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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을 때 내가 자주 고민에 빠지는 이유가 하나 있다. 책이 써진 시대의 특성만을 고려해 읽을 것인가, 아니면 현대적 관점을 조금이라도 들이밀 것인가이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은 그것이 어느 시대의 것이든 그 의미가 보편적으로 이해되는 것이지만, 어쨌든 매번 같은 고민을 하게 된다.

 

셰익스피어 5대 희극에 들어가는, 1592년경 초연된 『말괄량이 길들이기(The Taming of the Shrew)』같은 작품이 내게 고민을 던져주는 대표적인 것이다. 번역가와 평론가는 이 작품이 역설적이며 극적인 반전과 풍자가 있다고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그러한 해석이 잘 납득되지 않는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본극 안에서 공연되는 극중극이다. 본극은 극중극보다 더 짧아 서극으로도 불린다. 영주는 술주정뱅이인 땜장이 ‘크리스토퍼 슬라이’를 가짜 영주로 만들어 슬라이를 골탕 먹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하인들을 내세워 그를 혼란에 빠뜨린다. 처음에 슬라이는 자신이 영주가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하지만, 모두가 슬라이를 영주라고 하며 받들어 모시기에 점점 자신이 영주라고 믿어버린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슬라이 앞에서 희극배우들이 공연하는 극이다.

 

파도바의 갑부인 뱁티스타에게는 두 딸이 있다. 맏딸인 말괄량이인 캐서리나와 얌전하고 여성스러운 둘째딸인 비앵카이다. 캐서리나가 왜 말괄량이가 되었는지는 독자들이 추측해야만 한다. 하여튼 말괄량이로 소문난 캐서리나에게는 구혼자가 없고, 둘째딸인 비앵카에만 구혼자가 몰린다. 뱁티스타는 둘째딸의 구혼자들에게 큰딸의 구혼자를 데려오지 않으면 절대 비앵카도 결혼시키지 않겠노라고 선언한다.

 

캐서리나는 불합리한 사회적 관습과 가부장제를 거부하는 여성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여성은 당연히 이해받지 못하고 고립된다. 그녀는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자신이 원하는 독자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살아가지 못한다. 그녀에게 자유는 주어지지 않는다. 캐서리나는 결혼을 한 몫 챙기는 것으로만 여기는 무례한 남자인 ‘페트루키오’를 거부하지 못한다. 아버지와 신랑간의 계약으로만 성립되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페트루키오가 캐서리나를 길들이는 방식은 유치하고 웃기게 보이지만 거기에는 끔찍하게 계산된 폭력이 있다. 캐서리나는 결혼을 거부하지만, 페트루키오는 강제적으로 밀어붙이며, 이상한 복장으로 결혼식에 늦게 와서 행패를 부린다. 잠을 재우지 않고,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며 마치 짐승을 길들이듯 변덕스럽게 캐서리나를 대한다. 사육사가 되어 아내를 잡는다. 캐서리나는 자신이 편안해지기 위해 페트루키오의 말을 듣는 척 한다. 페트루키오가 해를 달이라고 우기면 그냥 달이라고 인정해버린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듣는 척 하는 것일까? 길들여지고 가스라이팅 당하는 사람은 그런 척하기 쉽지 않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셰익스피어는 5막 2장의 캐서리나의 말을 통해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의 역설과 가부장제를 조롱하고 비판(옮긴이 해설)’할지 모르지만, 이 연극을 통해 아무생각 없이 웃어넘기는 그 당시의 관객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그저 페트루키오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았을지? 대다수는 캐서리나가 그에게 길들여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난생처음 도전하는 셰익스피어 5대 희극』은 5편의 셰익스피어 희극을 잘 설명해놓은 책이다. 각 작품마다 내용의 중요구절을 원문과 함께 인용해 극의 흐름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작품에 대한 평가와 거기에 담긴 의미, 인문학적 해석이 들어있다. 박용남 저자는 ‘말괄량이 길들이기’에 ‘셰익스피어시대의 가부장주의 문화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비판이 들어 있다(p.178)’고 말한다. 이 극은 눈에 보이는 대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 캐서리나의 행동은 약자인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지혜로운 현실적 대안일지도 모른다고 서술한다. 과연 그럴까? 여전히 난 이 작품에 대한 해석에 만족할 수 없다.

 

[그렇다면 카타리나는 정말로 말괄량이인가? 말괄량이란 일반적으로 말과 행동이 거칠고 여자답지 않은 여자를 의미한다. 하지만 셰익스피어 당시 영국에서는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고 잔소리가 심한 아내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말괄량이(shrew)’라는 단어는 ‘꾸짖다(scold)’와 동의어로 인식되었다. 한마디로 여성의 언어(잔소리)는 통제되고 교정되어야 할 죄악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여성은 남성의 말에 복종하고 잠잠하라는 의미다. 여성의 말 없는 조용함이 미덕으로 간주된 것도 그 이유다.…카타리나같이 가부장적인 사회규범에서 어긋나는 여성들은 ‘말괄량이’로 낙인직혔다. -p192~193’]

 

희극과 비극의 차이는 마지막에 죽음이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될 뿐이다. 희극 역시 극의 내용은 폭력적이며 사람을 기만하는 경우가 많다. 차라리 개인적 결함과 욕망, 운명으로 인해 죽음으로 귀결되는 비극이 훨씬 더 설득적일 수 있다. 풍자와 해학, 웃음으로 이루어진 희극적 내용에 더 지독한 인간의 애환과 씁쓸함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과 『한여름 밤의 꿈』에 등장하는 보텀은 희극적 해피엔딩 속에서도 지극히 비극적인 쓸쓸함으로 남아있는 인물이다.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슬라이 역시 마찬가지다. 신이나 기득권자에 의한 한 순간의 장난과 속임수에 불행해 질, 모두가 폭소를 터트릴 찰나에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질 인간의 단면을 희극은 여지없이 보여준다. 어쩌면 그것이 평범한 인간들의 삶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는 허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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