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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서재
첫 소설을 쓴 건 중1 때다. 분명 주술관계도 맞지 않는 문장으로 가득한 글이었을 거다. 한 문장씩 써나가면서 이게 말이 되는 문장인가 갸우뚱했던 기억이 난다.

소설의 주인공은 은아였고 백혈병으로 아픈 쌍둥이 동생은 민아였다. 허약한 민아에게만 관심을 갖는 부모님 때문에 은아는 외로웠다. 하루는 오랜만에 만난 아빠와 같이 꽃 박람회에 갔다. 아빠는 은아에게 바비인형도 사주었다. 바비인형을 들고 투명한 유리바닥 아래에 피어 있는 꽃들을 바라보면서 여자아이는 혼자 기뻐서 울었다.

이건 오롯이 내 얘기였다. 그래서 기억이 난다. 난 그 때 매우 외로웠고, 외롭다는 걸 누구에게 알리고 싶었던 거 같다. 아무리 동생이 많이 아파도 나도 똑같은 딸인데 나는 누구에게도 안중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백일장이었을까, 국어 수업시간이었을까 기억나지 않는 그 날에 내 얘기를 썼다. 담임선생님은 그 글을 읽고 ‘네가 가족을 많이 사랑하는 게 느껴지는구나’라고 했다. 그 말이 위안이 됐다.

어떤 소설이든 자세히 보면 모두 어느 정도 자전적이라는데, 내 첫 소설도 그랬다. 별 내용도 없었고 생각하기만 해도 쑥스럽기만 한 첫 소설이다. 그래도 그 때는 쑥스러운지도 몰랐다. 문장이 엉망인 것도, 선생님이 내 글을 읽을 거고 그게 내 이야기인 게 들통날지 모른다는 것도 그 때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글을 쓴다는 것, 그것도 나의 이야기를 글로 털어놓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이 돼버렸다. 머리가 자라고 다른 사람들의 글을 많이 읽으면서 지금 난 나를 질책만 하고 있다. 네가 말하고 싶어서 마음속 품고 있는 이야기는 ‘틀렸다’고.

사실 다른 사람은 내가 쓴 글에 대놓고 나쁜 말은 안 한다. 대학생 때 했던 논술쓰기 모임에서도 같은 처지끼리니까 서로에게 심한 말은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내 글에 난도질을 하던 건 나였다. 난 나도 모르게 넌 못 할 거야라고 나에게 매일 말해주고 있었다. 부조리한 부분을 비판하고 어떤 것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것. 그마저도 나는 나 때문에 포기했다.

결국 내가 택한 길은 내 생각을 표현하지 않는 일이었다. 내 원고는 다른 사람의 글과 왜 이건 답이고 이건 답이 될 수 없는지 상식으로 채워진다. 선배가 내 원고 옆에 달아놓은 몇백 개의 메모를 보다보면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래도 선배는 질책은 하지 않는다. 메모가 고치라는 대로 고치면 끝난다.

그러다 문득 내 다이어리를 펴보고 깨달았다. ˝넌 그거 하나도 제대로 못 써?˝라며 나를 힐난하는 내 글씨가 또다시 나를 옥죄고 있다는 것을. 나의 이야기를 쓰지 못하고, 잘못을 비판하지 못하는 부끄럼쟁이 나는 결국 내가 만들었다는 걸 그때서야 말이다.

쓴다는 건 고통일 수밖에 없다. 고통스러워서 쓰게 되고 쓰는 게 고통스럽기도 하다. 그게 철학 없는 단순한 문장의 조합일지라도 그렇다. 그런데 내가 나서서 거기에 고통을 가중하고 있었다니, 나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저 다짐해본다. 앞으로 내가 쓸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무엇을 쓰든, 회사에서 원고를 어떻게 쓰든 나에 대한 비난은 그만 하겠다고. 어렸을 적 거리낌 없이 마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풀어냈던 것처럼 다시 그렇게 해보고 싶다고. 이러한 다짐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는 없었다. 역시나 이 다짐을 적는 것도 부끄럽다.

그래서 아무도 나를 모르는 이곳에 토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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