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첫 책 ★★★★
#밑줄 긋기
"직접 ‘을의 공간’으로 내려와 손을 내미는 이들이 여전히 있다. 정말이지 많은 손님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의 운전석에 앉은 이들을 주체적으로 일으켜세운다. 그것은 따뜻한 말 한마디이거나, 반갑게 맞이하는 인사와 미소이고, 무엇보다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다. 담배를 피우기 전에, 음악을 틀기 전에, 전화 통화를 하기 전에, “죄송하지만 제가 무엇을 해도 괜찮을까요?”라고 묻는 이들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선생님의 차인걸요. 묻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라고 답한다. 그리고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꼭 덧붙인다. 그것은 그들이 나를 그 공간의 한 주체로서 존중한다는 의미다. 그 자체로 나는 ‘함께’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p37)
"호칭은 한 인간의 주체성을 대리하는 수단이 된다. 자신을 그 공간의 주체라고 믿게 만드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여러 구조적 문제들을 덮어버린다." (p53)
"운전을 하는 동안 ‘진상’을 만날 것이라는 걱정이 언제나 있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이다 보니 어떤 일이 일어날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다. 대리운전 기사들의 온라인 카페에는 진상손님을 만나 폭언을 들었다든지, 아니면 폭행을 당했다든지, 그러한 글들이 꾸준히 올라온다. (중략) 핸드폰 바탕화면에 녹음 단축 아이콘을 일부러 빼두었다. 운전을 하다가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것을 누르기 위해서다. 내가 나를 위해 준비한 유일한 보호 장치다." (p91)
"어쩌면 가족은 끊임없이 서로를 위한 ‘대리’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위해, 너는 나를 위해, 우리는 너를 위해, 그렇게 끊임없이 주체와 대리의 경계를 넘나든다. 나는 아직 모든 가족을 주체로 두는 방법을 모른다. 하지만 아내하고든 아이하고든, 조금은 더 많이 대화하려고 한다. 기꺼이 그들을 위한 대리의 삶을 살며, 그렇게 조금은 더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다." (p105)
"사회는 우리를 ‘대리인간’으로 만든다. 나아가 소중한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한다. 그러한 대리사회의 욕망은 결국 모두를 집어삼키고, 주체로서의 자리 역시 빼앗는다. 하지만 그러한 고난의 시간을 추억으로 남겨서는 안된다." (p138)
"노동자가 자신의 유니폼을 위해 돈을 지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노동자는 사용자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 그것이 내가 배운 ‘노동’의 관계다. 그 업장이 아니면 어디에서든 입을 수도 없는 유니폼을 구입하기 위해 돈을 지출하고 싶지 않다." (p172)
"노동의 관계도는 가장 간단하게 구성되어야 한다. 사용자와 노동자가 계약의 주체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용자는 그 중간에 ‘대리인’을 끼워 넣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주체로서 감당해야 할 여러 책임에서 벗어난다. 노동 현장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사용자는 자신이 고용한 이들이 아니기에 법적 책임이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장에서 노동자가 죽거나 다쳐도 이들이 지급하는 것은 ‘위로금’에 불과하다. 노동자에게 온전히 돌아가야 할 노동의 대가 역시 아웃소싱 업체를 거치고 그 일부만 남는다.
기업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노동자의 주체성을 농락한다. 자신을 대신해 내세울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안은 그들에게 언제나 가혹하다. 그런데 그것은 명백한 위법이나 합법도 아닌, 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방식으로 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법의 틈새를 이용한 ‘편법’이다. 인턴이라는 정체불명의 직함을 부여하고서는 무임금으로 사람을 부리고, 언제든지 해고하고, 기본적인 사회적 안전망조차 보장하지 않아도 기업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에 더해 국가/정부는 기업을 위한 법안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간다. 결국 노동자는 노동 현장의 주체가 아닌 대리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매장의/학교의 주인처럼 일하라’는 수사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이것은 정말이지 파렴치한 역설이다. 노동자의 주체성을 강탈하는 동시에 그 빈자리에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것이다. 그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자신을 주체로 믿는 대리가 된 노동자만이 존재한다. 어쩌면 ‘열정 착취’보다도 한 단계 진화한 방식이다. 노력뿐 아니라 행복과 만족까지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영혼 착취’라고 규정하고 싶다. 우리 시대의 노동은 ‘대리노동’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의 주체이면서. 또한 주체가 아니다. 대리운전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동네 마트에서도, 장례식장에서도, 그 어느 노동의 공간에서도, 우리는 노동자가 아닌 ‘대리인간’으로서만 존재한다. 지금 이 사회에서서 타인의 운전석보다 나은 공간이 얼마나 되는지..." (p174)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을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또 다른 을이다. 반드시 폭언이나 폭력을 수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전쟁의 수행자가 된다. 내 주변의 목소리를 외면하거나 그와 나 사이에 선을 긋는 것 역시, 갑의 욕망을 대리하는 행위인 것이다. 분노는 주변의 을이 아닌 저 너머의 갑을 향해야 하고, 공고하게 구축된 시스템에 닿아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을은 계속해서 동원되고 희생될 것이다." (p183)
"대리사회의 괴물은 여전히 개인들이 그 분노를 온전히 발산할 수 없게 만든다. 대신 대리만족의 기제를 계속 내보내면서, 행복하지 않은 개인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마취되고 나면 개인의 분노는 자신을 둘러싼 구조, 그 괴물에게 향하지 않는다. 대신 주변의 개인이나 스스로를 혐오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p213)
"막차가 끊긴 시간부터 첫차가 움직이기 전까지 ‘기계들의 밤’이 열린다. 그렇게 기계가 된 이들을 다시 사람으로 호출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기사와 손님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거기에는 사람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거기에는 사람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을 여전히 기계로 두는 이들이 있다. 그저 핸드폰에서 간단한 클릭 몇 번을 하는 것으로 자신이 해야 할 그 무엇을 타인에게 대리시키면서, 그 기계 너머에 사람이 있음을 잊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고로움을 상상하지 못한다. 쉽게 호출을 취소하기도 하고, 아니면 기계를 대하듯 타인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발화하기도 한다. 그렇게 간편함에 이끌려 사람을 상상하는 법을 잊게 되면, 그 역시 기계가 되어버린다. 타인의 처지에서 사유하거나 공감하지 못하고 “여기에 사람이 있어요”라는 누군가의 절망에도 무뎌지게 되는 것이다." (p236~237)
"결국 사람의 수고로움을 줄이고 효율을 높이는 것, 그래서 궁극적으로 사람을 편하게 하는 것이 기계다. 사람의 노동이 눈에 달 보이지 않게 되고, 우리가 노동자를 ‘요정’으로 상상하게 된 것은 기계 때문이다. 우리에게 선사한 편리함과는 별개로 기계는 사람의 노동을 은폐시키고 그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게 한다. 게다가 우리가 느끼는 편리함만큼 기계의 발전에 맞춰 노동환경이 개선되는 것도 아니다. 특히 기계를 위한 매뉴얼은 있어도 사람을 위한 매뉴얼은 없다. 기계만큼이나 복잡하고 치밀한 법과 제도만이 노동자를 옭아맨다. 합리와 효율이라는 허상은 쉽게 보이고, 그 너머의 사람이 어떠한 처지에 놓이는가는 잘 보이지 않는다." (p242)
"도시는 언제나 그 공간이 품은 사람만큼의 폐기물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쓰레기와 배설물은 하루가 지나면 어디론가 모두 흔적없이 사라지고, 우리는 거기에 익숙하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시공간으로 밀려난 노동이 있다. (중략) 어느 대학/회사에서는 청소 노동자가 일반 복도를 걸어 다니지 못한다. 그들을 위한 쉼터도 마련되지 않아서 화장실 청소도구실에 숨어서 밥을 먹는다. 살펴보면,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우리를 위한 요정이 있다. 그들을 노동자가 아닌 요정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신체를 지워버리는 것은 결국 우리다." (p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