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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감성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2
제인 오스틴 지음, 윤지관 옮김 / 민음사 / 2006년 3월
평점 :
"오, 냉정한 엘리노어, 언니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입을 열지 않겠지만, 나는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기' 때문에 입을 열지 않는 거야."
-이성과 감성Sense and Sesibility (제인 오스틴Jane Austen 지음), 메리앤Marianne이 엘리노어Elinor에게.
세상에서 가장 서로를 의지하고 사랑하는 자매지간이지만, 이성적이고 차분한 큰 딸 엘리노어와 감성적이고 발랄한 둘째 딸 메리앤은 극명한 성격 차이를 드러낸다. 의좋은 평소에야 서로 잘 부딪히지 않지만, 한번 부딪히면 그녀들이 서로에게 결국은 큰 상처를 하나 씩 입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녀들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서로를 이해하지도, 그렇다고 방임하지도 않는다.
사랑에 대해서 그녀들은 정말 극명한 자신들의 입장을 보여준다.
로버트 페라스Robert Ferras를 좋아했고, 그가 분명 자신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우유부단한 나머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않고 떠나가 버린 그에 대해 엘리노어는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것은 '우정'이라고 결론 짓는다. 상처는 입었지만, 그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확인해 보지 않았던 자신에 대한 책망을 피하기 위한 방책이다. 그녀는 실상 상처에 민감하다. 겉으로 냉정하고 차분하다고 해서 그녀의 속이 단단하고 차가우리라는 법은 없다. 그 당시의 여자들은 결코 그런 무기를 지니지 못했다.
그러나 메리앤은 그런 언니를 비난한다. 그녀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은 배신 행위라고. '사랑'에 솔직해야 그를 얻을 수 있다고. 메리앤은 그럴 수 있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사랑이 주는 이득을 만끽하고, 자기 감정에 솔직했기에 행복한 나날을 즐겼다. 그러나 엘리노어는 메리앤이 아니다. 그녀는 그럴 수 없다. 그렇다고 메리앤의 말이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리앤이 될 수 없는 엘리노어는 괴로울 뿐이다. 아무도 그녀의 속, 마음 깊은 곳의 그 상처를 알아주지 않았으니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그녀를 가장 이해하고 친구로서 조언하는 것은 메리앤을 사랑하는 브랜든 대령Colonel Brandon이다. 이해한다기 보다, 그는 엘리노어와 같은 성격에 공감할 수 있었다고 보는게 옳으리라. 왜냐하면, 그가 바로 그런 성격이기 때문이다. 그는 메리앤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기에는 너무나 나이가 많았고, 경험이 풍부했으며, 그리고 그만큼 이성적이었다. 엘리노어 역시 그의 외사랑을 안타까워 해주면서도 결코 그에게 메리앤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라는 어리석은 충고는 하지 않는다. 그건 그녀가 브랜든 대령의 성격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그와 자신의 비슷한 입장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둘 다 자신의 성격을 결코 이해해 줄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브랜든 대령에게 메리앤은 어린만큼 순수하고 빛나지만 상처 받기 쉬운 사람이다. 그는 예전에 그녀와 비슷한 성격의 여성이 어떤 식으로 이 세상에서 절망하고 무너졌는지를 알고 있다. 그의 경험은 그래서 메리앤을 향하는 그의 마음에 더욱 애틋함을 실어준다. 메리앤이 노골적으로 자신에 대해 야박하고 쌀쌀맞게 굴어도 그는 결코 메리앤을 배신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는 메리앤이 자신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그런 절망을 맛보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엘리노어의 경우, 그녀가 사랑하는 로버트 페라스는 수줍고 예의바르지만 우유부단한 남자이다. 그는 야망도 없고 욕심도 없으며 어린아이 같이 천진하고 순수하다. 그런 만큼 그는 주변에 휘둘리기 쉬운 것이다. 엘리노어는 로버트 페라스가 사회적으로 행해야 하는 그의 '행동'을 그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다. 어머니와 누나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지참금이 많은 여성과 결혼해서, 사교계의 인사로 살아가는 삶이다. 그렇기에 엘리노어는 제대로 구애도 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변명조차 하지 못한 로버트 페라스를 보듬을 수 있었다. 그를 이해했기 때문에.
메리앤에게 있어서 자신과 정반대의 성격을 지녔지만 결코 그녀 주변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 두사람은 각각 사랑스러우면서도 이해가 불가능하고, 경멸하면서도 든든함을 느끼는 존재이다.
그녀에게는 엘리노어나 브랜든 대령의 '애정'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방식인 것이다.
그녀에게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서로를 행복하게 하며, 모든 걸 환희의 색채로 물들이는' 특별한 것이다.
윌러비Willoghby와 있을 때의 메리앤이 느끼는 충만감과 행복감이 바로 그런 것이었고,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진실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연인은 '사랑'만으로 보든 것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기에는 너무 많은 경험을 쌓았고, 또한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분명 그는 그녀를 사랑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미래에는 그녀와 그녀의 사랑보다는 돈과 적합한 신부감이 더 어울렸다.
상처입고 절망하고, 믿을 수 없다며 울부짖는 메리앤을 바라보는 엘리노어의 심정, 그리고 윌러비의 정체를 알면서도 차마 충고하지 못했던 브랜든 대령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사랑이 변했다는것, 가장 절대적인 가치라 믿었던 사랑이 겨우 속물적인 '금전'에 졌다는 것에 받은 메리앤의 상처는 실연의 아픔 이상의 것으로 변했다. 그녀에게 그건 그녀 자신의 가치관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사건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런 그녀를 구하는 것은 역시 사랑이었으니 이것도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그녀를 지킨 브랜든 대령의 사랑을 메리앤이 깨닫게 된 것은 그녀의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정열에 휩싸여 미처 보지 못하던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사랑은, 결코 한 종류가 아니고, 사랑은, 결코 '한 사람'만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쓸쓸하게 저물어 갈 것 같았던 엘리노어를 구해낸 것 역시 사랑이었다.
우유부단하고 현실에 순응할 것만 같았던 로버트 페라스는, 어머니와 누나와의 의절을 무릅쓰고, 그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엘리노어에게 돌아온다.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그녀에게 온 것이다.
소설에는 서로 대조적인 사랑과 인물들이 계속 교차되어 등장한다.
감성적인 여인, 이성적인 여인, 냉정한 남자, 정열적인 남자, 정열적인 사랑의 끝에서 담백한 사랑을 발견하는 여인과, 한결같은 사랑으로 그녀를 보호하는 남자와의 행복한 미래, 그리고 이성으로 자신을 지키던 여인이 모든 것을 사랑에 걸고 찾아온 남자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마는 현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속 인물들은 늘 '변화'한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벗어나, 언젠가는 변하고,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잇는 입장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뛰어난 점이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들이 계속해서 읽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세상에 전형적인 인물은 없지만, 또한 성격이 변하는 인물 역시 없다. 단지, 그들은 그들의 입장이 바뀔때에서만 상대방 혹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제인 오스틴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정말 대단한 작가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