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 까치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따스한 바람이 부는 봄날에는 홀로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인적이 뜸한 곳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일상생활 속에서 벗어나 지금껏 억눌러 왔던 고민과 아픔을 풀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너무나 바쁘게 생활하다 잊어버리는 사람들과 추억, 그리고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게끔 한다. 그곳에는 하루종일 끊이지 않는 온갖 종류의 소음대신 대자연의 숨소리가 들린다. 소음보다도 큰 소리가 귀가 아닌 마음속으로 들리는 것이다.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모든 것을 듣는 듯한 그 순간이다.

막스 피카르트는 이 순간을 ‘침묵’이란 말로 대신한다. 그는 현대의 거칠고 투박한 소리를 냄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기계음 속에 갇혀 진실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잡음과 소음의 사회를 조용하지만 논리적으로 강하게 비판한다. 막스 피카르트 Max Picard는 1888년 독일의 슈바르츠발트 지방에서 태어나서 하이델베르크 대학 의학부 조수를 거쳐 뮌헨에서 개업한 의사이다. 만년에는 스위스에서 문필 활동을 하다가 1965년 영면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신으로부터의 도주>(1934), <우리 속의 히틀러>(1946), <인간과 그의 얼굴>(1952) 등이 있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누워서 조용히 생각해 보라. 오늘 얼만큼의 소음 속에서 생활을 했는가. 아침에 들고 나간 신문과 무의식적으로 본 텔레비전 그리고 이것들을 둘러싼 무수히 많은 광고 등 각종 미디어에서 쏟아져 나오는 자신과는 상관도 없는 무의미한 것들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 할 것이며, 또한 출․퇴근길의 복잡함 속에서 무사히 살아 남기 위해서 직접 소음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소음과 잡음의 삶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이제는 자연의 소리는커녕 바로 옆의 친구의 목소리보다는 기계음(화려한 이미지나 아주 객관적으로 비춰지는 숫자)을 더 좋아하고 신뢰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어느 날 문득, 간혹 이러한 사실을 눈치챈 사람들은 자연의 정적과 침묵을 얻기 위해 전원(田園)으로 간다.

그러나 이들이 소로우의 <월든>에 담긴 자연과 일체 된 삶이나 니어링 부부(<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의 땅에 뿌리를 둔 삶 또는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오래된 미래>)의 생태학적인 삶을 생각하며 갔을 리는 분명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거기에서 침묵을 만날 수 없다. 거대한 도시의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내부의 소음을 시골로 가지고 갈 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리모콘을 쉴새 없이 누르는 동작과 컴퓨터의 마우스를 클릭하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이제는 TV와 Internet의 잡음이 현실이 되어버린다. 자신의 눈 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직접 보더라도 믿지 못하고 그 일이 TV와 Internet을 통해서 비춰질 때만이 비로소 그 일은 하나의 실제적 사건이 되고 사실로 통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에 <침묵의 세계 Die Welt des Schweigens>는 조용히 투쟁한다. 사라져 가는 진리, 사랑, 믿음과 같은 원현상(原現像)을 침묵을 통해 되살릴 수 있다고...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침묵을 행하기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어렵다고 잊어버리기에는 너무나 가치 있는 것이기에 더 이상 이렇게 생활할 수는 없다. 우선 자연으로 가자. 나무가 가득한 곳이 아니라도 좋다. 자연이 숨쉬는 곳이면 어디든지 좋다. 그곳에서 책 한 권을 통해서 한 인간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갖자. 그리고 머리와 몸과 마음을 열어놓고 사색하자.

융은 “두 개성의 만남은 두 화학물질의 결합과 같다. 반응이 이루어지면, 둘은 변화한다.” 고 말했다. 이제 자연과 책을 만난 당신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내일은 문명의 질서를 정신없이 쫓아가기보다는 자연의 질서와 자연스럽게 융화되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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