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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초등학교 때 잠시 미술학원을 다녔다. 당시에는 스스로 제법 잘 그린다고 생각해서 학원에 있던 석고상 머리를 그럴듯하게 소묘하고는 친구들에게 우쭐대기도 했다. 하루는 마음먹고 사절지에 정성을 다해 놀이공원 같은 것을 그리고 있는데 한 녀석이 옆에 와서 내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뭔가에 열중할 때 누군가 옆에서 알짱대는 게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라 뭘 보느냐고 물었더니, 왜 사람들 손이 죄다 손가락 없이 둥그렇냐고 어디 싸우러 가냐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그 점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터라 멍해져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지만 그 일로 어린 마음에 대단히 자존심이 상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친구의 관찰력이 퍽 대단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 어린 나이에 남이 그린 사람 손에 집중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둥근 손을 보고 싸우러 간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미술학원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법은 알려주었지만 그림을 보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학교 수업에서도 대체로 그랬다. 나의 경우, 서양화를 배울 때는 인상파며 낭만파며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는 어떤 의미가 있으며 피카소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며 배웠지만 엄밀히 말해 그림을 감상하는 법을 배우지는 않았다. 동양화를 배울 때는 삼묵법이 어떻고 발묵법이 어떻고 김홍도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고 정선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 지 배웠지만 김홍도가 그린 그림 한 점 감상할 줄 몰랐다.
그런 점에서,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은 그 구성이 대단히 바람직하다. 책은 저자의 강연을 속기한 것을 정리한 것이라 조금은 두서없을지언정 더욱 자연스럽다. 책은 첫 장에서 우리 옛 그림을 감상하는 법을 알려주고, 그 이후에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의도를 짐작하는 법을 알려주며 마지막 장에서는 그림에 담긴 역사적, 시대적 의미를 파악하게 해준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예술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아서,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언어를 공유해야 하듯 감상을 하기에 앞서 그에 알맞은 감상 방법을 알아야 한다. 작품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작품이 중요하다는 정보만 얻는 것은 분명 올바른 접근 방법이 아니다.
저자는 한국화를 감상하는 기본 원칙으로 첫째, 옛사람의 눈으로 볼 것, 둘째, 작품을 왼쪽부터가 아닌 오른쪽부터 훑어내려 감상할 것, 셋째, 천천히 감상할 것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이 셋을 관통하는 개념은 ‘공감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예술 감상 그 자체이며 그 과정이 즐겁다는 것을 삽화와 함께 직접 예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그림을 해석하는 과정에 제법 자의적인 느낌도 지울 수 없지만 화가의 숨은 의도를 추측하는 것도 작품 감상의 또 다른 묘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예술가를 넘어 자연스럽게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 나아가 조선의 역사와 문화까지 엿보는 과정은 꽤나 신통하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에 저자 스스로 ‘예술에 국경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의 국경이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높다.’고 이야기했듯, 중국에는 중국만의 예술이 있고 일본에는 일본만의 예술이 있다. 그것은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다. 그런데 책의 몇 군데에서 한국의 예술을 예찬하며 중국과 일본의 예술을 폄하하는 태도를 볼 수 있었다. 한국의 예술에서 자부심을 찾는 것은 좋지만 그 우수성을 다른 나라의 예술과 비교하는 데서 찾는다면 이는 도리어 한국 예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 될 수 있으므로 그런 태도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침략했던 프랑스 해군 장교 주베는 이 약하고 초라한 나라 조선의 다 허물어가는 가난한 초가집에도 몇 권의 책은 반드시 있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한다고 했다. 조선은 분명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이후 순탄치 않은 역사를 겪으면서 많은 문화재적 손실을 입어 잠시 그 정체성이 희미해졌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예술을 이해하고 나아가 우리의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이 책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한 나라의 문화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나라 국민들이 그 문화의 가치를 알고 보존하려고 노력할 때 진정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