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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의 서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개봉된다는 소식에 영화를 보기 전에 책을 재독했다. 8년 전쯤 『오뒷세이아』를 처음 읽을 때는 독서의 속도가 빠르진 못했다. 약 3000년 전의 고대 희랍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 지식이 필요했고 그것이 만만치 않아서였다. 신화와 거기에 얽힌 인물의 이야기가 워낙 복잡해 주석과 네이버 지식 백과를 참조해 읽어도 헷갈려 다시 돌아가기 일쑤였다. 그 때 이후로 호메로스의 작품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신화와 비극을 열심히 읽다보니 이제는 신과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와 암기가 된 상태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재독한 ’오뒷세이아‘는 훨씬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고대 희랍 원전의 번역자로 고 천병희 선생을 거론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 원전 번역이 선생 일생의 과업이었고 우리나라에서 선구자였다. 나도 천병희 선생의 2015년 숲 출판사 개정판으로 『오뒷세이아』를 읽었다. 이 책은 선생의 번역도 훌륭하지만 각 페이지 하단에 달린 각주와 부록(주요 인명, 신명, 지명, 가계도), 해설이 자세히 나와 있어 좋다. 해설은 호메로스와 고대 그리스 서사시에 대한 전반적 개념이 서술되어 있다. 책 한권으로 거의 모든 것이 해결될 정도다. ’오뒷세이아‘를 처음 읽는 독자라면 천병희의 책을 추천한다.

 

이번 재독에는 이준석 역의 ‘오뒷세이아’를 선택했다. 이준석의 번역도 정말 좋았다. 두 책 모두 걸리는 것 없이 잘 읽힌다. 천병희의 역이 서술적 흐름에 집중했다면 이준석의 역은 리듬감을 살리기 위해 단어에 집중한 느낌이다. 이준석은 원작의 단어를 그대로 선택했고 그 안에 있는 의미를 최대한 살렸다. 그래서인지 간결하고 정리된 느낌을 받았고 집중력 있게 읽을 수 있었다. 다만 번역자의 직역에 대한 의도가 너무 대쪽 같아 빈번하게 사용된 어떤 단어들은 상당히 거슬렸고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예를 들어 여기에는 ’심중(心中, 또는 深重(?))‘과 ’기백(氣魄)‘이란 단어가 많이 나온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심중은 ’마음 속, 마음에 품고 있는 것, 또는 생각이 깊고 침착하다‘로 기백은 ’씩씩하고 굳센 기상과 진취적인 정신‘으로 풀이되고 있다. 원작자인 호메로스가 심중과 기백에 해당하는 희랍어를 당연히 사용했겠지만 아무데서나 튀어나오는 이 심중과 기백이란 단어가 많이 낯설었다. 이 단어가 사용된 문장 몇 개만 가져와보자.

 

심중에서 견뎌내는 오뒷세우스의 창들(1권 129행)

기백에서 기쁨을 누리며(1권 311행)

훌륭한 판단과 간계까지 기백으로 궁리해가며(2권 117행)

당신들의 기백이 이를 분개한다면(2권 138행)

기백으로 근심하였다(2권 156행)

심중에서 이를 알아차리고 기백으로 경악하였으니(1권 322~323행)

.........

 

‘심중’이란 단어는 보통 사람에게 붙는 것이지만 오뒷세우스가 거지로 변장하고 고향 이타카 섬에 귀향했을 때 그를 알아보는 늙은 개 아르고스에게도 ‘심중에서 견뎌내는(p.427)’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심중과 기백에 대해 천병희는 이렇게 번역했다.

 

참을성 많은 오뒷세우스의 창들(1권 129행)

흐뭇한 마음으로(1권 311행)

교활한 재치와 책략을 마음속으로 생각한다면(2권 117행)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2권 138행)

마음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2권 156행)

마음속으로 이를 느끼고 깜짝 놀랐으니(1권 322행)

 

이준석은 심중과 기백의 뜻 차이로 두 단어를 철저히 분리시켰지만 천병희는 두 단어를 거의 하나의 의미로 해석한다. 그런 면에서 이준석의 번역이 더 직역에 가까우며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이 두 단어가 상당히 불편해 독서 초반에는 집중에 방해를 받았고 중간 분량을 넘어갔을 때에 겨우 적응할 수 있었다. 이 두 단어를 분리시키면서 한 번씩 다른 표현을 사용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아카넷 출판사의 ’오뒷세이아‘는 주석이 별로 없어 아쉽지만 삽화가 좋았고 거기에 덧붙인 이준석의 의미 있는 해석이 감동적이었다. 책 뒷부분의 해설도 줄거리의 흐름에 대한 설명이어서 이 서사시가 상징하는 의미와 행간을 이해하기 유익했다. 천병희의 해설이 숲을 보여준다면 이준석의 해설은 거기에 있는 나무를 설명해주어 두 책을 같이 참조한다면 더 깊이 읽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태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이준석의 책을 추천하며 새 번역서의 의미에 대해 감사해한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워낙 천병희가 이뤄놓은 세계가 크고 단단해 새롭게 똑같은 작품을 번역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쉽지 않았을 것이다.

 

추천사에서 천병희의 역이 독자들이 읽기 쉬운 의역이고 이준석의 역은 원작에 더 충실한 직역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한 문장을 예로 들며 두 번역을 비교한다. 이준석의 ’네 이빨 울타리를 빠져나온 그 말은 대체 무엇이냐.‘라는 직역을 천병희는 ’너는 무슨 말을 그리 함부로 하느냐?‘로 평이하게 옮겼다고 한다. 생소하고 낯설지만 ’네 이빨 울타리’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면 그것이 사람의 ’입‘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로 이태수는 이준석의 번역이 천병희의 번역보다 독자들이 훨씬 더 호메로스의 속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준석 번역자 역시 옮긴이의 말에서 호메로스가 쓴 표현을 왜곡 없이 고스란히 옮기고 싶었다고 한다. ’미세한 뉘앙스를 결정하는 조각 말(particle) 하나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다(p.655)'고도 했다. ’기백‘과 ’심중‘도 역자의 그런 의도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읽다 보면 심중과 기백의 차이가 확실하지 않고 둘 다 거의 ’마음‘의 의미로 혼용되어 이해된다. 그러므로 천병희 선생의 의역이 틀린 것은 아니다. 선생은 문장의 부자연스러움이 독자의 집중력을 해칠까봐 이태수가 비판한 ‘작가가 쓰지 않는 다른 말을 동원(p.7)' 했을 것이다.

 

역자 해설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하나 있었다. 이준석은 1-4권의 텔레마코스 이야기를 ‘저 세상을 향한 여행’으로 해석한다. ‘오뒷세이아’의 흐름과 관계없어 보이는 이 부분을 보통 텔레마코스의 교육과 성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역자는 ‘경계로 넘어가는 여행(p.607)‘으로 본다. 여러 문장을 인용하며 텔레마코스가 인간 세상 밖으로 여행하고 있으며 이것은 오뒷세우스의 여행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텔레마코스가 만나는 네스토르, 메넬라오스, 헬레네가 생을 넘어선 사람이고 그들이 사는 퓔로스와 스파르타도 ’저 세상‘에 속한다고 추정한다. ’오뒷세이아‘를 읽으며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사실을 역자는 조목조목 분석하고 있었다. 새롭고 환상적이었다.

 

이타카의 오뒷세우스의 집이 구혼자들에 의해 점령되고 곧 결혼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할 페넬로페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텔레마코스의 여행은 위태로워 보인다. 이 상황에서 잠시라도 텔레마코스가 집을 비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아버지를 찾아 나선 텔레마코스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구혼자들은 돌아오는 텔레마코스를 죽이려고 매복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텔레마코스의 결단이 없다면 일은 더 복잡해질 수도 있다. 이 시점에서 오뒷세우스의 생사를 확인해야만 하는 당위가 되는 것이다. 나는 텔레마코스의 여행을 이렇게 받아들여서인지 별로 어색하지 않았고, 오뒷세우스 귀향의 좋은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오뒷세이아』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오뒷세우스의 아들인 텔레마코스의 이야기(1-4권), 오뒷세우스의 방랑과 귀향(5-12권), 오뒷세우스의 구혼자에 대한 복수와 페넬로페와의 만남(13-24권)이다. 놀라운 사실은 여기에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것이다. 거의 모든 것이 신에 의해 계획되고 신의 도움으로만 인간은 정진하고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 예언자에 의해 앞날이 예고되고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온갖 유혹과 기본적 욕망마저 이겨내야 한다. 조금이라도 신의 분노를 사거나 예언의 실행이 부정되면 무수한 죽음과 고행, 슬픔과 탄식을 겪어야 한다.

 

그럼에도 ‘오뒷세우스’로 대표되는 인간의 정체성은 귀향을 포기하지 않는다. 시기, 질투로 금기의 영역을 침범해 고향이 눈에 보이는 곳에서 파멸하고, 하데스로 가 죽은 사람을 만나 예언을 듣고, 괴물과 거인을 맞닥뜨리고, ‘아무것도 아닌 자(있지도 않은 자)’라고 말했다가 ‘나는 오뒷세우스’라고 밝히며 도발했다가, 신으로 살아갈 기회마저 거절하는 한 인간은 극심한 고역을 치르지만 집으로 돌아간다. 몸을 묶어도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은 호기심, 죽은 동료들에 대한 애도, 신께 헤카톰베를 바치며 순종하지만 한편으로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 크세니아를 지키지 않은 자에 대한 복수 등 나약하지만 강한, 복잡하고도 다양한 감정을 가진 인간은 그렇게 필연적이다.

 

내가 읽은 다른 많은 책에서 오뒷세우스가 언급되고 있다. 보통 그는 고통을 당하는 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혜와 지략을 가진 사람, 영웅으로 소환된다. 나 역시 그런 인식으로 오뒷세우스를 받아들였고, 귀향의 과정이 궁금해 『오뒷세이아』를 읽었다. 처음 ‘오뒷세이아’를 읽었을 땐 많이 당황했었다. 그가 너무 인간적인 사람이었고 그저 신이나 예언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끝부분이 충격적이었다. 20년 만의 귀향을 끝으로 오뒷세우스에게 남은 생은 해피 엔딩일줄 알았건만 거기에서 그의 고행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납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어 그땐 그의 남은 고통이 그동안의 힘듦에 대한 정신적 트라우마 일거라고도 생각했다.

 

이 책을 재독하면서 다시 인식한 사실은 하데스를 찾아간 오뒷세우스에게 테이레시아스는 귀향 후의 고행과 필멸의 인간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죽음에 대해 이미 예언한다는 것이다. 결국 호메로스는 오뒷세우스를 전형적 ’한 인간‘으로 규정한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고통과 도전의 파도 속에 놓인 돛단배 하나에 불과하며, 그 흔들림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고귀한 것은 오뒷세우스가 귀향의 망각, 불멸의 삶에 대한 유혹을 극복하고 인간으로 남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으로 한 인간 오뒷세우스는 영웅이 된다.


-p.567, 제임스 파커, 에칭, 1805년

 

[그러자 그때 꾀 많은 오뒷세우스가 아내에게 말하였다.

“여보, 우리가 모든 투쟁의 끝에 다다른 건 결코 아니에요.

이후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혹독한 노역이 있을 것이고,

나는 또 그 모든 것을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답니다.

내가 전우들과 나 자신의 귀향을 찾아내러

하데스의 집으로 내려갔던 바로 그 날,

테이레시아스의 영혼이 내게 예언한 대로지요.

-23권 247~253행]


영화 ‘오디세이’는 좋았다. 러닝 타임 172분이 금방 지나갈 정도로 스펙타클했고 집중력 있게 볼 수 있었다. 책의 여러 장면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기대도 되었다. 시인 호메로스가 읊어주는 오뒷세우스의 여정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극적인 부분이 많다. 책을 읽으며 그것을 머릿속에서 그려보면 상상의 범위가 한없이 확장되며 요동친다. 영화는 웅장했지만 호메로스의 노래를 다 담기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책을 두 번이나 읽어서인지 그다지 재미있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오뒷세우스 역의 맷 데이먼의 연기는 너무 좋았다. 거기에 다른 배우가 절대 대체될 수 없을 정도로 멋지게 오뒷세우스의 역할을 해내었다. 페넬로페 역의 앤 해서웨이와 아테네 역의 젠데이아 콜먼도 괜찮았다. 이 영화에서 헬레네 역할로 흑인 배우 루피타 뇽오가 캐스팅 되어 논란이 많았는데, 감독의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시종일관 신은 어떤 모습으로 인간 앞에 나올지 모르니 언제나 모든 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제우스의 법‘이 등장한다. ’낯선 손님이 오면 주인은 정성껏 대접하고 잠자리를 내주고 떠날 때는 선물을 주는 관습인 ‘크세니아’를 철저히 지킨다. 이타카의 페넬로페의 구혼자들도 이 크세니아 때문에 아무 제지 없이 오뒷세우스의 재산을 약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손님의 태도도 존재한다. 겸손하며 예의 있게 행동하며 감사함을 표시해야 한다. 구혼자들은 테미스(themis,-관습, 관행 또는 법도,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바)에 대해 아테미스토스(arthemistos,-도리를 저버린, 사람의 탈을 쓰고 할 수 없는)의 태도를 행했기에 마땅히 응징 당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전작인 ‘오펜하이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대의와 도덕적 인간성의 충돌을 얘기한다. 영화에서 아주 극적인 장면으로 등장한 트로이의 목마는 오뒷세우스로 대표되는 인간 지혜의 절대성으로 등장한다. 예언자 카산드라 말고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은 트로이 사람들은 패배를 자초한다. 트로이 목마로 굳건히 닫혀있던 성문은 열린다. 10년 동안 기다리며 고생한 그리스 연합군은 그것으로 전쟁에 대한 승리의 기쁨만이 아닌 광기의 폭력으로 트로이 문명을 완전히 파괴한다. 오펜하이머처럼 도시의 파괴자인 오뒷세우스 역시 불타오르는 트로이를 보며 좌절하고 탄식한다. 호메로스가 한 인간을 노래하며 보편의 인간상을 보여주었다면, 놀란 감독 역시 한 인간을 노래하며 지금 우리가 당면한 현실을 보여준다.


가장 갈망하는 것은 가질 수 없는 것이고, 

가장 가질 수 없는 것은 이미 가졌다가 잃어버린 것이다.

 

뮤즈여, 노래하라. 한 얼굴을, 한 함대를,

트로이를 하루 만에 짓밟은 한 전쟁을,

한 생각을, 한 자락을, 한 인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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