에 다다르긴 했나 보다.

그래도 아직은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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