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창 서가 정리 중이다. 왜 이렇게 사기만 하고 읽지 않은 책들이 많은 건지. 하긴 그전에 읽었다고 하더라도 또 시간이 지나면서 읽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책들이 있다. 그래서 기억을 위해서라도 리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으로부터 딱 25년 전에 나온 파스칼 키냐르의 <로마의 테라스>를 읽었다. 오래 전부터 내 책장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왜 지금까지 읽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바로 그 책을 읽을 시간이 아닌가하고 생각해 본다.
파스칼 키냐르에 반해서 한동안 그의 책들을 사 모으지 않았나 싶다. 아마 <로마의 테라스>도 그렇게 해서 사지 않았을까. 주인공은 1617년 파리에서 태어난 조프루아 몸므라는 에칭 판화가다. 유럽의 각지를 떠돌며 도제로 판화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사랑해서는 안될 여인 나니 베트 야콥스를 사랑한 죄로, 그녀의 약혼자 방라크르에게 질산 테러를 당해 흉측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이 그의 예술혼마저 빼앗아 가진 못했던 것 같다. 역설적으로 그런 고난이야말로 예술가에는 어떤 무언가를 창조해낼 수 있는 배경이 되지 않을까. 물론 그런 이들의 내적 갈등이나 스스로를 외부로부터 분리하려는 심정의 근원까지 도달하지는 못하는 그런 겉돌기식 이해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연적에 의해 얼굴이 망가진 몸므는 일탈을 경험하기도 하고, 그 이후에는 도주하는 삶을 살게 됐다. 그런 와중에서도 몸므는 판화가라는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불안정한 일상은 그로 하여금 더더욱 판화가라는 직업에 열중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나니에 대한 사랑과 미련은 몸므에게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게 된다. 어쩌면 이런 부분들은 소설적 클리셰이스러운 장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조플루아 몸므가 보다 뛰어난 예술가 혹은 장인이 되고 싶었다면, 이런 혹독한 시련을 뛰어 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그 또한 너무 지나치게 작동한다면, 작위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점에서 파스칼 키냐르 작가는 적당한 선에서 그리고 마리 에델이라는 또다른 몸므의 뮤즈를 등장시켜 타협한 게 아닌가 싶다.
소설의 클라이막스는 자신의 아들 방라크르의 칼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극적 사건이다. 그리스 비극의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이미 한 번 아버지 방라크르에게 데인 적이 있던 몸므는 이번에는 그의 자식으로 성장한 아들 방라크르에게 피습을 받아 황천길에 오를 뻔하는 위기를 맞는다.
그렇게 부유하던 이야기는 독자를 니힐리즘의 끝으로 인도한다. “언젠가 풍경이 나를 통과”하겠지라는 몸므의 독백 같은 문장은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에 대한 메타포로 읽힌다. 주인공 몸므 뿐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들의 필연적 운명이 아니던가.
짙은 허무의 안개 속에서 무언가 새로운 나만의 해석을 해보려는 시도 자체가 무슨 의미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독서는 파스칼 키냐르의 책 중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었지라는 정도로 마무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