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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er than day before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코맥 매카시
  • 15,300원 (10%850)
  • 2025-09-12
  • : 5,385


 

오래 전에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를 봤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무시무시한 킬러 안톤 시거가 산소탱크와 스턴건(혹은 캐틀건)을 들고 설치는 몇몇 장면만이 기억에 날 뿐. 그리고 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 책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공간적 배경은 텍사스의 어느 황무지. 베트남 전에서 저격수로 이름을 날린 용접공 36세의 루엘린 모스는 영양 사냥에 나섰다가 횡재를 하게 된다. 마약상들이 서로 총질을 한 끝에 모두 죽은 것이다. 아니 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외면하고 자그마치 240만 달러가 든 돈가방을 챙겼던가. 그런데 진짜 사건은 모스가 돈가방을 챙기면서부터 시작된다.

 

그전에 희대의 킬러 캐릭터로 선보인 안톤 시거는 자신을 체포한 부보안관을 죽이고 탈출에 성공한다. 시거는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닌 무법자다. 돈가방에 트랜스폰더라는 추적기를 단 덕분에 시거는 모스의 소재를 어렵지 않게 파악한다. 아마 누구나 주인이 없어 보이는 그렇게 큰돈을 얻는다면 모스와 같이 행동할 것이다. 나라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그 대가가 죽음이라면 또 다른 이야기가 아닐까.

 

베트남 전에서 한 시절 전사로 보낸 모스는 사신(死神) 같은 시거의 존재와 능력을 몰랐던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19살 난 신부 칼라 진을 엘 파소로 피신시키지만, 그녀 역시 모스와 함께 얽매인 운명일 따름이었다.

 

소설에서 자신의 감정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인물로 에드 탐 벨 보안관이 등장한다. 코엔 형제가 연출한 영화에서는 타미 리 존스가 벨 보안관 역을 맡았지. 모스가 한 세대 전의 전쟁을 대표하는 선수라면, 벨은 두 세대 전의 전쟁, 2차 세계대전 전쟁 영웅 출신의 보안관이다. 그동안 유능하고 충실하게 군민들의 안전 위해 봉사해온 벨 보안관은 막판에 자그마치 9건이나 되는 미제 살인 사건을 뒤로 하고 불명예퇴진을 하게 될 운명이다. 테렐 군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보안관을 무시하며 엽기적인 살인 행각을 저지르는 시거의 준동에 늙은 보안관은 어쩌면 예이츠의 시에 나오는 대로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르겠다.

 

소설에서 그가 독백처럼 건네는 말처럼, 그의 조부모들이 온갖 피어싱과 귀걸이 장식을 한 후손을 보았다면 과연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하다. 젊은 세대는 더 이상 나이든 세대의 경험과 지식을 존중하지 않게 되었다. 세대를 거듭하며 전수되어져온 지혜의 사슬은 인터넷을 뛰어넘은 모바일 시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꼰대들의 진부한 잔소리가 된 것이다. 어쩌면 코맥 매카시가 냉혹한 킬러가 날뛰는 이 소설을 통해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그게 아니었을까.

 

분열된 아메리카의 실상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도 극우 청년 활동가가 유타 밸리 대학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학생들과 대담 중에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그는 총기를 규제하라는 아우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정헌법 2조를 거론하면서 총기에 의한 죽음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자신이 그렇게 지지하던 총기 때문에 생명을 잃게 됐으니 이런 역설이 또 어디에 있을까.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도 모스와 시거는 너무 쉽게 총기를 구한다. 신분증이 없어도 충분한 돈만 있다면 누구라도 총기를 구할 수 있다는 걸 소설을 통해 나는 알 수가 있었다. 지금은 좀 다른 이야기겠지만, 여권은커녕 신분증 없이도 국경수비대가 지키는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설정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멕시코 의사에게 이글패스에서 시거에게 맞은 총상을 치료한 모스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국경을 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240만 달러라는 충분한 자금을 지닌 모스는 총기면 총기, 자동차면 자동차 그리고 잠시 머물 숙소에 이르기까지 구하지 못하는 게 없었다. 자본주의 천국 미국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참고로 모스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힐 신분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코맥 매카시의 서사에는 잡다한 상념들이 끼어들 틈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무미건조해 보이는 서사로 힘차게 이야기들을 이끌어간다. 산소탱크와 스턴건 그리고 산탄총으로 무장한 사신에 가까운 시거는 서사의 중심에 서 있다. 동네 보안관 따위는 우습게 여기고, 간발의 차이로 자신을 사로잡을 뻔하기도 하지만 그를 해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법 집행자에 대한 하나의 모욕이 아닌가. 그리고 이것은 평범한 시민들을 폭력의 위협으로부터 지키지 못하는 무력한 공권력에 대한 작가 나름의 힐난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도대체 아홉 건이나 되는 살인 사건이 발생했건만 군 보안관은 무얼 했단 말인가. 평상시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지만, 정작 비상 상황에서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뒷북만 신나게 치고 킬러 시거의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결국 소설은 끝나 버리고 만다.

 

무엇보다 소설이 개인적으로 권선징악 부류의 결말이 아니라 마음에 들었다. 그런 결말은 너무 전형적이고 식상하지 않은가. 거악을 형성한 악당들은 여전히 세상이 제 것인 양 법을 무시하고 만인에게만 평등한 법이라며 조롱하고 있지 않은가. 그 어느 때보다 분열되고 혐오가 넘실거리는 작금의 세태에 코맥 매카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만큼 들어맞는 소설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히 명작이라 부를 만하다. 충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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