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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식
  • 고요하고 단단하게, 채근담
  • 홍자성
  • 18,900원 (10%1,050)
  • 2025-08-25
  • : 1,900

나는 이 책 『채근담(菜根談)』에 대해 제법 오래된 편협한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소위 ‘처세(處世)’라는 단어에 대한 그릇된 개념으로 시작된 것인데, 욕망의 성취, 즉 성공이라는 신화에 이르기 위한 무분별하고 헛된 기교, 술책, 전략적 방법론과 같은 천박한 기술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 어설픈 앎의 교만이 가져온 무지의 소치였다. ‘풀뿌리를 씹는다’는 제목의 의미를 새겨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가히 어리석음이라 누군가 힐난하여도 할 말이 없다. 사람이 풀뿌리를 씹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못하겠는가. 극한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단단한 마음의 이야기임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이 책에는 원제목 채근담(菜根談) 앞에 ‘고요하고 단단하게’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어쩌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그러해야하는 마음의 형용이라 하겠다. 책은 명대 후기에 간행된 초기 간행본과 청대에 간행된 청간본으로 크게 나뉘는 모양이다. 이 책은 전자인 초기 간행본을 저본으로 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전(前)집과 후(後)집으로 시기를 달리하여 편찬되었으며, 대략 전집을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 세계를 거닐어야 하는 사람들, 즉 청장년을 위하여 쓰여진 섭세(涉世) 또는 처세(處世)라고 하며, 출세(出世), 즉 세상에서 빠져나오는 노년의 삶에 대한 글이 후집을 이룬다.

 

때문에 전집과 후집을 찬찬히 새기며 읽게 되면, 험난하고 모순 많은 세상, 혼돈과 생존경쟁의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전했던 말이 후집에서는 냉담과 평온의 언어로 새롭게 전해지고 있음을 살필 수 있게 된다. 세상사에 관여하여야만 하는 자와 세상에서 물러난 자의 시선에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조언일 것이다. 그렇다고 전집이 오직 치열한 세상살이에 대한 지혜만은 아니다. 그 삶 속에서도 반드시 요구되는 고요와 평온, 진실을 향한 도의는 모든 행간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채근담은 시중에 난무하는 상투적이고 뻔한 처세술 따위가 아니다. 세상을 헤쳐 나가고 세상에서 나오는, 그리고 비정하고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견뎌내고 살아가야 하는 가에 대한 내적(內的) 지혜라 할 것이다.

 

이러한 전집의 특성을 드러내는 한 예로 전집-191편에는 “好名者, 入於道義之中, 基害隱而深.”이라 하여, “명예욕이 그릇된 이익보다 더 은밀하고, 더 깊은 해악을 남긴다”고 명예추구의 마음에 은폐된 해악을 경계토록 한다. 이익을 좇는 마음은 외형으로 드러나 그 위험을 비교적 쉽게 인식하여 방어나 경계할 수 있지만, 명예의 욕망은 도의와 정의하는 외양 속에 교묘히 숨어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상 속을 거니는 사람들이 대면해야 하는 현실은 이같이 복잡다단하다. 주의하는 신중함을 알려주는 애정 어린 선배의 충언일 것이다.

 

반면 후집의 한 편인 후집-36편을 예로 들면, “山林是勝地, 一營戀便成市朝. 書畵是雅事, 一貪癡便成商買. 心有係戀, 落境成苦海矣.”, 즉 “산과 숲은 본디 빼어난 장소지만, 한 번 마음을 붙이면 시장터처럼 시끄러워진다. 서화는 고상한 일이지만, 욕심이 끼면 장삿속이 된다. 마음에 집착이 생기면 즐거운 경지도 고통의 바다로 바뀐다.“는 문장처럼 세상으로부터의 벗어남이 자연으로의 귀화와 같은 외재적 출세가 아니라 내적 마음에 있음을 말하듯, 전집과 후집의 지향하는 가르침은 그 결을 달리한다. 채근담이 고요와 적요, 자연을 말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벅적이는 세계에서 산림이 있는 자연으로의 도피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책의 미덕을 짚고 가야 할 것 같다. 시중에는 여러 번역 판본이 있다. 시인 조지훈 선생의 시정 넘치는 번역 판본이 있는가하면 충실한 현토와 진지한 번역문이 있는 판본도 있다. 그런데 이 책 최영환의 판본은 원문과 직역이 충실하게 있는가하면, 엮은이의 세심하고 오랜 새김의 마음이 묻어나는 충실한 설명의 글로 써진 해석(解釋)이 오늘의, 현 시대의 언어를 반영한 생생한 문장으로 간명하고도 쉽게 이해를 돕고 있다. 아마 마음에 착 감기는 문장들로 음미하고 체화하는 데 진정한 텍스트가 되어준다고 말해도 지나친 칭찬은 아닐 것이다.

 


요즘 세태를 보면 인간다움이 마치 멸시되듯 삭막한 세계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극단적 혐오와 증오의 표현들이 난무하고, 자신 이외의 인간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몽매한 오만이 들끓는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인간인 것일까라는 사람에 대한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전집-61편에는 단지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 삶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살아있는 것의 증거는 “남을 향한 따뜻한 한 마디와 작지만 선한 행동 속에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雖是在世百年, 恰似未生一日.” 비록 세상에 백년을 살아도 진정으로 산 것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자들이 과연 이 마음을 알까 모르겠다.

 

아무려나 나는 이미 출세의 길에 놓여있는 늙어가는 자이다. 해서 자연과 고독과 적요의 자리를 탐한다. 그리고는 이러한 환경을 그리워하며, 그 고요의 즐거움에 기꺼이 내 몸의 시간이 놓여 지기를 희구하지만 사실 그것이 그렇게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후집의 각 편들에는 유연, 균형을 말하는 문장들이 부쩍 많이 드러난다. 늙어가는 자들의 아집과 그 견고함이 극단으로 치우치는 까닭일 것이다. 시간이 켜켜이 쌓인 육신이 부드러움을 잃고 경직되기 일쑤이다. 해서 평정은 고사하고 오히려 곧잘 마음의 소란스러움에 부대끼기까지 한다. 집착을 깨뜨리기란 얼마나 어려우며, 나아가 자연과 하나 되는 그 고요한 자유란 얼마나 도달하기 어려운가. 후집-60편의 “知物我之兩忘” 사물과 나 그 둘 사이의 경계가 사라짐, 나를 벗어난 우주자연과의 일체를 꿈꾸는 죽음연습의 길쯤으로 알아두고 간다.

 

그렇다고 원저자 홍자성이 말하는 고요와 내려놓음의 철학이 세상과 등지라거나 체념과 포기인 것은 아니다. 역시 균형이요, 유연함이다. 움직임과 정적을 함께 받아들이는 평안의 마음, 마음의 자유에 대한 삶의 지혜이다. 눈앞의 풍경과 입에 담는 말이 곧 시(詩)임을, 진리는 평범한 삶 속에 깃들어 있음을, 있는 그대로의 삶 속에 진리가 있음을 언제쯤이나 깨닫게 될려나. 어쩌면 여전히 세계의 출구에서 미적대며 세계를 거니는 마음의 미련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무튼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휘리릭 읽어서야 그 참맛을 새길 도리가 없음에도 이렇게 몇 자 감상으로 남겨두고, 아주 천천히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으며 그 행간 속 의미를 알아가야 할 것 같다. “趣味要沖澹, 而不可偏枯, 操守要嚴明, 而不可激烈. (취미요충담, 이불가편고, 조수요엄명, 이불가격렬)전-82”, 이 균형의 감각을 우선 마음에 다져 넣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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