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은 레오 페루츠 작가의 달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이제 한 권(아니 두 권인가?) 더 읽으면 국내에 나온 페루츠 작가의 책은 다 읽게 된다.
<스웨덴 기사>로 출발한 나의 페루츠 읽기는 <심판의 날의 거장>을 거쳐 <9시에서 9시 사이>에 도달했다. 세 작품 모두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또 확실하게 다른 서사와 결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이 된다.
소설 <9시에서 9시 사이>의 문제적 주인공은 가난한 대학생 슈타니슬라우스 뎀바다. 역시 키워드는 뎀바의 가난이다. 그는 가난 때문에 자신이 애인이라고 생각했던 조냐 하르트만이 게오르크 바이너와 바람이 났다고 생각한다. 슈타니는 조냐가 바이너와 베네치아로 여행가는 걸 저지하기 위해 목돈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하룻밤 동안에 장기간 베네치아 여행을 위한 자금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대개의 경우, 이런 미션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배가 고픈 그는 가게에서 먹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어처구니없는 행동들을 하다가 가게 주인에게 도둑으로 몰리기도 한다. 공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두 손이 없다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농락한다. 슈타니의 서사를 따라가는 동안, 그가 충분한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훔친 책을 골동품상에게 넘기려다가 경찰에게 잡혀 두 손에 수갑을 찬 채 도주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니까 슈타니에게 수갑은 무언가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구할 수 없게 만드는 핸디캡이자, 그를 자꾸만 곤경에 빠뜨리는 하나의 장치인 셈이다.
수갑 찬 손을 내밀어서 돈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슈타니가 하는 시도마다 족족 실패한다. 우체부가 가져온 자신이 정당하게 번 우편환부터 시작해서, 어쩌면 그렇게 운수가 없는지 모르겠다. 빈의 마리아힐퍼 슈트라세를 비롯한 방방곳곳을 누비며 자신이야말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에서 가장 운이 없는 사나이라고 떠들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슈타니는 거들떠도 보지 않지만, 그런 그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슈테피라는 조력자가 있다.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가 떠나기 위해, 돈을 마련하다가 그야말로 은팔찌를 찬 셈인데 그런 남자의 은팔찌를 풀어 주겠다고 나섰다. 그녀의 시도는 참 좋았으나, 정말 운이 없는 사나이인 슈타니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돈이 주머니에 거의 들어올 것 같으면서도 또 마지막 순간에 손바닥 위의 모래처럼 스르르 사라지게 구성한 레오 페루츠 작가의 기법도 참 대단하다. 선의를 가지고 슈타니를 돕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도움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과외비를 가불 받으려고 화상을 입었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그집 바깥어른이 치료해 주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슈타니는 어쩔 수 없이 줄행랑을 치고 만다. 그는 참 운도 지지리도 없는 남자다.
가장 안타까운 장면 중의 하나는 슈타니가 30크로네 빚을 받으러 도박판에 있던 친구를 찾아가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그는 초심자의 놀라운 운빨로 무려 270크로네나 되는 판돈을 따게 되는 행운을 거머쥘 뻔했다. 도박판에 있던 이가 자신의 시계를 분실했다며, 예의 시계를 찾기 위해 같이 도박을 하던 사람들의 몸수색을 하겠다며 나서면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이 수갑을 찬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었던 슈타니는 결국 자신이 정당하게 딴 돈을 포기하고 그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기가 찰 노릇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슈타니에게 아주 운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엔딩은 예상대로 비극이었다. 이렇게 내내 운이 없다가 또 막판에 가서 인생한방 역전을 얻게 되는 설정도 어쩌면 그간의 서사에 대한 배신이라는 이유에서 처음부터 배제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1918년에 발표된 <9시에서 9시 사이>는 원래 프라하와 빈 그리고 베를린의 다양한 신문들에 연재되던 작품이었다. 당대에 이미 인기를 끌었고, 1922년에 MGM사에 영화화 판권이 팔렸지만 영화로 제작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책의 표지에 등장한 망토를 두른 슈타니슬라우스 뎀바의 이미지와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두 개의 수갑이 그가 처한 모든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웨덴 기사>처럼 이번에도 역시나 페루츠 작가는 소설의 첫 부분부터 주인공의 기이한 행적을 설명하는 결정적 단서를 심어 놓았다. 그랬었군, 왠지 작가의 스타일을 좀 더 알 수 있게 된 것 같다. 마지막 남은 책 <밤에 돌다리 밑에서>에서도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지 한 번 테스트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