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마지막 글에는 길찾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작가가 자신의 여행이 어리둥절의 연속이었다고 회고한다. 이 책 속의 글들도 어리둥절의 연속이다. 읽다 보면 어떤 글은 용감한 마흔 같기도 했고 어떤 글은 황당무계하고 허울 좋은 인생론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서 마흔도 어쩔 수 없구나 하고 깨닫게 되기도 했다. 여하튼 기숙사에 살고 연구실을 가진 삶은 멋지구나. 지난한 공부의 세월과 막막한 상처를 잘 이겨내고 자족하는 삶을 사시는 작가님의 쉰, 예순도 궁굼하다.
내가 생각하는 마흔이란 이런 것이다. 인생에서 기를 쓰고 지켜야 할 게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나이. 지키고 싶다고 다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나이. 결국 세상은 내 의도나 계획과 상관없이 흘러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나이. 그래서 모든 일이 경이로운 기적이고 감사할 일임을 알게 되는 나이. - P5
무엇보다 배움이란 자연스럽고 편안한 게 아니다. 이미 알고있던 것이 흔들리고,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자기 부정과 파괴의 경험이 배움의 핵심이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키고자 하는 힘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무너뜨리려는 힘 사이에서 고투하는 동안 자신의 세계가 넓어지고 깊어진다. - P34
마음을 주었던 사람이 떠나가면 슬퍼할 만큼 슬퍼하고, 나랑 별 상관없는 사람이 나를 싫어하면 잠깐 안타까워하면 된다. - P75
상실은 삶의 의미를 되묻게 한다. - P93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져버린 시간은 형벌과도 같았다. - P93
주말이 되어야 참았던 눈물을 마음 놓고 쏟아냈고 그러다 잠이 들었다. 깨어나 아직도 하루가 한참 남아 있으면 너무 막막한 기분에 또 울었고, 다시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날이 저물고 있으면 너무 허무해서 또 울었다.어떻게 그 시간을 지나왔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하든 어떻게 하지 않든 시간은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 P94
우울과 무기력을 견디는 일에도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살아서 뭐하나, 생각하면서도 살기 위해 나도 모르게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는 것도. - P95
그 시절의 나를 떠올려보면 마치 깊은 물 속에 가라앉은 통나무처럼 무기력하고 무감각하고 무거웠다. 그러다 물 위로 다시 떠 올랐을 때 나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이를테면, 사는데 무슨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사는 데 별 이유가 없더라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40대의 비혼 여성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 P97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시간을 견딘다고 해서 이해할 수 없던 일이 갑자기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될 뿐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만났고 사랑했고, 그는 떠났고 나는 남았다는 이 불가해한 사건을,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직선이고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것 같은 종류의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 이정도만 되어도 마음이 훨씬 편해진다. - P103
마흔 이후의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지나온 시간을, 그리고 과거의 나를 조금씩 잊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견딘다는 의식도 없이, 견뎌야 한다는 다짐도 없이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삶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이제는 알겠다. - P103
그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의 것이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랑을 이유로 누군가의 마음을 억지로 열려고 하는 일, 사랑을 이유로 내 마음과 같기를 요구하는 일이 상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이라는 것을 안다. 그 마음이 저절로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 열리지 않는다해도 억지로 열려고 하지 않는 것. 끝내 안 열려도 그냥 거기에 함께 있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우정이리라. - P224
김수영은 온몸으로 온몸을 밀며 나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온몸으로 온몸을 밀며 나가는 것, 그것이 산다는 일의 전부이며 그 자체가 사랑이라는 뜻으로 나는 이해한다. 사는 게 고단한 건 경사도 30%의 산길을 올라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희망이 안 보여도 걸음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 P236
대저 새끼를 기르는 것은 작은 생선 삶듯이 조심스럽게 해야 하며 교란시키는 것은 금물이다.- 이익, 『성호전집』 17 - P52
우리나라는 풍속이 허례허식을 숭상하고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금기하는 것이 너무 많다.- 박제가, 『북학의』 - P56
어느 누군들 잘못이 없겠느냐. 잘못이 있으면 이를 고치는 것, 그것이 바로 큰 선(善)이다.- 퇴계 이황, 아들 이준에게 보낸 편지 - P99
은근히 바라건대 너는 마침내 너그러운 성품을 갖추어따뜻하고 인정이 있으며 순수하고 굳센 마음으로성인과 더불어 살아가라.- 이문건, 『양아록』 - P183
분매와 금원황, 취양비는 그 정신을 찬찬히 살핀다. 왜철쭉과 영산홍은 멀리서 형세를 보아 웅장함을 취한다. 모란과 작약, 제수나무와 복사꽃은 새로 얻은 여인과 같다. 치자와 동백은 마치 큰 손님을 마주한 여인의 아리따운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다. 석류는 품은 뜻이 시원스럽다. 파초와 괴석은 뜨락의 명산으로 삼는다. 비쩍 마른 소나부는 태곳적의 모습을 얻었고, 풍죽(風竹)은 전국시대의 기상을 띠고 있다.- 유박 『화암수록』 「화암기」 - P205
기이하고 예스러운 것을 취하여 스승으로 삼고, 맑고 깨끗한 것을 취하여 벗으로 삼는다. 번다하고 화려한 것을 취하여 손님으로 삼는다.- 유박 『화암수록』 「화암기」 - P206
마음을 줬던, 머물렀던, 뒤돌아봤던, 고마웠던 사람들이여. 그리고 추억들이여. 모두 버리고 갈 수밖에 없는 나를 이해해주기를. 부디 다음 생이…… 있기를. - P73
하지만 그녀는 잊을 작정이었다.고통스러운 기억을 안고 여정에 오르면 앞으로 모든 발걸음에 기억의 핏자국이 남을 테고, 그것은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을 테니까. 걸음걸음이 아프고, 한없이 움츠러드는.또 그러다 보면 원래의 곧은 여정이 어느샌가 비틀어져 버릴지도 모르니까. - P91
지극히 특별한 눈동자가 아닐 수 없었다. 너무 특별하다 못해 어렴풋한 기시감이 들기까지 했다. 어디선가 질주해 온 이미지 한 토막이 기억의 틀에 ‘착‘ 하고 붙는 것 같았다. 들뜬 이음매 하나 남기지 않고 찰떡같이. - P381
앞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기어코 끝에 닿을 날이 분명 오리라. - P173
함께 있을 때면 항상 그랬다. 이유 없이 긴장이 풀어지고 영혼 깊숙이에서부터 시작해 자기 본연으로 돌아가는, 고요하고도 평안한 감각에 젖는 것이었다. - P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