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용감한 마흔이 되어간다 - 기숙사에 사는 비혼 교수의 자기 탐색 에세이
윤지영 지음 / 끌레마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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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지막 글에는 길찾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작가가 자신의 여행이 어리둥절의 연속이었다고 회고한다. 이 책 속의 글들도 어리둥절의 연속이다. 읽다 보면 어떤 글은 용감한 마흔 같기도 했고 어떤 글은 황당무계하고 허울 좋은 인생론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서 마흔도 어쩔 수 없구나 하고 깨닫게 되기도 했다. 여하튼 기숙사에 살고 연구실을 가진 삶은 멋지구나. 지난한 공부의 세월과 막막한 상처를 잘 이겨내고 자족하는 삶을 사시는 작가님의 쉰, 예순도 궁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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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마흔이란 이런 것이다. 인생에서 기를 쓰고 지켜야 할 게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나이. 지키고 싶다고 다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나이. 결국 세상은 내 의도나 계획과 상관없이 흘러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나이. 그래서 모든 일이 경이로운 기적이고 감사할 일임을 알게 되는 나이. - P5

무엇보다 배움이란 자연스럽고 편안한 게 아니다. 이미 알고있던 것이 흔들리고,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자기 부정과 파괴의 경험이 배움의 핵심이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키고자 하는 힘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무너뜨리려는 힘 사이에서 고투하는 동안 자신의 세계가 넓어지고 깊어진다. - P34

마음을 주었던 사람이 떠나가면 슬퍼할 만큼 슬퍼하고, 나랑 별 상관없는 사람이 나를 싫어하면 잠깐 안타까워하면 된다. - P75

상실은 삶의 의미를 되묻게 한다. - P93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져버린 시간은 형벌과도 같았다. - P93

주말이 되어야 참았던 눈물을 마음 놓고 쏟아냈고 그러다 잠이 들었다. 깨어나 아직도 하루가 한참 남아 있으면 너무 막막한 기분에 또 울었고, 다시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날이 저물고 있으면 너무 허무해서 또 울었다.
어떻게 그 시간을 지나왔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하든 어떻게 하지 않든 시간은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 P94

우울과 무기력을 견디는 일에도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살아서 뭐하나, 생각하면서도 살기 위해 나도 모르게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는 것도. - P95

그 시절의 나를 떠올려보면 마치 깊은 물 속에 가라앉은 통나무처럼 무기력하고 무감각하고 무거웠다. 그러다 물 위로 다시 떠 올랐을 때 나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이를테면, 사는데 무슨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사는 데 별 이유가 없더라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40대의 비혼 여성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 P97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시간을 견딘다고 해서 이해할 수 없던 일이 갑자기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될 뿐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만났고 사랑했고, 그는 떠났고 나는 남았다는 이 불가해한 사건을,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직선이고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것 같은 종류의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 이정도만 되어도 마음이 훨씬 편해진다. - P103

마흔 이후의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지나온 시간을, 그리고 과거의 나를 조금씩 잊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견딘다는 의식도 없이, 견뎌야 한다는 다짐도 없이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삶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이제는 알겠다. - P103

그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의 것이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랑을 이유로 누군가의 마음을 억지로 열려고 하는 일, 사랑을 이유로 내 마음과 같기를 요구하는 일이 상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이라는 것을 안다. 그 마음이 저절로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 열리지 않는다해도 억지로 열려고 하지 않는 것. 끝내 안 열려도 그냥 거기에 함께 있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우정이리라. - P224

김수영은 온몸으로 온몸을 밀며 나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온몸으로 온몸을 밀며 나가는 것, 그것이 산다는 일의 전부이며 그 자체가 사랑이라는 뜻으로 나는 이해한다. 사는 게 고단한 건 경사도 30%의 산길을 올라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희망이 안 보여도 걸음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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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새끼를 기르는 것은 작은 생선 삶듯이 조심스럽게 해야 하며 교란시키는 것은 금물이다.

- 이익, 『성호전집』 17 - P52

우리나라는 풍속이 허례허식을 숭상하고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금기하는 것이 너무 많다.

- 박제가, 『북학의』 - P56

어느 누군들 잘못이 없겠느냐. 잘못이 있으면 이를 고치는 것, 그것이 바로 큰 선(善)이다.

- 퇴계 이황, 아들 이준에게 보낸 편지 - P99

은근히 바라건대 너는 마침내 너그러운 성품을 갖추어
따뜻하고 인정이 있으며 순수하고 굳센 마음으로
성인과 더불어 살아가라.

- 이문건, 『양아록』 - P183

분매와 금원황, 취양비는 그 정신을 찬찬히 살핀다. 왜철쭉과 영산홍은 멀리서 형세를 보아 웅장함을 취한다. 모란과 작약, 제수나무와 복사꽃은 새로 얻은 여인과 같다. 치자와 동백은 마치 큰 손님을 마주한 여인의 아리따운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다. 석류는 품은 뜻이 시원스럽다. 파초와 괴석은 뜨락의 명산으로 삼는다. 비쩍 마른 소나부는 태곳적의 모습을 얻었고, 풍죽(風竹)은 전국시대의 기상을 띠고 있다.

- 유박 『화암수록』 「화암기」 - P205

기이하고 예스러운 것을 취하여 스승으로 삼고, 맑고 깨끗한 것을 취하여 벗으로 삼는다. 번다하고 화려한 것을 취하여 손님으로 삼는다.

- 유박 『화암수록』 「화암기」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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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줬던, 머물렀던, 뒤돌아봤던, 고마웠던 사람들이여. 그리고 추억들이여. 모두 버리고 갈 수밖에 없는 나를 이해해주기를. 부디 다음 생이…… 있기를. - P73

하지만 그녀는 잊을 작정이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안고 여정에 오르면 앞으로 모든 발걸음에 기억의 핏자국이 남을 테고, 그것은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을 테니까. 걸음걸음이 아프고, 한없이 움츠러드는.
또 그러다 보면 원래의 곧은 여정이 어느샌가 비틀어져 버릴지도 모르니까. - P91

지극히 특별한 눈동자가 아닐 수 없었다. 너무 특별하다 못해 어렴풋한 기시감이 들기까지 했다. 어디선가 질주해 온 이미지 한 토막이 기억의 틀에 ‘착‘ 하고 붙는 것 같았다. 들뜬 이음매 하나 남기지 않고 찰떡같이. -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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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기어코 끝에 닿을 날이 분명 오리라. - P173

함께 있을 때면 항상 그랬다. 이유 없이 긴장이 풀어지고 영혼 깊숙이에서부터 시작해 자기 본연으로 돌아가는, 고요하고도 평안한 감각에 젖는 것이었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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