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거기에서 당신이 얻은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옆에서 얻을 수는 없는 것이었나요?* - 빛나는 신들은 신을 명상한다. 메마른 강이 흐르는 그늘의 그물을 쓰고 사내는 대답하지 못했다. (중략) 모든 것을 버려본 적이 있는 정처 없는 자의 운명은 그렇게 상처입은 끝없는 길들을 오래도록 노래하며 가야한다. 비밀한 길들은 발자국을 간직하지 않는다. 사내의 발바닥에도 몇천분의 일 지도 같은 미세한 길들이 사방으로 팔방으로 나 있었다. 필시, 객사의 운명이려니 (하략)’ 함성호의 시 <카필라바스투의 동문> 중 일부다. 부다는 세상의 권세와 아름다운 부인을 버리고 오직 자기 가슴 속의 욕망만을 간직한 채 이 카필라바스투의 동문으로 출가한다.
* 함성호 시집 <聖 타즈마할>의 주(註) ‘이윽고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 카필라 성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부인 아유다라가 부다에게 던진 질문. 경전은 아무 대답이 없는 부다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은 내 옆에서의 깨달음. 출세간보다는 세속에서의 깨달음을 일깨우고 있다. 아마도 부다는 이 질문을 통하고서야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었을 터(함성호 <聖 타즈마할> p127)
아름다운 아내를 버리고 사랑하는 자식도 버리고 세상의 권세도 버리고 부귀와 영화도 버리고, 남들은 가지지 못해 안달인 것들, 남들 모두가 절절히 욕망하는 그 욕망들은 모두 선뜻 버렸으되, 남들은 아무도 가지길 원하지 않는 욕망,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욕망, 득도하고자 하는 그 한 욕망은 너무나 크고 간절해서 버리기는커녕 오히려 여기에 죽자살자 메달려 용맹정진 돌진약진 했으니.... 그렇다고 한다면 결국 부처는 욕망의 화신이 아닌가? 그가 버린 욕망들은 그가 품은 욕망에 비하면 한낮 티끌 같은 것들일 뿐이라, 어떤 이는 중을 만나면 중을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했으며, 또 다른 이는 사람들이 해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가 무엇이 유익한고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도다라고 했느니, 아아!!! 어쩔것이냐,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가슴을~♪’이 소절이 자동반사적으로 따라나오면 연식 반백년 이상 ㅋㅋㅋㅋ)
******* 여기서 잠깐!!! 불교리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어떤 한 인간이 어느날 문득 집을 나와서(작은 욕망들을 버림) 머리깍고 중이 되어 자기 자지를 자르고(나름 큰 욕망 중 하나를 버림) 지랄용천을 하며 용맹정진하는 이유는 바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인데(맞제?) 그 깨달음을 얻겠다는 것은 결국 부처가 되겠다는 이야기이고(맞나?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누가? 몰러!) 그리고 부처는 결국 신(神)이 아닌가? 이 말씀인데, 그렇다면 결론적으로다가 삼단논법상으로 한 인간이 깨달음을 얻겠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신이 되겠다는 이야기. 자잘한 것들은 모두 버려뿔고 엄청나게 큰 거 한 방 터뜨리겠다는 이야긴데 그 욕심이 실로 어마무시하다.
소설의 제목이 <싯다르타>여서 당연히 석가모니 부처님 이야기인줄로 알았는데 읽어보니 싯다르타가 그 싯다르타가 아니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부처님 고타마 싯다르타는 기원전 563년경 인도 북부의 작은 왕국 카필라(가비라)에서 왕세자로 태어났다. 훌륭한 아들은 낳은 어머니 마야부인은 출산 후 7일만에 죽었다. 고타마는 16세에 사촌과 혼인하여 아들 라울라를 낳았고 이른바 ‘사문유관’을 통해 인생의 생로병사에 대해 깊이 고민하다가 29세에 사랑하는 가족과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한다. 금욕수행과 참선정진 끝에 보리수 아래서 도를 깨닫는다. 아마도 35세 전후인 듯. 그후 45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교화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 숲에서 죽었다.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제행무상(諸行無常)하니 그대들은 중단없이 정진하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소설 속 싯다르타의 인정 여정은 조금 다르다. 싯다르타는 인도 최상위층인 브라만 계급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든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그 자신 빛나고 아름다운 청년이었으나 어느날 문득 친구 고타마와 함게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한다. 깨달은 자 고타마를 만나서 설법을 듣지만 결국 자신의 길을 가기로 하여 속세로 돌아오게 된다. 사색하는 것, 기다리는 것, 단식하는 것 이 3가지 기술 밖에 없었던 던 그는 고급창부 카말라를 만나 육체의 욕망 방중술을 익히고 상인 카와스와미에게 장사의 기술도 배우게 된다. 오랜 속세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강으로 가서 자살하려다가 문득 각성하고 그 강가에서 뱃사공의 조수가 되어 뱃사공으로 살아간다. 싯다르타는 결국 강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뱃사공을 찾아온 옛 친구 고빈다는 싯다르타에게서 부처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에게 큰 절을 올리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소설은 ‘인간의 내면을 깊이 파고드는 초월에 대한 의지’를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유려하고 서정시 같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먹고 실똥싸는 바람타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같기도 하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집구석을 뛰쳐나와 숲 속에서, 산 속에서, 토굴 속에서 수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속세에서 처자식 곁에서 생활에 부대끼면서 지지고 볶는 그 삶의 경험을 통해서 깨달음에 다가갈 수 있다는 이야기 같다. 바로 위의 함성호의 시 주석에 나오는 속세간의 깨달음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 이건 참고로,
헤세는 청소년기 자살 시도과 정신병원 입원, 그후 우울증 등으로 그 자신이 극심한 정신적 방황을 겪었고 그래서인지 특히 인간의 영적인 성장에 관심이 많았다. 인도에서 선교사 생활을 했으며 인도와 중국 철학에 몰두했던 아버지, 역시 선교사이며 인도학자였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인도의 종교와 정신세계를 배웠던 헤세는 평소 인도를 자신의 정신적 고향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1911년에 헤세는 ‘생명의 원천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인도 여행길에 오른다. 하지만 여행은 말레이 반도, 수마트라 정도만 겨우 돌아보고 인도는 구경도 하지 못한 채 끝난다. 그럼에도 <인도여행>이라고 제목으로 출판된 책에서 헤세는 ’난 그들을 일종의 동물같다고 여기지요, 우스꽝스런 염소나 예쁜 사슴 같다구요. 절대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인도인들은 모두 거지들이고 악마같은 존재‘, ’음란한 천민‘ 등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옥순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p114,115,123,124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