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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님의 서재
  • 우리 중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 샤를로트 델보
  • 22,500원 (10%1,250)
  • 2024-11-15
  • : 3,374
“이제, 나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

프랑스 극작가 ‘샤를로트 델보’는 나치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비시 정권 하에서 반독 저항 운동을 하다가 1942년에 남편과 함께 체포되어 1943년에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고, 1944년 초 라벤스브뤼크 수용소로 이감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45년 4월에 석방된다. 유명한 연극배우이자 감독인 ‘루이 주베’의 비서였고, 극단의 순회공연으로 남미에 체류하고 있었으나 비시 정권이 레지스탕스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문화예술계 친구들이 고초를 겪자, 주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파리로 돌아올 만큼 연대와 희생, 그리고 사랑의 가치를 알았던 그녀다. 이 책은 델보의 27개월간의 수용소 생활과 살아 돌아온 경험, 그리고 살아남은 동료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해야 했던, 아니, 해야만 했던 델보의 표현 방법은 때로는 시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총 3부로 되어 있는데, 마지막 3부는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또 다른 여성들의 말을 담고 있다.


책 가장자리를 독서대 고정핀으로 고정하니 종이가 매끈해서인지 고정핀이 톡톡 튕겨 나갔다. 확 펼치면 속지가 뜯어질 것만 같아 약간의 불만을 느끼며 읽기 시작했다. 그래도 입안에서 살살 굴려 가며 녹여 먹는 사탕은 맛있었다. 이 달콤함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입안에 침과 이따금 목을 축일 만큼의 커피도 충분했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했던 날도 있었고, 이대로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내 굶지는 않았다. 극심한 갈증에 더 이상 입안에서 침이 돌지 않아 미각을 잃었던 적조차 없다. 맛집에 늘어선 줄에서 대기를 하고 있어도 어르신과 아이들을 대동한 가족에게 자리 양보하는 것쯤이야 전혀 문제도 아니고, 추운 날씨에 든든하게 챙겨입었기 때문에 햇빛이 들어오는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누군가를 떠밀어서라도 차지하고픈 욕심 또한 없다. 볼일을 다 보고 나면 집으로 가면 된다. 집은 그런 곳이다. 집이라는 게 무엇인지 잊을 수가 없는 당연한 보금자리.

그런 내가 애당초 이 책을 읽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도 알 수가 없다. 살아 돌아온 여성들이 나와 같은 사람들을 향해 말한다. 자신들의 경험은 쓸모없는 지식일 뿐이라고. 그렇지만 그들은 말해야만 했다. 자신들의 귀환과 돌아오지 못한 여성들의 죽음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러니 말해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아침을 알리는 채찍 소리와 함께 저항 의지조차 잃은 여성들이 추위 속에 내던져졌고, 바닥을 평평하게 하려고 진흙을 떠 밖으로 던져야 했다. 다 같이 작업을 하던 중 카포 여자가 들이닥쳐 고함을 치고 동료들을 데려가 혼자 일하게 된 ‘나’는 홀로 남겨졌다는 절망에 두려움만 느꼈다. 혼자 있으니, 귀환을 믿을 수가 없다. 도랑에 홀로 남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불안에 떨고 있는데, 다른 작업장으로 옮겨진다. 팔 힘이 다 빠져 고통스럽고 아파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가 없다.

“오늘은 할 수가 없어.”

‘륄리’라는 여성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심히 다가와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너 안 보이게 내 뒤로 와. 이젠 울어도 돼.”

이 말이 필요했던 거다. 겁먹지 말라며 마른 나무줄기 같은 손으로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연약한 손목을 잡아주며 저마다 서로를 진정시키고 안심시키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조금 더 기운이 남아 있는 사람이 더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말이다. 필요에 의한, 목적이 있는 친절과 배려가 아니라 같이 살아남기 위해서. 화장터 굴뚝에서 밤낮으로 사람들이 타죽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연기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수용소 생활을 담은 1, 2부를 읽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서로를 이끌어주는 동지애였다. 아무도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도 서로 불안과 고통을 덜어주려 했다. 안심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수용소와 관련한 책 중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었을 때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목표’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준 것이 가장 크게 와닿았었는데, 이 여성들에게서도 마찬가지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침부터 처음으로 수프나 잡일, 빵에 대한 걱정을 잊게 한 순간이 이들에게 존재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들만의 연극 <상상병 환자>를 성공적으로 올리는 것. 이 목표가 그들을 잠깐 또 버티게 해준 것이다. 자신의 뜻에 따라 무언가를 한다는 그 사실이 의지가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었던 순간이 돼 주었던 걸까?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굉장한 힘이 아닐 수 없다. 아우슈비츠에서 말이다.

허영기 없는 배우들의 기적. 문득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되찾고, 상상을 되살리는 관객의 기적. 놀라웠다. 왜냐하면 그 두 시간 동안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인육의 연기가 그치지 않는 와중에도 우린 우리가 연기하는 세계를 더 믿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당시 우리가 유일하게 믿었던 자유, 이를 위해 앞으로 500일을 더 투쟁해야 했던 바로 그 자유를 향한 믿음보다 강했다. (p. 254)

구원을 믿을 수도, 바랄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서로 기대고 부축하면서 힘을 비축해 끝까지 살아남으려 했다. 어떻게 친절과 연민을 간직할 수 있었단 말인가. 나는 알 수가 없다. 수용소에서 돌아온 그녀가 호텔방에서 침대에 일어나 방문을 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식당으로 내려가 접시를 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모두가 서로 아는 사람인 듯 수다 떨며 웃음으로 가득 찬 그 공간 안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괴로운 일이며, 내 앞에 놓인 빵을 먹고 맛을 음미하기보다 얼른 다시 호텔방으로 올라가 혼자 울어버리고 싶다는 것을. 그러나 도저히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방이 몇 호실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 혼자서는 찾아서 올라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나의 성조차 기억이 나지 않아 아버지의 이름을 묻는 말에 머뭇거리는 것을 말이다. 모두가 지나간 일은 잊고 살아가 주길 바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무엇인지를. 그토록 원하던 귀환이 이토록 괴로울 수가 없는 그 무너지는 마음을 나는 알지 못한다.

행복이라는 것, 그건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일까? (p. 364)


델보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의지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고통과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위로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 아니다. 고민이라는 표현은 너무 가볍다. 그저 애도의 시간에 붙들려 똑같이 죽어 있는 사람으로 머물러 있듯이, 살다 보면 무어라고 할 수 없는 그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이 책에 추천의 글을 적어주신 목정원 작가님은 “타인의 몸에서 발생하는 허기를 권태를 절망을 간절히 바라봄으로써 함께 겪어 내 몸처럼 이해하는 일. 간절히 읽는다면 우리도 알게 될 테니”라며 서로를 격려하는 말을 담아주셨다. 때론 응시하며 연민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상대에게는 거북스럽고 오히려 상처를 입히는 행위가 되어버릴까 봐 어떤 식으로 위로의 마음을 전해야 하느냐는 생각에 머물러만 있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읽었던 슈테판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에서 와닿았던 말을 적어본다.

그토록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자신의 걱정을 이해하는, 아니, 적어도 이해해 주려 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당신이 이해해 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초조한 마음>, p.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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