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問 라이브러리 2
도정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한국의 위기, 위기의 한국: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생각(혹은 비판)할 준비되셨습니까?

  나는 이 책을 2008년 9월 8일 발행 초판으로 서점에 직접 찾아가 6800원 정가를 주고 샀다. 그리고 한 원고를 다 읽었을 쯤 우연한 계기로 사인을 받은 뒤 다시 읽지 못한 채 책꽂이 구석에 꽂아두었다. 그렇게, 이 책에 사인 받은 지 벌써 횟수로 2년이 지났다. 읽는다고 마음 갖은 지도 횟수로 2년이 지났다. 하지만 읽으려고 할 때마다 급한 일이 생겼고, 무엇보다 제목의 압박이 책과의 거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을 터.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성숙해지고, 지천명(地天命)의 나이가 되지 않았어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넓어지고 깊어지는 법이다.(물론 지천명의 나이가 넘어도 세상을 편협하게 보는 게 요즘 시대의 인간이다) 나는 문(問)라이브러리에 맞는 질문할 시선을 어느 정도 갖추게 됐고, 이제야 이 책을 완독해 이렇게 글을 쓴다.

 아아, 다른 독자들은 걱정하지 마시라.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있고 쉬운 책이니 일찍 읽으면 읽을수록 좋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1.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개그콘서트의 박성광은 관객과 시청자 앞에서 외친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그렇다. 세상은 1등만을 기억한다. 왜냐고? 한국은 1등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기 때문이다. 우리는 1등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며 환호한다. 그리고 한편으론 생각한다. “와, 1등은 인기도 얻고 돈도 얻는구나”라고. 2등 외 나머지는? 당연히 찬밥이다. 우리는 이 개그대사에 폭소한다. 그것은 마음 한편에서 나타나는 씁쓸함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한 집단의 1위가 아닌 이상 평범한 우리를 기억해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1등을 부러워하고 동경한다. 아니, 우리라는 말보다 한국이라는 말이 어울리겠다. 한국은 “1등=부자=권력자”라는 등식을 당연시하고 계층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욕망하도록 한다. 그리고 시장전체주의 마천루에 올라섰을 때 인간에게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줄 듯 유혹한다. 하지만 이것이 옳은 사회의 모습일까? 작가 도정일 선생에 의하면 답은 "NO"다.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다. 끝없는 자본 경쟁 속에서 사회는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그리고 그 사회는 인간에게 짭짤한 자본을 선물한다. 자본주의에 대해서 조금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자본주의는 애덤 스미스가 처음 주장할 때만 해도 하나의 국가 안에서만 경제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실행했다. 하지만 가축하는 양이 많아지면 울타리는 좁아지고 풀은 모자라듯, 국가는 성장할수록 자본의 순환이 한정되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국가를 넘은 수요로 나아가고 조금 더 값싼 공급을 위해 제국주의를 택했다. 그들은 문명이라는 이름하에 식민지를 통치하여 자원을 수탈하고 수요를 늘리면서 그들은 성장했다. 하지만 제국주의는 지구라는 울타리 때문에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은 항복, 반성, 변화 등의 방식으로 다음 시대로 넘어갔다.(탈식민화) 그렇게 해서 지금의 21세기가 왔다. 그런데 시대는 변했지만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어두운 면은 ‘문화’와 ‘세계화’라는 또 다른 이름의 가면을 쓰고 한국에 들어왔다. 그들은 돈 안 되는 전통이란 것을 밟고 올라 돈 되는 세계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도정일 선생의 언급한 그대로, 우리나라는 돈 되는 축제만이 남길지도 모른다.

  다시 언급하지만, 이 책에 쓴 글은 21세기가 도래하기 마지막 날들에 작성한 기록물이다. 그리고 이 글들이 지금에 와서는 단순한 책이 아닌 예언서에 가까운 내용을 가졌다. 도정일 선생은 누구보다 한국의 문제점에 대해 냉철하게 파악하고 질문을 던졌던 사람이다. 자본만 쫒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비판하고 국가, 문화, 교육, 인문학까지 아울러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시장전체주의와 문명’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장전체주의가 팽배해진 한국의 인간은 자본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자본으로서 가치 없는 것이라면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자본을 무시할 만큼 한국사회는 관대하지 않는다. 책 안에 말 그대로, 자본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이 책은 자본만을 쫒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말자고 충고한다. 자본에 집착할수록 욕망은 커지고, 커진 욕망은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그가 말한 세상의 진리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혹시 지금하고 있는 일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선택이 아니라 어수선한 사회에서 안정적이고 돈을 많이 주는 일을 택한 것은 아닌가.


  2. 직업도 권력이다: “니 아버지 뭐하시노!?” =니 아버지 돈 잘버시노!? 

  영화 <친구>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의 볼을 잡고 때리기 전에 말하던 대사다. 그 장면에서 장동건이 “저희 아버지는 국회의원(혹은 검사, 군인, 경찰, 의사 등의 화이트칼라)입니다”라고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선생님은 그에게 가정교육․환경을 들먹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조용히 볼을 놓고, 나중엔 어깨를 털어주며, “그러게 왜 그랬어, 다음부터 조심해”라고 끝났을지도 모른다.(특정 직업에 대해 욕하고자 쓴 의도는 아닙니다) 그렇게 직업을 통한 권력에 모두가 기죽고 동경한다.

  이와 관련해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덧붙이겠다. 그저께 할머니의 제사에 다녀왔다. 큰집에는 친인척이 모여 북적거렸다. 그런데 제사를 마치고 식사를 할 때쯤, 셋째 큰아버지가 나에게 말을 건넨다. “요즘 무슨 일하냐?” 나는 특별히 어떤 대답을 드리지 못했다. 나는 지금 하는 일이 없다. 그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공부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큰아버지의 말이 이어진다. “얼른 정신 차려라. 돈도 안 되는 짓 하지 말고.”(참고로 셋째 큰아버지의 아들은 소위 명문대 중에 명문대를 진학하였으며 지금은 휴학하고 공익생활을 하는 말랐지만 근육도 있는 멋진 동생다. 공익 중에서도 쉬운 일로 배치 됐을 때 친인척에게 어찌나 자랑하시던지.) 물론 큰아버지는 나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한 것이다. 앞으로 나는 돈을 사용할 일이 많을 것이고, 앞날을 위해서 준비해두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대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특별한 직업을 갖고 있지 않지만 어떤 사람에게 해를 준적도 없고, 공부는 잘하지만 길에서 만난 친척한테 인사 안하는 사촌동생처럼 행동한 적도 없다.  

 

  자본의 우선시 되는 논리는 열심히 일한 아르바이트생보다 빚을 지면서 카지노에서 잭팟을 터트린 실업자를 칭찬하는 것과 같다. “돈 잘 벌면 됐지”라는 말처럼 무서운 게 또 있을까. 잘못된 행동이라 해도 자본이 많으면 장땡인 사회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후자의 상황을 노력이 없다며 비판한다.(정작 자신이 로또가 됐다면 큰 소리 내는 것이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카지노의 잭팟을 터트렸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어떠한 비판도 하지 못한다. 그저 “있는 놈이 더 한다”는 식의 푸념만 내뱉을 뿐. 화려한 직업은 자본을 갖는 것을 인정하고 비판을 방어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어 모든 것을 당연시 여기는 노예로 전락하고자한다. 결국 우리는 직업이라는 권력에 얽매이고 자본이라는 욕망에 얽매여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로봇과 다를 것이 없어진다. 나아가 자본을 등에 업은 권력은 부패하기 쉽다. 매일 뉴스에서 비리 공직자가 적발되고 대기업 회장이 비리에 연루되는 모습을 보면, 한국이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신경 쓰지 않고 무시하고  있었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한다. 썩을 대로 썩은 고름은 짜내야 하는 게 세상의 이치다. 이제 우리의 사회는 직업으로 하나의 권력을 만들려는 행동에 대해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지금의 우리는 어떤 일을 하시는가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일을 하시는가에 집중해야한다.

 

  3. 합격의 신으로 변장한 시장의 신: 국가는 기업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회가 이렇게까지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그 이유에 ‘국가’라는 커다란 체제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군부정치가 끝을 맺으면 민주정치의 밝은 햇볕이 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들어온 빛은 인공적으로 생성되는 전짓불이었다. “세계화”, “변해야 산다”라는 식의 외침은 ‘시장화’를 가속화시키는 현상을 초래했다. 예전보다 더 많은 것을 욕망했고 나라의 기둥들이 흔들리며 경제는 갈수록 심각해졌다. 최근에는 ‘국가경쟁력’을 외치며 희망을 심어주지만 작가가 언급한대로 이 용어는 현재 상황과 맞지 않는다. 경쟁은 어떠한 사람을 밀어내고 더 높은 위치에 서는 양육강식의 논리다. 물론 기업이야 무능력한 사원을 해고하고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국가는 국민을 해고하거나 버리지 못한다. 모두를 안고 (그들이 그토록 외치는)세계시장에 도전해야만 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외치는 경제는 ‘국가=기업’이라는 CEO 사고에 맞는 것으로 한 나라의 대표로서 자처해야할 것은 아니라는 게 작가의 말이다. 진정으로 국가경쟁력을 외칠 것이라면, 국가기관을 시장원리에 따르지 않으면서 지금의 사회가 부익부 빈익빈으로 치닫는 상황에 대처하는, 더불어 경쟁만이 살길이라는 식의 강요를 해서도 안 된다.

  시장전체주의는 교육문제에서도 문제를 들어낸다. 최근에 방영한 <공부의 신>이라는 드라마에서 변호사역은 맡은 김수로는 이렇게 외친다. “일류 대학 보내면 학교도 살고 애들도 잘되는 것 아닙니까?” 이 말에 지금의 사회가 고스란히 베여있다고 해도 다름없을 것이다. 대학교 진학이 좋을수록 우수한 학교로 채택되고 사람들이 몰린다. 우리 학교가 대학 입시의 올바른 길 인양 현수막을 붙이고 홍보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이 올바른 학생을 만드는 길이기까지 할까? 그것은 생각해볼 문제이다. 요즘의 사회에서 바라볼 때 학교는 학원가기 전에 쉬는 곳, 혹은 일류 대학을 위한 통로. 대학교는 일류 취업을 위한 통로 그 이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인성과 성실성을 길러야할 학교에서 오직 돈과 점수라는 수치 가능한 계산에 얽매인다는 것은 큰 문제이다. 교육기관은 어떤 것에도 얽매여선 안 된다. 작가가 걱정하는 만큼, 기초학문은 돈이 안 되므로 없앤다는 것은 기초 없이 응용부터 하겠다는 무책임한 발상과 같다. 게다가 이 문제에 대해 묵과하고 있는 교수진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그들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진정으로 자신의 학문을 사랑하는가. 인문학의 종말은 비판의 종말의 다른 말이다. 이젠 지금까지 그랬듯 계몽시켜주겠다고 말하는 위선을 단순히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비판하며 진보해야한다는 생각하는 것이 이 시대의 위기를 헤쳐 나가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라는 거대한 체제에서부터 사람이라는 작은 개인까지 같이 출발해야만 가능하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일본의 유명 지식인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조영일 역, 도서출판b, 2006년)을 통해 한국문학의 종언을 고했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문학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무엇인가에 대해 종언을 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넓게 보면 인문학이고, 더 넓게 보면 한국사회이다. 
 

  과도기에는 병자가 나타나는 법. 허무주의에 빠지고 자살 등의 극단적인 탈출구를 선택하는 자가 속출하고 있다. 게다가 돈 없고 빽 없으면 생존하기 힘들다고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희망 없는 삶의 명을 부여잡고 있을 수는 없는 법. 한국사회에서 생존할 것이라면 우리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힘을 내야한다. 물론 시장의 신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은 위기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어떠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그저 10년이 지난 이 원고들을 책으로 내놓은 것은 한국사회가 어떤 것을 중요시해야 옳은 것인지 알고 성찰하길 바랄 뿐이다. 다만 작가가 운영하는 ‘책 읽는 사회문화재단’과 같은 사회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필자는 조심스레 언급해본다.

  더불어 사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저 어려운 것이 돕고 같이 나누면 가능하면 된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보자. 우리는 왜 사는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하는가? 그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정으로 우리가 행복한 길은 무엇인가? 
 

 

문화의 몰락을 방지하는 일은 비판력이 살아 있는 건강한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비판적 사회, 그것은 시민사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자본이 사회적 비판세력을 혐오하고 비판력을 마비시키기 위한 타락한 방식의 전략을 채택하는 이유는 거기 있다. 앞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현 발전 단계가 시민 사회의 성숙을 적극 저해하는 요소를 갖고 있다고 말했는데, 비판력과 비판세력을 마비시키기 위한 자본의 이해관계는 바로 그런 저해 요소들의 하나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비판적이고 이성적인 시민사회의 성숙을 도모해야 한다는 절실한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다. - <문명의 야만성과 세계화 비전> 중에서

입시경쟁에 하루 24시간 내몰리고 자나 깨나 ‘성적’ 걱정을 해햐 하는 아이들의 정신적 고통도 보통 문제가 아니다. 아직 영글지 않은 어린 영혼들이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우울증을 앓고 자살 충동으로 내몰린다. 그런데 어째서 한국인은 이 집단적 고통을 거부하지 못하는가? 사회는 어째서 이 고통을 강 건너 원두막 불 보듯 하는가? 정부는 또 어째서 막심한 국민 고통과 막대한 자원 낭비를 뻔히 눈으로 보고 매일 확인하면서도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는가? 한국은 참 이상한 나라다 - <경쟁력, 수월성, 창의성의 비극> 중에서

 

 요약  

 

  한국은 ‘세계화’라는 이름하에 시장전체주의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지나가는 누구를 잡고 물어보든지 자본과 권력의 유혹에 뿌리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당연히 나라도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자본과 권력이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는가. 당신의 행복이 자본과 권력에서 나온다면 당신은 이미 시장의 신에게 세뇌당한 것이다. 우리는 자본 없이는 살 수 없는 동물이다. 하지만 자본만 있어서는 살 수 없는 동물이다. 세상에 대해 한 번 더 의심하고, 진정으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행복이 무엇인가.

  좋은 일만 있길 바라는 자들이 인간이다. 나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좋은 일만 있길 바라되 욕심을 버려야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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