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철 시인의 유고시집 『꽃이 지고 난 그날에』은 오른쪽에 필사를 할 수 있도록 비워둔 공간이 참 좋았다. 그냥 빈 페이지 같지만, 그곳이 있기에 시 한 편 한 편을 읽고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손으로 직접 적으며, 시와 나 사이에 느껴지는 묘한 울림이 더 깊어졌다. 시들이 대체로 어렵지 않고 자연스러워서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고, 그중 몇몇 구절은 한참을 머물게 했다. 잔잔하면서도 어느 순간 가슴에 스며드는 그런 시들이 많았다. 시인의 언어는 현실의 고통을 담고 있지만, 그 안에 숨겨진 맑고 순수한 마음이 느껴져서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故 임병철 시인은 어쩐지 현실과 환상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느꼈을 아픔과 외로움이 투명한 언어로 아름답게 빛나, 읽는 동안 슬프면서도 마음 한켠이 환해지는 경험이었다. 삶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질 때, 이 시집을 다시 꺼내 들면 조용한 위로를 받게 될 것 같다. 시인의 짧았던 생이 남긴 말들이 이렇게 오래도록 내 마음을 움직일 줄은 몰랐다. 가끔은 화려한 문장보다 짧지만 깊이 있는 말이 더 마음에 와닿을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