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복도식 아파트 11층에 살고 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거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으로 올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하늘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듯 하늘도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계절과 시간에 따라 색깔과 농도가 달라지며 구름과의 어울림도 각양각색이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 비 오기 전이나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 온통 먹구름으로 덮여있는 회색빛 하늘, 별과 달이 함께 있는 검푸른 하늘 모두 경이롭다.
늦여름에서 가을 사이, 해질 무렵 노을 진 하늘의 모습을 나는 가장 좋아한다. 매일 나타나는 노을의 모습은 수만 가지다. 클로드 모네가 매번 왜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가서 그림을 그렸는지 이해가 될 정도이다. 하늘과 노을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을 보고 있으면 심장이 벅차다. 그냥 쿵 내려앉는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 모든 걱정과 번뇌가 사라진다.
자주 생각한다. 작가란 내가 이렇게 본 세상 모든 것을 언어로 표현해주는 사람이 아닐까하고. 그저 ‘좋다’, ‘아름답다’, ‘멋지다’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언어를 창조하고 조합해 나의 감각과 느낌과 육체를 통합해주는 사람.
세 번째 읽은 한강의 『희랍어 시간』을 통해 내 생각이 더 확실해졌다. 처음에는 ‘사랑’으로 다가온 이 소설이 점점 언어와 문장으로 집중되어 갔다. 세상 모든 서사의 중심은 사건이 아닌 언어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 언어로 표현된다는 이 단순하고 기본적인 것이 모든 것의 시발점이었다. ‘한 작품을 마치면 이미 자신은 그 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는 한강 작가의 말처럼 언어는 작가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과 독자를 변화시킨다.
적절하게 표현되지 못한 말 대신 내 속에서 나온 헛되고 의미 없는 언어와 타인의 말들은 저절로 부풀어지고 딱딱한 덩어리가 되어 옹벽 속에 갇히게 한다. 기억과 감정, 심지어 내 몸 구석구석에 붙어 있어 나를 구속시킨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책을 읽는다. 작가는 그런 나의 옹벽을 조금이나마 깨부수어주는 사람이다. 그들이 쓴 문장으로, 나와 비슷한 경험의 에피소드로, 내가 사는 세계와 완전히 다른 곳의 사람들과의 공감으로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럴 수 있다는, 그렇게 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더 많이 그래야 한다는 것으로 작은 길을 열어준다.
[글을 쓰려면 시간을 사유해야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 먼저 나의 삶과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고, 필멸하는 인간의 짧디짧은 수명에 대해 생각해야 하고, 내가 지금까지 누구를 위해 글을 써왔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을. ‘언어’라는 나의 불충분하고 때로 불가능한 도구가, 결국은 그것을 읽을 누군가를 향해 열려 있는 통로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각해야 한다는 것을.
-p.340]
작년 한 해 동안 ‘오노레 드 발자크’의 소설을 읽었다. 발자크의 소설을 읽을수록 그가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한편으로 내가 생각하는 소설의 기능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었다. 발자크 소설이 시대를 대변하는 동시에 보편성으로까지 연결되지만 내 마음까지 움직여 주지는 못했다. 거대한 시대적 흐름에서 뒤처지거나 편승하지 못한 인간은 함몰되어 버리고 마는 적나라함을 너무 솔직히 보여줘 힘이 빠지기 일쑤였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으로 작가의 작품을 다시 하나씩 읽으면서 발자크로 인해 깨어진 소설적 감수성을 조금씩 회복하는 중이다. 한강 작가 역시 발자크와 같이 이 시대를 그대로 보여주는 작가이다. 어떨 땐 읽기가 너무 힘들다. 하지만 서술하는 방식과 결과가 다르다. 소재의 스펙트럼도 엄청 넓다.
『회복하는 인간』과 『파란 돌』은 똑같이 죽음이 있지만 사뭇 다른 느낌을 받았다. 슬픔의 강도가 『파란 돌』이 더 강했다. 그 사람이 잊히지 않아 다시는 행복할 수도, 웃을 수도 없을 것 같은 불행이 있었다. 오랜만에 소설을 읽고 마음이 아팠다. 슬프고 힘든 내용은 다 마음이 안 좋지만, 『파란 돌』은 나의 소설적 노스탤지어를 가져다주어 더 그런 것 같았다.

촉촉한 함박눈이 내리던 3월초에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강연’을 읽었다.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여름의 소년들에게’와 ‘출간 후에‘와 연결되었다. 맥이 같았다.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을 던지고 그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작가라는 숙명을 가진 사람의 고통이 보였다. 매번 그 질문의 모양과 내용은 다르지만 작가의 소설이 결국 ’사랑‘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 좋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이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내적 투쟁이 내 글쓰기를 밀고 온 동력이었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비와 구분이 잘 안 되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눈은 사람이 다니지 않은 모퉁이에 순식간에 두껍게 쌓여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눈을 좋아하고, 눈에 대한 표현을 기막히게 잘하는, 사주에 역마가 든 한강 작가(작가의 말)가 오랫동안 글을 많이 써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