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다. 그 존재를 둘러싼 세계는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빈번하게 대면하게 되는 친인척이고, 곧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마주하게 되는 낯선 타인들의 시선과 반응들을 내면화 하면서 하나의 존재자인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한다. 결국 타자의 반영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 존재의 숙명일 테다. 사랑과 칭찬을, 그리고 인정받기를 갈망하는 우리는 그래서 존재의 본질을 숨기고 호감어린 웃는 얼굴을 한다. 소설은 껍데기와 껍질, 탈과 캄캄한 심연을 한 조각가의 작품 기록을 따라가며 진실에 대한 물음이 가능한가를 묻는 것 같다.
이야기의 전체구성은 작가 H가 쓰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사이에 조각가 장운형이 자기객관화를 애쓰며 쓴 일기가 주요 서사를 이루고 있다. 소년 장은 어머니의 웃는 얼굴과 그녀의 내면의 진실은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하얀 탈바가지 같은 어머니의 얼굴”, 또한 대학에 장인의 도움을 받아 자리를 잡은 아버지는 외삼촌에게 “뱀 같은 새끼”로 불린다. 타인에겐 항시 웃는 얼굴을 한 소년의 부모, 뭇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이라고 불리지만, 소년은 착한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수 가 없다. 진실을 은폐한 탈바가지를 쓴 위선적 존재들.

소년 장에게 진실이란 의심과 적의와 서늘한 경멸이 깔린 누추한 것, 또한 살아생전 자신의 오른 손을 정교하고 치밀하고 자연스럽게 노출치 않았던 외삼촌의 동강 난 손가락이 죽음으로써 드러났을 때 보게 되는 무력하고 불쌍하며 추한 것임을 알게 된다. 장은 이후로 철저하게 자신의 안경 뒤로 자기를 가린다. 가리지 않으면 그들(타인)에게 버림받는 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정성과 지혜를 다해 자신의 탈(가면) 속에서 타인을 탐색하며 사랑과 칭찬을 갈구한다.
진실이란 이렇듯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기에 일어난 상황에 가장 잘 맞는 행동을 하고,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을 자신의 내부에서 처리해야 하는 것임을, 결국 진실이란 존재하든 존재치 않든 아무런 의미(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때문에 장은 의미라는 진실을 묻는 것은 소모적이고 무의미한 물음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성장한 장은 조각가가 되어 작품의 본을 뜰 모델을 물색한다. 그의 시선에 들어 온 소녀는 167센티미터, 적게 잡아도 100킬로그램은 되리라 여겨지는 L이다. 웃고 있는데도 마치 눈물에 번쩍거리고 있는 것 같은 두 눈을 지닌 소녀, 그녀의 체구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희고 섬세하고 순수한 손을 발견한다.
“손은 제 2의 얼굴이다. 손의 생김새와 동작을 관찰하면
그 사람이 얼굴 뒤로 감춘 것들의 일부를 느낄 수 있다.” -77쪽
외삼촌이 생전 철저하게 은폐했던 손, 진실을 감추고자 정치하게 감추었던 손, 얼굴이 제아무리 내면의 거울이라 하지만 그것은 탈처럼 기만적 조작을 해댄다. 그러나 손은 결코 그것을 감추지 않고서는 거짓을 말할 줄 모른다. 장은 소녀를 설득해 마침내 그녀의 손을 뜬다. 작업에서 장은 소녀의 근본적인 조심성 속에서 슬픔을 읽는다. 깊숙이 가라앉아 일상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고통의 흔적을. 장은 자신의 의식에 충격이 가해질 때마다 구역질을 느낀다. 장의 심연에 웅크린 상처들, 진실을 자극하기 때문이었을까?
“혀와 눈이 달린 얼굴과 달리 손은 정확한 말을 하지 않는다. 얼굴보다 위험하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얼굴보다 교묘한 탈이다. 말 할 필요가 없으므로 얼버무릴 필요도 없다. 침묵하면 그만이다. 정지해 있으면 그만이다.” -89쪽
속이 빈 조각 작품, 인체의 껍데기 속에 숨은 동굴 같은 심연, 결코 진실이 새어나오지 않는 껍질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 조각이란 해독할 수 없는 생의 비밀을 두 손으로 빚어냄으로써 껍데기를 꿰뚫어보려는 집요한 긴장에서 해방되기 위한 작업이다. 첫 개인전에 그는 무엇인가를 손아귀에 감춘 형상들, L의 손을 뜬 껍데기들을 전시한다. 보여주고자 하면서도 숨기려 하는 모순, 뻥 뚫린 손목의 입구로 들여다보이는 캄캄한 공동(空洞)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철저하게 본질이 제거된 공간, 차갑고 비인간적인 것.
장은 L의 거대한 몸, 육체의 껍데기를 뜨게 되면서, 서로의 몸을 갖게 된다. 이 과정에서 L은 자신이 거대한 몸을 가져야만 했던 이유인 계부가 어린 자신을 유린했던 고통의 기억을 술회한다. “그 새끼는 한 번두 내 옷을 벗긴 적이 없었어요,...팬티 벗기기만 바빴지...”, 입에 먹을 걸 물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쉴 새 없이 먹어대자 살이 찌기 시작했지만, 그 새낀 40킬로가 불어나서야 괴물 쳐다보듯 하더라고. L은 장을 떠난다.
선배 P로부터 장은 그의 작품 구입에 관심이 있다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E를 만나게 된다. 장은 E에게 받은 첫 인상을 “정갈함과 상냥함과 품위 속에, 누구든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는 듯한 냉기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어렴풋이, 그러나 단호하게 어려 있었다.”고 쓴다. E는 L의 손을 뜬 작품을 구입하기 원하지만 장은 망설이다 결국 두 점을 팔기로 한다. 그의 작품을 설치하기로 한 어느 유한자의 완성된 집을 E의 초대로 찾아가게 되고 장은 “샘플 같은 집”이란 인상을 받는다.
장은 E의 초대로 그녀의 집에서 함께하는 시간을 갖지만 “성장한 여자의 옷을 벗겨놓고 보니 열세 살 난 여자 아이였던 것 같은, 불쾌하고 씁쓸한 자의식이었다.”고 생경한 고통의 밤이었음을 쓴다. 안을 전혀 들여다 볼 수 없는 매끈매끈한 거울 같은 여자. 새것, 반들반들한 광택을 사랑하는 여자. “먼지와 흠, 흉터, 낡아간 흔적들...지긋지긋해. 새것은 달라. 깨끗하고 아름답지. 아직 제 쓰임새대로 쓰여 본 적 없는 물건들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껍데기 그 자체가 이미 훌륭한 것이라고 말하는 여자가 감추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누구도 만지지 않은 새 것 만을 욕망하는 것은 왜 인가.
E는 장이 만든 껍데기들이 지루하고 야비한 것이었음을 알아본다. 어쩌면 E가 장에게 건네는 “넌 정말 가련하구나...처음부터 알았어.”라는 말 속에 장의 작품들은 결코 벗겨낼 수 없는 껍질이 아닌 껍데기에 불과했던 것임을, 본질을 여전히 감춘 딱딱한 물건일 뿐인 것임을. 감추기 위해 모든 것을 만들어내고, 그 만들어냄 조차 감춰야 했음을. 그러나 우리들은 진짜를 보고 싶은 갈망을 멈출 수 없기도 하거니와, 더욱이 그 감추려는 열망의 민낯이 타인의 모습으로 인지되는 성장기의 존재에겐 삶이라는 세계에 대한 의혹 가득한 고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심연, 진실이 가라 앉아있는 그 어둠의 동굴은 그저 텅 빈 것일까? 그곳에서 아무런 대답도 건져낼 수 없는 것일까? 굳어가는 석고의 틀을 살갗에서 떼어낼 때, 그저 껍질이 벗겨지는 기분 같은, 다시 껍데기를 찾아 쓰고 싶은 드러난 심연 같은 존재란 죽음 같은 것이기만 한 걸까?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내 웃는 탈이 내면의 감정과 일치하는 존재이기를 바랄 뿐이다. 타인에게 상처가 되는 하얀 탈이 아니기를 노력할 뿐이어야 함 만을 안다. 적어도 나로 인해 던져 진 존재들이 상처 가득한 인간으로 의심과 의혹의 세계라는 적의로 세상을 보지 않기 만을 바란다. 선택 가능한 무한한 잠재성이 어느 편협한 선택의 장이 되지 않도록 모든 존재들에게 무한하게 열린 자유의 공간이 펼쳐진 세계가 되기를 희망한다. 불가능한 기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