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가 세 명인 우리 집에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다. 나머지 두 명은 나의 책읽기를 응원해 주는 편이다. 불편할건데도 두 사람은 내가 여기저기 흩어놓은 책에 별로 불만을 표시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책을 읽는지 별 관심이 없지만, 벽돌책을 읽고 있으면 슬며시 앞표지의 제목을 보기도 한다.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삼 개월째 읽고 있는 중이라 두 사람은 저절로 제목을 외우고 있다.
내가 딸아이에게 작정하고 잔소리를 좀 하려고 하면, “엄마, ‘특성 없는 남자‘, 읽어야지! 독서 동아리 얼마 안 남았잖아”하며 딸아이는 자리를 피한다. 어제는 갑자기 남편이 “특성 없는 남자가 누구야? 왜 특성이 없는데?”라고 물었다. 생각지도 않은, 갑자기 들어온 질문이라 살짝 당황했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이 되는 순간 얼마 전 어떤 분이 나에게 기습적으로 한 질문이 생각났다.
그날도 대화중간에 갑자기 질문을 받았다.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무엇이 가장 좋았어요?” 또는 “어떤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였을 것이다. 잠시 머뭇거리다 “음, 마들렌?”이라고 답했다. 내 대답에, 질문을 한 그 분은 순간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책을 열심히 읽는 사람이지만, 책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확신 있게 잘 대답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좋은 책을 추천해달라든가, 어떤 책이 좋으냐, 또는 그 책은 왜 좋은가에 대한 대답 말이다. 나에게 좋은 책이 다른 사람에겐 감동을 주지 않을 수도 있고, 더군다나 ‘잃시찾’이나 ‘특성 없는 남자’는 몇 번씩 읽어야 조금 이해되거나 기억에 남는 부분이 많아질 책이다. 한 책을 여러 번 읽으며 파고드는 것보다, 죽을 때까지 다 읽지 못하겠지만, 재미있고 좋은 새로운 책을 더 많이 읽기를 원하기에 매번 나의 책읽기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생각을 멈추고 남편을 바라본다. 이 사람은 내가 한 대답에 평가를 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이 책을 읽을 가능성도 거의 0%에 가깝다. 당연히 내가 틀리게 말해도 모를 것이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특성 없는 남자의 이름은 울리히야. 나이는 32세고 능력도 뛰어나고 잘 생겼어. 이 사람은 처음에 군사학교를 졸업해 장교가 되었지만 그만두고 공학을 공부하지만 또 그만두고 수학을 전공해 수학자가 되었어. 지금은 1년 정도 자신에게 인생의 휴가를 주고 있어. 울리히는 사람마다 소속되어 있는 집단이나, 사고, 개념이 가진 고정적 특성을 거부해. 이것들을 해체시키기를 원하지. 그래서 특성 없는 남자야. 현실보다는 가능성의 영역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매사에 이론적이야. 항상 뒤에서 앞에서 한 말을 뒤집고 있어. 울리히의 말은 언제나 모호해. 울리히는 좋게 말하면 자기식의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는 창의적이고 천재적인 인물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자기부정과 자가당착에 빠지기 쉬운 사람이야.”
남편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책의 번역자는 ‘특성은 현실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자질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울리히같은 ‘가능성인간’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고, 이런저런 현실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일어난 일을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가 실현된 것으로 여긴다(3권-p.605~606)’고 해석한다.
『로베르트 무질』의 저자 최성욱은 울리히는 현대인의 ‘비실체성’과 ‘불안정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항상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그에게 자아는 고정되고 확실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변화 가능한 것이다. 그에게 자아란 매우 잠정적이고 가변적이다. 이처럼 주체가 더 이상 고유한 ‘실체’가 아니라고 판명된다면, 이것과 연관된 불변의 특성도 더 이상 주체에게 부여할 수 없다. 무질에게 실체의 상실은 곧 ‘특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p.198
울리히의 정체성은 그만의 고유한 특성과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울리히의 특성은 이 상호작용의 결과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으며, 항상 전이과정에 있는데 그것은 외부 환경은 언제나 변하며, 이의 영향을 받는 울리히의 특성 역시 항상 변화과정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특성 없는 남자는 항상 전이과정에 있는 인간이다. 따라서 그에게 한 가지 고정된 특성을 부여함으로써 그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p.206]
작가 무질에 의해 ‘특성’이란 단어를 여러 가지 의미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인간은 ‘특성’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특성은 보통 주어진 것이고 울리히의 아버지로 대표되는 ‘특성 있는 남자’는 언제나 그 세계를 확고히 지키려고 한다. 특성은 변화될 수 있지만 그것이 시대와 세계의 흐름으로 인한 변화만이라면 사람들은 또 하나의 거대한 특성의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 울리히의 특성 없음은 변화를 받아들이되 지향점은 다른 곳으로 향한다. 그 지향점의 이해가 아직은 나에게 너무 어렵다.
사람을 만나다보면 지나치게 울리히가 정의한 ‘특성’을 많이 가진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가진 특성을 아무데서나 남발한다. 부담스럽다. 주어지고 선동된 특성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다. 특성 없는 남자 2부(비슷비슷한 일이 일어나다)에서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 중의 하나는 평행운동이 소요를 부르는 장면이었다. 요제프 황제 제위 70주년을 기념하고 ‘오스트리아의 찬란한 정신’을 도모하고자 한 애국대운동은 여러 반발에 부딪히고 각 특성을 가진 군중들은 시위에 참여한다.
시위현장에서 ‘각기 다른 의지를 가진 개인들은 한순간에 단일한 의지의 군중(2권, p.466)’으로 변한다. 평소에 절제와 신중함을 가진 사람이라도 군중이 되면 극단으로 밀고 가는 재주가 생긴다. 흥분하고 에너지를 방출한다. 보이지 않은 ‘특성’을 가진 이들이 조종하는 것에 저항 없이 동조한다. 보이지 않은 ‘특성’은 그들을 움직여 쉽게 자신들의 ‘특성’을 전파한다.
[그들은 군중 속에서 가장 내적 저항이 작은 점들이다. 그들이 직접 지르기보다 그들의 선동으로 더 많이 나오는 외침, 그들의 손에 들어간 돌멩이, 그들이 폭발시키는 감정, 이것들이 길을 열어준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단계로까지 서로의 흥분을 상승시킨 다른 사람들이 미친 듯이 그 길을 밀고 나아간다. 그들은 주위의 행위에 반은 강요로, 반은 해방으로 느껴지는 집단적 성격을 부여한다.
-2권, p. 466]
지하철에서나, 동네 공원, 산책길에서 이어폰 없이 유튜브를 큰 소리로 듣는 어르신들이 생각난다. 누군가의 선동과 지시로, 그것을 절체절명의 ‘특성’으로 받아들이는 군중 심리가 무섭다. 울리히의 ‘특성 없음’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