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달 달궁모임까지 21일 남기고 폴 오스터의 마지막 소설 <바움가트너>를 이틀 만에 다 읽었다. 사실 지난 6월에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다가 10쪽 정도 읽고 나서 결국 읽지 못하고 반납했었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강의를 들으러 책방연두에 출동했다가 <바움가트너>를 빌려서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이틀만에 다 읽었네. 이런 걸 보면 책과의 시절인연이 존재하는가 보다.
소설 <바움가트너>의 주인공은 2018년 4월 현재 70세 노인이 된 시모어 티컴세 바움가트너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미스터 바움가트너가 사는 뉴저지의 프린스턴이다. 그리고 흙수저 출신의 바움가트너는 무려 프린스턴 대학교의 철학교수님이시다. 그는 10년 전에 사랑하는 아내 애나 블룸을 케이프코드에서 사고로 잃은 홀아비이기도 하다. 이런 점들이 주인공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는 필연적으로 상실에 따른 소외 그리고 외로움을 느끼는 중이다.
그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필요하지도 않은 책들을 온라인 주문하고 그 책들을 배달하는 UPS기사 몰리와 스몰토크를 즐기기도 한다. 주문해서 읽지 않은 책들은 공공기관에 기증한다나. 그렇다면 읽지도 않은 책들을 책방 가득 쌓아 두고서 항상 고민 중인 나와도 어떤 면에서 비슷하지 않나 하는 동질감이 형성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대학에서 메를로퐁티를 전공하고, 읽기의 현상학에 대한 연구와 강의를 했다고 했던가. 때마침 며칠 전에 들은 하이데거의 현상학 이야기를 책 읽기에 적용시켜 봐야 하는 생각에 염통이 조금 쫄깃해져 오는 그런 느낌이다. 배울 걸 바로 써먹을 수 있다는 건 어떤 점에서 하나의 즐거움이 아니던가. 타인(작가)이 직조한 이야기에 삶의 이미지를 투영하는 내적 지향성이야말로 현상학의 핵심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그 분야에 대해 전문가가 아니니 이 정도 적용만으로 충분하지 않나 싶다.
죽은 아내 애나에게 걸려온 전화에 대한 부분에서는 조금은 스릴러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것은 미스터 바움가트너의 환상 혹은 착각이 아니었을까. 번역가이자 편집자였던 아내 애나가 남긴 시들과 여러 글들에서 폴 오스터는 과거를 소환해낸다. 애나의 첫사랑이었던 프랭키 보일의 죽음에 대한 서사는 충격이었다. 어쩌면 애나의 죽음에 앞선 대과거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안치오 전투에 참전한 애국자 베테랑 프랭키의 아버지는, 아들이 베트남 전쟁 참전을 거부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게다가 당시는 아무런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반전운동이 격렬해지던 그런 시절이 아니었던가. 결국 프랭키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어 징병에 응했지만, 베트남의 정글도 밟아 보지 못하고 훈련소의 폭발 사고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폴 오스터 작가는 그런 식으로 말도 안되는 전쟁이었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우화적 진실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우크라이나에서 미국으로 이민온 유대계 재단사의 아들로 자란 바움가트너는 철이 들면서 자기가 나고 자란 뉴어크를 탈출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깨닫는다. 흙수저 청년은 자신이 원하는 학업을 마치기 위해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학업 성적을 유지해야 했고, 석사와 박사 과정까지 마치기 위해서는 허드렛일도 마다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와 달리 그가 사랑한 애나는 전혀 다른 삶의 경로를 걸어왔다.
우연한 만남은 바움가트너와 애나를 연결지어 주었다. 소위 말하는 사랑의 쌍곡선은 그렇게 완성되기 마련인가 보다.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부모로부터 독립을 원하던 애나는 작은 출판사의 신출내기 편집자/비서로 자신의 경력을 출발한다. 그리고 영혼의 단짝이라고 할 수 있는 바움가트너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던 어느 날, 강도를 당하고 나서 바움가트너와의 결혼에 골인한다.
바움가트너는 애나가 죽고 나서, 재능 넘치는 애나가 남긴 유고 가운데 시들을 발굴해서 시집을 발표한다. 이것은 마치 죽은 이들의 유작에 대해 애착을 보이는 미국 문학 소비자들에 대한 하나의 오마주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보니 <바움가트너> 역시 폴 오스터의 유작이 아니던가. 물론 로베르토 볼라뇨처럼 사후에 더 유명해진 작가라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나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시간 속에서 폴 오스터는 또다른 이야기들을 퍼올리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가족의 친구였던 영화평론가 주디스다. 서로 다른 점이라면, 바움가트너가 사별한 홀아비라면, 주디스는 결혼생활을 정리한 이혼녀다. 아, 그리고 바움가트너와 애나는 불임부부로 아이가 없다. 이것은 애나가 사고로 죽은 뒤, 노년으로 접어드는 바움가트너에게 그의 아버지 야코프(제이컵)와 달리 가족 부양의 의무를 제거하는 하나의 장치였다고나 할까.
우리의 홀아비 바움가트너는 주디스와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어한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상대방의 생각이 나와는 결이 다르다는 점이다. 오랜 고민 끝에, 주디스에게 청혼하기 위해 장미 꽃다발을 준비하고 그녀를 찾아가지만 그녀의 대답은 완곡한 거절이었다. 대신 일주일에 두 번 만나는 대신, 만남의 횟수를 늘이자고 하지만 그것은 공허한 제안일 뿐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주디스가 다른 대학의 영화학과 학과장 자리를 맡으면서 캘리포니아로 떠나면서 아주 깔끔하게 정리된다. 주디스와 바움가트너의 인연 역시 서로의 필요에 따른 시절인연이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냉정한 분석일까.
그 다음에는 우크라이나의 슈타니슬라프에서 시작된 바움가트너 집안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기억의 재조립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미션이 아닌가 싶다. 역사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할 수 없이 가업인 재단사 일을 해야 했던 아버지 야코프.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사라진 뒤 외삼촌에게 위탁되었다가 야코프의 가게에서 일하게 된 바움가트너의 어머니 루스 오스터 여사. 우크라이나 슈타니슬라프 방문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잔혹했던 나치 독일의 슈타니슬라프 유대인 학살극이라는 냉혹한 현실에 어안이 벙벙해지기도 한다. 아니 이 순간에 바로 여기서!
그리고 다시 2019년 현재로 돌아와 자신의 저서 <운전대의 신비>를 마무리 지으면서 당분간 모든 것이 멈추었노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옛 동료로부터 자신의 제자 베브(비어트릭스) 코언이 애나의 유고를 위해 바움가트너와 연락을 원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종신 교수직 은퇴를 고민하고, 바지 지퍼 닫기에 고민하던 바움가트너에게 무언가 새로운 삶의 기폭제가 될 하나의 전환점의 등장하는 순간이다. 아까 낮에 이 책을 읽으면서 연세가 지긋하신 할머니가 커다란 돋보기를 드시고, 글을 읽고 쓰시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시간에 연동된 우리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언가에 대한 어떤 노력이 필요하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베브 코언을 위해 자신의 집에 머물 장소를 마련해 주기 위해 첫 장에 등장했다가 사라진 실패한 마이너리거 투수 에드 파파도풀로스를 소환하는 폴 오스터. 그리고 보니 안톤 체홉은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이 각각의 임무를 지니고 있다고 했던가. 애써 등판한 선수를 한 번만 쓰고 그렇게 내버릴 수는 없었나 보다. 베브에게 심지어 자신의 차까지 제공하겠다는 바움가트너의 적극적 호의가 오히려 베브에게는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청년 학자 베브 코언과의 교류는 다시 한 번 미스터 바움가트너를 오래 전 애나와 서신교환하던 시절의 추억을 소환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아 구성이론에 빗대, 현대 기계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설교하는 장면 그리고 은근 슬쩍 MAGA에 대한 비판을 끼워 넣는 장면들은 과연 폴 오스터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무한한 불가해성 그리고 예측불허한 가능성은 소설의 마지막 순간에 변화구를 던진다. 그리고 작가가 소설에서 구사한 문장대로 “어떤 것이든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방식으로 멋진 작품의 항해를 마무리한다.
사는 순간, 왜 정말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하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반대로 덧없는 순간들에 대한 기억은 자세하고 끈질기게 다가온다. 폴 오스터 같은 소설가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사는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