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8
사자의 서재
난 널 몰라
대지의 마음  2011/09/09 10:11
  • 인정투쟁
  • 악셀 호네트
  • 20,700원 (10%1,150)
  • 2011-08-20
  • : 3,578

 살아가면서 갈등은 피할 수 없다. 

피하려 하면 비겁해지고 

삶을 적당히 살게 된다 

모든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만 보려하고 

배면을 보려하지 않는다. 

빨리 판단하려 하고, 갈등을 피해가려 하고, 순간을 모면하려고만 한다. 

나이가 들면 그 정도가 더 심해진다. 

.... '인정'은 이미 '이념상' 총체성으로 발전한 의식이 '다른 총체성, 즉 타인의 의식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인지적 단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타자 속에서 자신을 인식'한다는 경험을 통해 갈등이나 투쟁이 발생하는 것은, 개인들이 자신의 주관적 요구가 손상될 때에만 타자 역시 내 속에서 자신을 '총체성'으로 재인식하는 지 어떤지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p72 

 어제 나는 아이를 억눌렀다. 아이의 행동의 잘못만을 따지려 했고, 그 배후를 살피려 하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의 잘잘못만 따졌고, 아이의 격한 반응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내가 해야할 행동의 강도를 넘어서 버렸다. 

나는 불같이 화를 냈다. 

나는 어리석게 화를 냈고, 

아이의 자존감을 짓밟아 버렸다. 그리고 지금 아이는 내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나의 잘못과 내가 인정하지 못한 아이의 총체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헤겔이 일생 동안 몰두한 정치철학적 과제는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칸트의 이념에서 단순한 당위적 요청의 성격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p33 

고민한다. 아이는 무조건 자유로워야 하는가. 아이는 무조건 억압없이 자라야 하고, 

아이는 아무런 조건 없이 존중 받아야 하는 것인가 

나는 나를 반성하면서 또 아이를 살핀다. 나를 살필 거라면서 아이의 행동의 잘잘못을 따진다. 

헤겔이 일생 동안 몰두한 정치 철학적 과제가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칸트의 이념에서 단순한 당위적 요청의 성격을 제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막연하게 나와 아이의 갈등 상황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아이가 한 독립적 개체라고 했을 때, 아이의 자율성은 나에 의해 침해받아서는 안된다. 아이는 

하고싶은 대로 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 자율성의 테두리는 나라는 부모에게 틀지워져 있고, 

아이가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 아이는 내가 만든 경계를 함부로 넘어가서는 안된다 

그러니 아이는 그냥 자유로운 아무런 조건없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어른인 나는 아이의 자유로워야 할 권리를 빼앗아야 하는 것일까. 

내가 경계를 만들었다고 해서 아이가 무조건 그 경계 내부에서만 존재해야하고, 그 경계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는 틀지워진 경계 안에서만 있지 않다.  

나와 동등한 존재적 조건을 가지고 

세상에 있다. 한마디로 총체적으로 존재하는데, 내가 만든 경계를 함부로 행사해서는 안된다. 

여기에 '인정'의 미묘한 역학관계가 있다. 아이는 어리고 아직 나약해서 경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그 경계 안에서 보호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경계에 머물게 되면 나약한 채로 있고, 한 인간 존재가 치뤄야 할 세상과의 투쟁을 해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헤겔이 당시 지니고 있던 생각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를 실천적, 정치적으로 관철하려는 사회 내적 동력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을 상호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주체들의 투쟁에서 비롯한다는 것이었다. 33p 

헤겔의 변증법에서 '투쟁'이란 용어는 아주 중요하게 사용된다.  어른들은 자주 말했다. 세상에 쉽게 얻어지는 건 없다고. 어렵게 얻는 만큼 어렵게 지키는 것이라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투쟁'이란 용어가 지닌 부정적 어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신적 이상은 투쟁없는 삶이지만, 세상이 투쟁없는 삶을 쉽게 용인하지 않는다. 

 '정신사적으로 볼 때 근대 사회철학의 등장은 사회적 삶을 근본적으로 '자기보존'을 위한 투쟁관계로 규정하려는 계획에 따른 것이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의 정치 저술에서 주체들이란 자신의 이해를 둘러싼 지속적 경쟁 속에서 서로 대립하는 정치적 존재로 파악되고 있다. 35p 

'주체들이란 자신의 이해를 둘러싼 지속적 경쟁 속에서 서로 대립하는 정지적 존재'로 파악되고 있다.  

자칫 느낌이 좋은 소설과 영화는 부모와 자식간에는 ' 자신의 이해'나 '지속적 경쟁'의 상태를 제거해 버리는데 과연 그것이 옳은 지 의심스럽다.  

관계에도 긴장은 있다. 부모의 이해관계와 자식의 이해관계가 서로 집요하게 작용하지 못할 때 그 관계는 이미 어느 한쪽의 이해관계에 먹혀 버렸다. 대부분의 위대한 아들과 희생만하는 어머니의 관계에서 보이듯이. 그리고 위대한 아들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작품에서 어머니의 위대성을 들춘다. 하지만 그 위대성은 어머니의 하인됨의 위대성, 묵묵히 자신의 손발이 되어 주었던 그 기형성의 위대성은 아니었을까. 거기에 과연 정상적 인정의 자를 들이댈 수 있을까.  

부모 자식간에도 '자신의 이해를 둘러싼 지속적 경쟁'은 있고, 그로 인한 대립은 있다. 그 대립이 나쁜 것은 아니다. 

나쁘다고 판단할 필요도 없다.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호네트의 인정 개념을 너무 나이브하게 생활에 적용하는 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이 사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내면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두고 

상대를 바라보는 투쟁이라는 의미에서 

그 투쟁에 의해 생생하게 살아오는 타인의 의미에 의해서 역동적으로 살아난다. 

호네트가 들고 나온 인정 개념이 

하버마스와는 달리 인간의 상호주관적 관계가 담론에 참여하여 더 나은 논증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보편적 동의에 도달하는 언어적 관계로만 환원되지는 않는다. 사랑, 권리, 사회적 연대 등은 하버마스의 틀에 비해 광범위한 상호주관적 관계로 우리를 인도하여, 하버마스에게서는 차츰 사라져간 심리적 현상이나 전언어적 영역에 대한 접근 또한 가능하게 한다. 21p  옮긴이의 말 중 

 타인의 총체적 조건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총체적 조건을 살핀다. 면밀히 살피고 냉정하게 판단한다. 그 판단의 여하에 따라 타인과의 의사소통은 가능해질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버마스가 제시하는 담론의 장은 어쩌면 너무 이상적 지식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사소통에 의해 사회적인 문제가 다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호네트가 말하는 '좋은 삶'이 호네트가 드는 논거들에 의해 바야흐로 등장할 수 있을 지 의심스럽지만, '인정'이란 개념은 중요하다. 

'인정'의 복잡성은 주변에 널려 있다. 

노동자가 사측과 말을 하려 하지만, 사측은 모르는 척 입을 닫아 버린다. 

거기에 답은 없다.  

어제 아이에게 소리 지르는 순간 아이는 부모를 경멸하게 된다. 

거기에 정상적인 소통의 장은 만들어질 수 없다. 

뒤늦게 깨달은 부모가 아이로 하여금 말문을 열개 하려고 하지만 되지 않는다. 

그리고 부모는 끝내 아이를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또 다른 일상적 아침을 맞았다.  

태연하게 아침을 먹고, 학교로 간다. 태연하게 날씨는 흐리고, 아이의 우울한 마음 상태와 다르게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태양의 은총아래 그다지 어둡지 않다. 고딕식의 음침함은 어울리지 않는다. 

우울함을 과장할 필요가 없다 

또 다른 아침이 왔고 

공기의 흐름은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다 

이런 아침은 수없이 많은 아침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시간은 그 태연함으로 인간을 길들여 왔다. 

지금 버티면 

또 다른 시간은 온다. 

하지만 쉽게 오지는 않는다. 

부당하게 당한 사람이 따지러 가는 아침이다. 하지만 상대는 없다. 

할 말을 가슴에 품고 온 사람을 적당한 웃음으로 무시해 버린다 

그리고 

포즈를 취한다. 선함의 포즈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라는 포즈 

당한 사람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우울하다. 

억압하고 누르고 폭력을 가하는 사람의 일상은 멀쩡하고 너무 정상적이고 

온갖 명품과 기품으로 가득한 이는 화면을 향해 미소만 날린다 

자신을 존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미소 

자신을 닮으라는 미소 

상대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인정하고 존경하고 따라하라는 미소 

거기에 인정이란 개념이 끼여들 틈은 없다. 

만인의 만인을 향한 투쟁이 

정치적으로 변할 때 

억압하는 자는 자유롭다 

만인이 만인을 향해 칼을 휘두를 때 

우리는 전체주의적으로 아주 평균적으로 단순하게 변한다. 거기에 답은 없다. 

'인정'은 어렵다. 

부모가 자식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워서 

피눈물을 흘리는데 

하물며 다른 관계에서랴. 

직장 동료와의 관계에서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에서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에서 

그리고 대통령과 그 국민들의 관계에서 

'인정'의 의미는 중요하게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마음에 두고 바라볼 줄 모른다면 

말놀음의 희생양이 되기 쉽다.

좀 똑똑 해지길, 좀 이기적이길  일개 개인은 거대한 말에 줏대없이 휘둘릴 필요가 없다. 

특히나 그 사고의 지반이 약하다면 어떻게 해야할 지. 

사실 똑똑하게 이기적이어지기 위해 공부한다. 

집요하게 공부하고 그 날카로운 눈으로 인정을 받아내기 위해 

그러니 적당히 살다보면 인정을 받을 수 없다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이 무서운 이유는 거기에 있다. 

나이브하게 현실을 

똑똑하기 때문에 누구를 존경할 필요는 없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