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나는 작가의 진솔한 고백이 담긴 서문이 좋으면, 본문의 마지막 장까지 그 울림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책의 서문은 유독 더디게 읽혔다. 별로여서도, 거창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과한 몰입일지 모르겠으나, ‘그때의 나’를 자꾸만 불러내는 솔직한 말들이 다음 문장과 문단으로 쉽게 넘어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목구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가 내려간다. 작가와 나만의 은밀한 공감이자 소통이었을까. 심리적 연대였을지도.
그 뜨거운 온기가 좀 가시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제목의 의미를 생각해 봤던 것 같다. 여전히 무언가를 단정 지어 말하는 일에는 주춤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내가 배워야 할 수많은 것 중에 운이 좋게 깨달은 게 하나 있다. 타인의 고통을 살피기에 앞서 우선 나 자신을 제대로 마주해야 한다는 것. 내 안의 고통과 슬픔을 충분히 들여다보고, 스스로 치유하는 시간을 가져본 뒤에야 비로소 타인의 아픔을 ‘내 방식대로 함부로’ 껴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저 읽는 것으로 그칠 뿐인 사람이라는 것이 겸연쩍어 읽는 것조차 피했던 시간을 지나, ‘아는 것’만이라도 하겠다는 마음을 택하며 한 장씩 읽어 내려갔다.
이브 엔슬러. 극작가이며 작가이자 사회 운동가인 그녀가 서문에 ‘사유’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속도를 줄이는 것과 되돌아보고, 보고, 진정으로 다시 보는 것”에 관한 이야기라고 이 책을 설명했다. 일단 속도를 줄이고 되돌아보는 것에 나는 걸려들었다. 이제 남은 건, 보고, 진정으로 다시 보는 일일 테다.
작가는 전 세계 고통이 머무는 자리를 직접 찾아갔고, 그곳에서 만난 소외되고 짓밟힌 존재들의 목소리를 이 책에 담아냈다. 너무나 참혹해서 사실이라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까지. 누구나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도록 참 쉬운 말로 쓰였다. 보라는 걸 테지. 많은 사람이 봐주길.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유하길. 그리고 그 아픈 이름들을 잊지 말아 달라는 듯 간절함이 문장 곳곳에 남아 있다.
가장 안전해야 할 집에서 가장 잔인한 배신을 당했던 아이가, 커서 전 세계의 비명이 들리는 곳을 찾아다니며 남의 상처를 어루만진다는 것. 자신을 파괴했던 고통의 기억을 뒤로하고, 이제는 타인의 부서진 삶을 수습하러 다니는 이브 엔슬러의 행보에 경이로움과 동시에 나는 왜인지 안쓰러움이 좀체 가시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 자궁암 3~4기를 지나온 그녀를 보며, 나는 자꾸 이제는 쉬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어졌다. 너무 오래 자기 몸보다 타인의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온 사람 같아서. “나는 암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내 몸 안에 살고 있지 않았으니까”(p. 192)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과거의 자신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뒤늦고도 간절한 위로는, 어쩌면 타인을 구원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의 몸 안으로 온전히 돌아오는 일이었을지도 모를 텐데...
그런데도 이브 엔슬러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자꾸 그런 생각을 했다. 저 사람은 왜 끝까지 남의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갈까. 어쩌면 그녀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끌어안는 그 치열한 여정 자체가, 어린 날의 상처를 마주하고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필사적인 몸짓이자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단 하나의 길이 아니었을지.
우리는 함께 숨을 들이마신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고. 그리고 우리는 그 숨에 소리를 보탠다. 다른 소리들이 따라온다. 하나씩 차례로, 한 명, 한 명. 이윽고 우리는 몸짓을 보탠다. 발을 구른다. 주먹으로 친다. 사납게 팔을 휘젓는다. 여자들은 이제 두 발로 서, 저 깊은 곳 아래 있는 슬픔을, 분노를, 공포를 끌어올려 포효한다. ( p. 162)
며칠 전 본 영화 <파라다이스 하이웨이>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감금당한 채 세상과 단절되어 지낸 꼬마 여자아이 레일라. 목숨을 건 위태로운 도주 중 잠시 머문 휴게소에서 레일라는 자기 또래의 남자아이를 만난다. 가족들과 트럭에서 북적거리며 지내는 그 아이는 레일라에게 참 해맑게도 자기 일상을 조잘거린다. 그런데 대화 도중 레일라의 표정이 묘해지는 순간이 있다. 소년은 ‘외로움’이라는 게 대체 어떤 느낌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사랑 속에서만 자라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다.
단 한 번도 혼자 있어 본 적 없다는 소년의 그 천진한 얼굴을 바라보며 레일라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평생 외로움과 공포가 공기처럼 당연했던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세계. 내게는 삶 자체였던 것이 누군가에게는 존재조차 모르는 생소한 감정이라는 사실이 레일라의 그 복잡한 표정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브 엔슬러의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를 읽으며 ‘타인의 아픔을 헤아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이 장면이 떠올랐다. 이브가 말하는 ‘슬픔을 껴안는 행위’는 어쩌면 이런 게 아닐까. 누군가에겐 숨 쉬듯 평범한 일상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야 겨우 닿을 수 있는 ‘파라다이스’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그 잔인한 간극을 끝내 외면하지 않는 것 말이다.
쏘지도 날지도 못하는 매미들에게
유일한 방어책은
수백만 마리가 일제히 함께 날아 오르는 것. (p. 243)
결국 중요한 건 타인의 고통이 내 삶 바깥의 이야기로만 남지 않게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외로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소년과, 외로움 말고는 세상을 배워본 적 없는 레일라. 그 둘 사이의 거리를 함부로 이해했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든 가늠해 보려 오래 시선을 두는 마음. 이브 엔슬러는 평생 그런 마음으로 타인의 고통 앞에 서 있으려 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글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