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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정치 : 들뢰즈의 루소 강의



질 들뢰즈 / 번역 황 재 민


10. 사회 계약


16세기 법학자들은 계약을 당사자들, 우두머리가 되는 당사자와 이에 종속되는 다른 당사자 간의 관계로 만든다. 따라서 주권자는 분할된다. 쟁론들을 평결할 3 심급이 필요해진다. 권력도 주권도 나누어지게 된다. 루소에 따르면 이러한 파악 방식은 사회와 정부/통치(gouvernement) 혼동한 것이다. 루소에게 모든 통치는 그보다 앞서는 결사를 전제하고 있다. <사회계약론> 1 5 참조. 수장에 대한 신민들(sujets) 복종은 이미 주체(sujet)로서의 인간의 구성, 하나의 결사를 전제한다. 만약 복종이 계약이라면 계약은 최초의 것이 아니다. <사회계약론>의 논의 흐름 안에서는 결사 없는 복종이 불가능한 것이다. 3 16 참조.

주권은 양도 불가능하다. 법학자들은 반대로 말한다(푸펜도르프). 법학자들에게 주권이란 복종 속에서 양도되는 것이다. 루소가 보기에 주권이 양위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증여나 매매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다. 만약 증여라면 그것은 강제된 것이거나 암묵적인 것이거나(1 1) 자발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매매로 이뤄진다고 해도 강제된 것이거나 암묵적이거나 자발적인 것이다.

강제되거나 암묵적인 증여라는 원천은 아무런 권리도 지니지 못한다. 증여가 자발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순전히 광기일 뿐이다. (이처럼 자신의 자유를 내준 인민은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매매라고 같으면 그러한 자유가 안전과 교환된다고 텐데, 루소는 그것이 통치에 관한 오독일 뿐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제 통치는 주권자에 상당하는 내지는 주권자의 위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통치 행위들은 일반법을 미리 전제하고 있는 특수한 행위들로 정의될 없다. 통치와 동격이 있는 것은 오직 위임(commission)뿐이다. 통치 행위들은 주권자의 유출물들이다. 통치는 주권자에 근본적으로 종속된다. 그렇기 때문에 주권자는 자신에게 종속되는 하나의 심급에 양도될 없다.

주권자의 양도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주권은 입법권을 양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자기를 대표하게 것이다.

그러나 주권은 대표 속에서 양도될 있는 것도 아니다(1 2). 주권은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대표될 있다. (3 15장에서 루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권이 양도될 없는 것과 동일한 이유로 주권은 대표될 없다. 주권은 일반 의지로 이루어지며 의지는 대표되지 않는다.” {최석기 옮김, <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계약론>, 동서문화사, 2007, 244.})


통치가 주권의 위임에 불과하기에 주권을 것으로 전유할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표자들은 인민의 위원들에 불과하기에 주권을 것으로 전유할 없다.

통치자들은 대행자들(commissionnaires) 내지는 위원들(commissaires)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지하기의 능력이 아닌 (법에 따르는 요건을 규정하는) 판단의 기능만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의원들 역시 판단의 기능만을 가진다. 의원들은 일반 의지를 명확히 하는 법률들은 구상한다. 이러한 법률들은 의원들이 의무적이고 실효적인 것으로 만들 없는 가설적인 것들이다. 오직 주권자들만이 의원들이 만든 법안들에 대한 결정권을 쥔다.

(입법부로서) 의원들은 법률들을 제출하고, 그것을 비준하는 것은 오직 주권자 인민이다. 그러므로 영국 인민이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영국 인민은 의원들을 선출할 때만 자유롭다. 선거가 끝나고 나면 대표자들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절대 군주정에 대항해서, 대의적 통치들에 대한 비판 속에서 루소가 드는 논거들이다.


입법과 관련한 고대 도시국가의 상황은 입법자가 제안하고, 인민이 결정한다는 것이다. 루소는 그것을 용감한 통치라고 말한다. 대표자들이라는 발상은 루소가 보기에 봉건적 발상이다. 대의제 의회들은 봉건주의자들이 군주정에 대항한 투쟁에서 취한 수단이었다.

고대의 입법부는 작은 도시국가들과 시민들이 가진 여유를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폴란드의 통치에 관한 고찰들>에서 루소는 그러한 국가를 위한 의원 대표제를 구상한다. 물론 잦은 선거를 통해, 또한 재선될 있는 자격에 관한 규칙들을 강력히 준수함을 통해, 요컨대 공적 평가(compte-rendu public) 통해 의원들을 통제한다는 조건에서다. 이러한 수단들을 통해 의원들이 인민의 위원들이라는 직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민이 지도자나 대표자들을 갖게 됨과 동시에 인민의 양도 비슷한 것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10.1. 주권자는 환원 불가능하다


주권자는 개인이나 여러 개인들로 이뤄진 집단으로 환원 불가능하다. 


논거 1 : 논쟁적인 논거 (Lettre à le Marquis de Mirabeau)


논거 2 : 주권자 자체를 구성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주권자를 일반 의지로서 구성한다. 이러한 의지가 특수한 의지와 일치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일은 본성상 우연한 것이다. (<사회계약론> 1 1)


논거 3 : 주권자가 만약 개인이라면 양도 가능한 것이 수도 있다. 주권자는 추상적이고 집단적인 실존만을 갖는 도덕적 인물이다. (<주네브 수고> 참조.)


10.2. 주권자는 어떻게 분할 불가능하게 되는가?


주권자는 대상에 있어 분할 불가능하다. 


홉스에게 주권자는 원리에서 분할 불가능하다. 홉스의 계약은 전체가 어떤 3자의 신민이 되는 행위이다. 계약에 가담하지 않는 3자가 주권자이다.

주권자는 계약을 체결한 바가 없기 때문에 신민들이 그를 거역할 있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대표될 수도 없는 주권자의 양도 불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홉스는 주권자를 인물이나 여러 인물들로 이뤄진 하나의 집단으로 환원한다. 주권자의 분할 불가능성이 구별되는 여러 권력을 내포할 없게 하는 것은 아니다. 주권자가 절대 권력을 가질 있기 위해서는 모든 권력들을 그의 손아귀에 넣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원리에서 분할 불가능한 주권자가 대상에 있어서는 분할 가능한 것이 된다.

루소는 <사회계약론> 2부에서 이러한 테제를 비판한다.

루소에게 주권자는 절대적으로 분할 불가능하다. 주권자는단적이고 하나이다(simple et une).” <사회계약론> 3. {최석기 옮김, <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계약론>, 동서문화사, 2007, 241.} 

주권자의 대상은 하나의 것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법이다. (홉스가 주권의 권력들이라 칭하는) 전쟁이나 평화를 결정하기 등등은 선결 조건으로서 입법(legislation) 전제하는 통치 행위들일 뿐이다.


이로부터 나오는 결론들 :

- 그러니까 계약은 복종 행위가 아니다.

- 계약은 전체가 3자의 신민이 되는 행위가 아니다.

- 계약은 통치에 있어 가능한 양도나 의원들에게 있어 가능한 대표가 없이, 전체가 주권자로 구성되는 행위이다.

- 이처럼 파악되기 위해서는 계약이 당사자들 간의 관계로서 간주되어서는 된다. ( 점에서 루소는 자신의 모든 선학들에 반대된다. 아마도 스피노자 정도가 예외일 것이다.)


10.3. 계약의 실정적 특성은 무엇인가?


만약 우리가 계약을 관계로서 제시한다면, 그것은 공중과 특수자 내지는 신민과 주권자 간의 관계를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인민, 공중은 계약에 앞서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루소에게 이는 잠정적인 표현일 뿐이지 가장 심층적인 표현은 아니다.

<사회계약론> 2 4 2단락에 붙은 주석을 참조할 . 여기서 루소는 용어들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의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다. {최석기 옮김, <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계약론>, 동서문화사, 2007, 208.}


가지 불변

- 특수자, 개인 또는 (사적인) 인간

- 신민/주체(sujet)

- 시민


개의 용어는 상호 치환 가능하다. <사회계약론> 1 7 1단락.

매개항은 가지 관계 하에서 고찰되는 개인이다. 개인은 신민이자 주권자의 일원이다.


2단락에서는 신민이 매개항으로서 가지 관계 하에서 고려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계약이란 특수자를 어떤 하나의 관계에서는 신민으로서, 다른 하나의 관계에서는 시민으로서 구성하는 것이라고 말할 있다.

또는, 신민은 주권자에 대하여 특수자로 취급되고, 특수자, 개인에 대하여는 주권자의 일원으로서 취급된다.

따라서 계약은 상호 치환 가능한 가지 항들을 개입시키고 있다. 매개항이 가지 관계 하에서 취급되어야 한다.


번째 가정에서는 매개항이 개인이다.

개인은 주권자에 대하여 스스로를 신민으로 구성한다.

개인은 특수자들에 대하여 스스로를 주권자의 일원으로 구성한다.

궁극적으로는 신민/주체(sujet)만이 이중의 관계를 갖는다. 우선은 주권자에 대하여 신민이고, 다음엔 신민이 주권자의 일원이다. 따라서 신민이 매개항인 셈이다. 계약의 토대가 되는 행위는 개인이 신민/주체가 됨과 동시에 주권자의 일원이 되는 행위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노예일 것이다.)


점차적으로 심층으로 들어가는 사회 계약의 가지 정식이 있다. 


계약이란

- 두 가지 항들 간의 관계이다.

- 세 가지 항들을 통해 밝혀진다.

- 두 가지 관계 하에서 취급되는 신민/주체 자체이다.


10.4. 의무, 총체성, 즉각성


계약으로 인해 의무가 생겨난다. 누가 의무를 지는가? (<사회계약론> 1 7) 개인은 아니다. 법적으로 본다면 개인에게 의무 지울 수는 없다.

주권자인가? 아니다. 왜냐하면 주권자는 자신의 실존 조건 외에, 다시 말해 자신의 존재 조건을 규정하는 외에 다른 아무것에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주권자 자체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의무를 가질 없다. “주권자가 존재하도록 하는 행위를 불이행한다는 것은 주권자 스스로가 무화한다는 말일 것이다”(<사회계약론> 1 7). {최석기 옮김, <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계약론>, 동서문화사, 2007, 171.}

의무를 따르게 되어 있는 것은 오직 신민/주체뿐이다. 신민만이 의무의 조건이 되는 가지 관계들 아래에서 포착될 있기 때문이다.

의무의 원천이 되는 무엇인가? 그것은의무를 지는 자의 자유로운 약속(engagement)”이다. 「산에서 편지」 여섯 번째 편지. {김중현 옮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외>, 한길사, 2007, 371.}

의무를 있는 것이 가능한 항은 신민뿐이다.

이와 같은 의무의 원천을 제외한 모든 의무의 원천들을 의심의 여지가 있을 있다.


약속이라는 행위의 본성 : 그것은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총체성(totalité) 즉각성(instantanéité).

<사회계약론> 1 6 참조. 행위는 전면적(totale) 양도이다.


- 전면적인, 다시 말해

완전한 : 전체가 양도의 대상이 된다.

보편적인 : 개개인마다 완전하게 양도한다.


양도가 완전할 있는 것은 타인을 위한 양도가 아닌 까닭이다. 만약 타인을 위한 양도라면, 자유는 양도 불가능하므로 전면적 양도일 수가 없을 것이다.

양도는 하나의 전체를 구성함에 있는 것이지, 타인에 대해 의존하게 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개개인은 동일한 조건에 따르는 것이다. “각각이 전체에 대하여 스스로를 내주기 때문에 모두에게 평등한 조건이다.” 1 6. {최석기 옮김, <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계약론>, 동서문화사, 2007, 169.}

누군가는 좀더 많이 양도하고 누군가는 좀더 적게 양도하는 ( 각각이 전면적으로 양도하지 않는 경우, 각각이 무언가를 간직하는 경우 등등) 개인들 간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전면적 양도의 수준에서 이미 평등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 즉각성 : <사회계약론> 1 6. “결사는 즉각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단체(corps) 생산한다.”

내가 스스로를 양도하는 즉시, 나는 주권자를 구성하고 전체를 되찾는다. 밖에 달리 있을 있는 일은 없다. 주권자는 다른 형태 하에서 스스로에게 전체를, 심지어 이상을 복원시켜 준다(restitue)(1 9). 가령 주권자는 개인이 주권자에게 양도한 소유지의 합법적 점유를 보장한다. 주권자는 가운데 공동체에 필요한 것만을 간수할 뿐이다. 거기서 주권자의 도덕적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주권자의 실존 조건이다. 주권자가 이러한 복원(restitution) 이행하지 않는다면 주권자는 파괴된다.

그러나 주권자만이 {공동체에 필요한 것에 관한} 그러한 중요성에 대한 심판자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최석기 옮김, <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계약론>, 동서문화사, 2007, 185.} 오직 주권자만이 공통의 이익에 속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할 있다. 그것은 상황, 정황들, 사회의 형태론(morphologie) 따라 매우 가변적이다.

소유자들에 대한 이러한 부분적 복원/복권(restitution) 반대급부로 조세의 징수가 있을 것이다.

소유자는 공공 재산의 관리인일 뿐이다. 그가 소유자로 존재하는 것은 주권자의 복원 행위에 의해서만이다. 직접적 복원은 사적인 소유물과 사적인 소신, 다시 말해 신민 전체의 이해관계와 관련 없는 사적인 종교를 대상으로 한다. (<사회계약론> 마지막 {4 8 「시민 종교에 대하여」}.)


10.5. 주권자가 일반 의지를 구성하는가?


계약은 필연적으로 일반 의지를 형성한다.

공통의 이익과 일반 의지를 혼동해서는 된다. 공통의 이익이란 주권자에 대하여 신민이 갖는 이익이다. 이는 내가 스스로를 신민으로 구성되도록 하는 행위, 계약에 준하는 것이다. 전체는 평등한 조건에 따름에 따라 동일한 이익을 가지게 된다. 평등의 삭제는 공통의 이익 전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다만 나는 신민 각자가 일원이 되는 주권자에 대하여, 개인들에 대하여 하나의 신민/주체로서 스스로를 구성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각자는 입법자이다. 이때 우리가 이끌어낸 것은 이상 평등이 아니라 자유, 주권자가 개인들에 대하여 바라는 바의 그것이다. 일반 의지란 주권자의 일원으로서, 시민으로서 각자의 의지인 것이다.

의지를 일반화하는 것은 바로 공통의 이익이다.” 이로써 루소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공통의 이익은 일반 의지를 구성하는 것이 아닌, 일반 의지의 가능성 조건이다. 주권자의 형성은 개인이 신민이 되는 행위를 조건으로 갖는다. 공통의 이익을 정의하는 이러한 행위 없이는 주권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일반 의지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루소의공리주의(utilitarisme)’ 말할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인가?

공리(功利)/효용/유용함(utile)이라는 통념은 가지 의미로 드러난다.


­ 하나의 능력(faculté) 오로지 그것이 유용할 경우에만 발전한다. 필요/욕구는 그러한 능력을 창조할 없다. 효용은 능력을 실현하는 역할만을 한다.


­ 계약에 의한 공통의 이익은 일반 의지의 원리가 아닌, 일반 의지의 가능성 조건이다.


10.6. 일반 의지는 무엇을 바라는가?


일반 의지는 신민들 전체가 놓인 조건의 평등 속에서 자신의 조건을 발견한다. 일반 의지는 어떤 선호에 의해서는 규정될 없다. 이런 의미에서, 밖에 다른 것에 의해서는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반 의지는 자유 의지이다(칸트). 일반 의지는 오직 만을 원할 있다.


법은 개인들과의 관계를 무규정적인 것으로 남겨둔다. 법은 입법자의 작업에 의해서만 종별화될 있다. 자체는 시민으로서의 신민/주체가 갖는 의지의 형식 뿐이다. 「산에서 편지」 여섯 번째 편지.

마찬가지로 1767 Lettre à Le Mercier de la Rivière 참조할 : 인간 위에 법을 놓는 통치 형태를 생각해내야 한다.

<사회계약론> 3 1 : 가지 사태를 구별해야 한다.

­ 의지가 그러한 행위를 원할 있는지에 관한 물음(칸트의 도덕적 가능성). 이는 입법권이다.

­ 우리가 그것을 있는가의 물음, 우리가 그것을 달성할 가능성을 가지는가의 물음(칸트의 물리적 가능성). 이는 집행권이다.


일반 의지는 법을 통해 규정되기 때문에 물리적 가능성 안에서 행위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행위를 고려하는 것이다.

법에는 의무가 결부된다. 법이라는 말은 명령적(prescriptif) 의미로써만 엄밀하게 사용될 있다.

내가 신민이 되는 행위가 의무의 원천이라면, 법은 시민법일 수밖에 없으므로 계약 속에 기초를 가지는 것이다.


이는 충분한 답변인가?


위와 같은 답변은 루소가 자연법풍의 발상을 격렬하게 비판함을 내포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향해야 곳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다.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락된 것인가? 루소는 물음에 대해 자연법 개념은 오해로 가득한 개념이라고 말함으로써 답변을 피한다.

하지만 루소가 자연법을 내세우면서 그것이 계약 자체보다 상위의 것이라고 말하는 텍스트들이 존재한다.


­ 루소가 1758 10월에 편지 : 루소는 주권자와 무관한 가지 상위의 권위들을 인정한다. 그것은 , 자연법, 명예(honneur)이다. 충돌이 빚어진다면 주권자가 물러서야 한다. <신엘로이즈>에서 있듯이 위계는 자연법(사랑), 명예, 신의 순으로 높아진다. (명예에 관해서는 1 생프뢰의 편지에 담겨 있다.)


­ 「산에서 편지」 여섯 번째 편지 : “계약이 자연법들에 반하는 것이 아님을 입증해야 합니다.” {김중현 옮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외>, 한길사, 2007, 371.}


<에밀> 2 : “자연과 질서의 영원한 법이 존재한다. 현자에게는 그것이 실정법을 대신한다.” {이는 2부가 아니라 5 후반부에 나오는 구절이다. 타자 실수로 보인다. 이용철ㆍ문경자 옮김, <에밀 또는 교육론>, 2, 한길사, 2007, 502.} 현자는 사회를 벗어난 자이다.


어떻게 계약이 시민법과 의무가 발원하는 1원리가 되면서도 자연법이라는 그보다 높은 심급에도 관계하는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 도입부 참조.

루소에게 자연법 비판은 가지 의미를 갖는다.


­ 그것은 우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등의) 고대인들을 겨냥한다. 고대인들에게 자연법이란 올바른 이성(recta ratio), 실재들(choses) 자체의 고유한 목적들에 부합함이다.

루소가 보기에 이들은 법이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한다. 그들이 이해한 법은 자연이 명령하는 법이 아닌, 자연 자체에 요구되는 법이었다. 그런데 법의 개념은 자연의 실존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명령이다(<인간 불평등 기원론> 서문).

그러한 명령적 특성은 근대인들이 파악했다. 근대인들에게 법은 지성을 지닌 자유로운 존재에게 명해진 규칙이다.

자연법은 그렇게 명령을 받아들일 있는 존재에 대해 적용된다.


홉스와 더불어서 자연 상태는 이상 완전성의 질서가 아닌, , 정념, 동기의 체계가 된다. 법은 이제 그러한 정념을 지닌 존재에게 장애가 되는 의무가 된다. 자연 상태는 힘들의 체계이며, 그러한 힘들에 상응하는 자연적 권리들을 동반한다. 이러한 구조에 번째 구조, 자연법의 구조가 덧붙는다. 법의 동기는 폭력적 죽음의 공포이며, 이러한 공포는 이성의 원리 자체이기도 하다. 법은 규칙을 명령한다. 규칙이 없다면 생명을 보존할 없을 그러한 규칙인 것이다. 그렇지만 자연법은 가언적으로만 명령할 있다. 자연법은 다른 이들 역시 법을 원한다는 조건에서 생명 보존의 수단을 뿐이다. 이로부터 나오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어떻게 법이 의무적인 것이 되는가? 그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모든 개인들이 상호 계약을 맺어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진 권력들을 계약에 함께하지 않은 주권자에게 위탁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자연법은 시민법이 된다.

루소에 따르면 근대인들의 잘못은 자연법을 자연 상태 속에 들여놓는다는 점에 있다. 근대인들은 자연 상태에서 이미 이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를 가정하고 있다. (이성이 없으면 법도 없기 때문이다.)

루소는 법의 명령적 특성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근대인들은 법이 무엇으로 성립하는지를 보지 못했다. 이유는 법이 가언적인 것에 머물기 때문이다.

루소에게 자연법은 자연 상태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자연법은 자연 상태로부터의 잠재성들의 발생론적 발전이기 때문이다.

루소의 자연법은 사회를 전제한다. 이는 사회 내의 객관적 정황들 속에서만 잠재성들이 실현된다는 의미이다. 가령 정의감은 그것이 유용한 경우에만, 달리 말해 사회가 존재하는 경우에만 실현된다. 그렇더라도 사회가 자연법 발전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계약은 자연법과 관련될 수밖에 없다. 시민법의 절대적 기초인 계약은 자연법으로 귀착하지 않을 없다. 왜냐하면 자연법이 전면적 양도임과 동시에 즉각적 복원 까닭이다. 계약이 자연법과 상치한다면 계약은 파기된다.


10.7. 루소의 시민법 이념


법은 주권자의 행위 자체, 일반 의지의 직접적 표현이다. 법령(décret) (loi) 본성상의 차이가 있다.

법은 전체로부터 모두에게로 나아간다. 법은 신민들/주체들을 단체(corps), 상황들을 추상적인 것으로 고려한다. 그러니까 법은 주권의 행위인 것이다.

법령은 인물들을 명명한다. 신민들/주체들을 특수한 것으로, 행동들을 구체적인 것으로 고려한다. 이는 통치 행위이다.

법은 통치 형태, 모든 신민 일반을 위한 통치에 이르기 위해 충족해야 조건들을 규정한다. 


주권자와 일반 의지 간의 관계. <사회계약론> 3 4 참조.

주권자는공통의 자아이며, “감수성을 지닌 생명이다.

일반 의지는 그러한 생명에 상응하는 운동이다.

사회 계약이 주권자의 형성이라면, 일반 의지는 주권자가 스스로를 보존하는 형태이다.

사회 계약은 이미 일반 의지인 것이다. 사회 계약은 형식적 의지를 정의한다. 계약 자체는 의지를 일반화하고 형식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권자는 이미 형식적 의지이다. (특수 의지가 항상 선호들을 추구한다면, 일반 의지는 보편적 (bien) 추구한다. 이는 전칸트적 구분이라 있다.)


일반 의지는 무엇을 바라는가? 일반 의지가 바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달리 말해 형식적으로 규정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자유와 평등이다. 주권자는 일반 의지가 자유와 평등을 바라는 한에서의 일반 의지이다.

법이 형식적이라는 말은 법이 법령이 돌보고자 하는 인격들과 관계에 있어서 인격들을 사상(捨象)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통치는 하나의 판단 능력이다. 아래에 관계하는 경우들에 대한 규정.)

하지만 일반적으로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법이 아무리 형식적이라 할지라도, 자유와 평등의 규정이 아닌 법은 없다는 점에서는 형식적이지 않다.

예컨대 가장 나은, 가장 좋은 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실재들 대상들과의 관계를 사상할 없다. 루소가 보기에 우리로 하여금 인격들과의 관계를 면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실재들과의 관계이다.

따라서 법은 우리가 주어진 사회의 객관적 상황(자원들, 인구 등등) 헤아리는 경우에만 완전히 규정된다.

법은 인격들과의 관계에 대한 사상/추상에 의해서는 형식적이지만, 실재들과의 관계를 사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형식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의 법을 규정하는 데서 일반 의지로는 충분치 않다. 의지의 형식적 규정에는 주어진 사회의 객관적 정황들이라는 내용이 덧붙여져야 한다.

그러니까 일반 의지는 선을 바라지만, 선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사적인 인간의 경우와는 정반대인 것이다.) 일반 의지는 형식적이기에 맹목적이다.


따라서 일반 의지는 어떤 비범한 지성에 호소해야 한다. (이는 능력 심리학에서 사회적 평면으로의 전위(transposition)이다.) 바깥에서 의지를 명확하게 만드는 입법자의 지성에 호소해야 하는 것이다. 입법자가 없다면 일반 의지는 의지가 바라는 것을 형식적으로만 인식할 뿐이다. 일반 의지는 물질적으로 규정되기 위해 입법자를 필요로 한다. 좋은 법은 특수한 인격들―형식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기와 더불어, 구체적 상황들―물질적 측면―에 적응하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법은 의지에 준하는 형식과 입법자에 준하는 질료의 합성물이다.


따라서 이는 형식에 입각한 법의 선험적 연역의 물음일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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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루소 저작의 통일성 (I)



에른스트 카시러의 「루소 저작 내의 통일성」이라는 논문.

Ernst Cassirer, «L’unité dans l’oeuvre de Rousseau», Bulletin de la Société française de philosophie,

XXXII, février 1932.


이 논문에 담긴 것은 자유 개념을 중심으로 한 통일을 제시하는 칸트적 테제이다.

칸트의 「인류 역사의 시작에 관한 추측들」을 참조할 것.

{이한구 옮김, 「추측해 본 인류 역사의 기원(Mutmasslicher Anfang der Menschengeschichte)」, <

칸트의 역사 철학>, 서광사, 2009.}

그렇다면 <사회계약론>은 가능한 사회 개조이고자 한 것이 아니게 된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는 그 원리에서 기만적이라 할 하나의 협약(convention)이 등장하는데,

이 협약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바로 퇴락적 사회 상태이다. 이러한 기만은 사회의 정비라는 미

명 하에 행해진다. 따라서 사회가 그 원리에서 결함이 있는 것이기에 재정비 정도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백과전서파와 대척점을 이루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사회 개조는 가능한가? 루소에 따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몇 가지 조건들 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협약(convention)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협약을 백지화할 수는 없

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런 일은 바깥에서 오는 입법가를 전제한다. 크레타, 스파르타, 로마 등의

예들이 그렇다. 이러한 상태들에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시민이었다. 이는 이제 더 이상 가능하

지 않다. 그렇다면 계약(contrat)이 존재하는 이유는 더 이상 그러한 협약을 변경할 수 없기 때문

이다. 계약을 그에 앞서는 자연 상태와 관련짓는 것은 오류이다. 오히려 자연에 속한 인간, 즉

자연법에 따라 양성된 인간과 관련지어야 한다. 교육이 행해지고 난 이후 소유자이자 누군가의

배우자가 되는 에밀이 그런 사례이다. 즉 사적이고 정의롭고 미덕을 지닌 인간. 교육은 공적인

것이기를 멈췄고 우리는 협약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장 로베르 트롱솅과의 서신 왕래{옮긴이―트롱솅의 <시골에서 쓴 편지>(Lettres écrites de la

campagne)라는 소책자에 부치는 식으로 쓰인 아홉 편의 논쟁적 편지글 모음집을 말한다. 루소는

패러디를 담아 「산에서 쓴 편지」(Lettres écrites de la montagne)라는 제목을 붙인다. 루소가 <에

밀>과 <사회계약론>이 일으킨 파문으로 고난을 받던 시기인 1763-4년에 쓰였다. 김중현 옮김, 「

산에서 쓴 편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외, 한길사, 2007.}에서 루소는 사적인 인간과 시민 사

이의 차이를 알아야 함을 역설한다. 에밀이 스스로 정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사적인 면에서

성숙/양성(formé)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인간들이 새로운 사회 질서를 창출하는 것이 아닌가? 어떠한 발생도 사회 계약 이전 단계로 넘어가게 할 수는 없다. 사적인 인간들이 사회 질서, 다른 사회 질서를 정초하는 것은 일련의 변환(transmutation)을 통해서이다.

자연에 속한 인간은 자기 자신의 발생론적 계통과의 관련 속에 놓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가정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퇴락한 상황들 속에 놓이는 일을 막는 것이다.


역사에 대응하는 발생론적 계통은 자연 상태에서 퇴락하는 사회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두 번째 계통은 바로 교육학의 계통이다. 자연법은 퇴락한 사회에서 자연에 속한 사적인 인간을 양성할 수 있다.

세 번째 계통은 비발생론적이다. 자연에 속한 인간은 의지를 통해 자신에게 부합하는 사회 질서를 창조한다.



8. 어떻게 자연 상태를 벗어나는가?



8.1. 자연 상태에서 야생의 상태로



­ - 가령 홉스의 자연 상태의 경우, 우리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그로부터 벗어나도록 만드는 ― 살 수 없게 하는 ― 어떤 불균형이 그 바탕에 놓여 있다. 이러한 벗어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자연법이다. 이 자연법이라는 수단은 최소한의 이성의 발전을 전제한다. 그러니까 자신을 불리한 조건으로 바뀌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각자가 스스로 끊어버리면 더 좋은 것이다.


- 루소에게 자연 상태는 모순 없는 충만한 자기만족이다. 인간 종은 동물적인 종으로 간주된다. 개체는 자신의 종과 더불어 있는 일자를 이룰 뿐이다. 즉 개체와 유적 존재의 동일성인데, 왜냐하면 개체는 대자적 전체이기 때문이다.


-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생소한”, “우연한”, “경미한” 원인들의 다양체이다. 따라서 이는 기계론에 따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 속에 숨은 평면”이 있는 것이며, 인간은 자신의 최종적인 목표를 실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류 발전의 매 단계마다의 객관적 상황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변화할 때 인간 안에 새로운 이익과 필요가 나타난다.

자연 상태를 벗어나자마자 야생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상황은 새로운 두 가지 사실로 특징지어진다. 첫째는 형태론적 원인들, 둘째는 인구학적 원인들과의 관련 속에서만 작동하는 기후적 원인들.

인간들이 늘어나 서로를 더욱더 마주치게 되고, 인간들은 사는 데 좀더 유리한 지방을 물색한다.

새로운 이익과 필요가 나타나지만 여전히 동물적ㆍ신체적 종으로 간주된 인간의 관점에 머문다. 그러니까 인간은 항상 실재들과의 관련 및 실재들에 대한 의존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특별히 수동적이었던 데 반해 이제 인간의 신체적 존재는 활동적인 것이 된다. 말하자면 개체의 유적 활동이되 오로지 신체적이기만 한 것이다. “그 발명자와 함께 죽는 수많은 발명품들.”


- 두 가지 새로운 이익 : 어떤 상황에서는 협력이, 또 다른 어떤 상황에서는 경쟁이 이익이 된다. 지나는 토끼(혼자서 하는 사냥)를 지켜보는 사슴(협력) 사냥꾼의 사례.

최초의 임시 공동체는 사냥꾼들이다. 왜냐하면 최초의 활동이 사냥이기 때문이다.


- 새로운 능력들의 등장 : 몇 가지 관계들에 대한 지각. (이성은 이를 전제한다. 󰡔에밀󰡕 참조.) “일종의 반성 내지 반사적 신중함.” 「사부아 보좌 신부의 신앙 고백」은 신에 대한 복종만이 아니라 “여러 감각들을 비교하는 능력”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이는 아직 자유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고 신체적인 수준에 머무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은 추론에 의한 판단이 아닌 둘러봄(inspection)에 의한 판단이다. 신체 활동과 분리될 수 없는 “감각적이고 유치한 수준의 이성”이다.

이러한 수준에서는 종으로서의 인간은 다른 종들과 동렬에 놓인다. 인간은 자신의 동류들과 유적 본성에 있어 일치점을 갖는다.

의성어, 몸짓 언어, 자연 언어의 등장.


- 새로운 필요와 이익이 상황 속에 통합함으로써 그 상황이 변화한다. 또한 천재지변이 개입한다. 새로운 이익의 문제는 자연적 개체에서 도덕적 인간으로의 이행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고유한 의미에서 정신적인 새로운 활동의 발견이다.



8.2. 도덕성과 자유의 도래


모든 일은 마치 그러한 이행이 활동의 감퇴를 초래하는 것처럼 흘러간다. 󰡔에밀󰡕 3부와 4부를 참조 : 아이는 여전히 희미한 욕망들만을 가지지만 아이의 힘은 커졌다. 아이에게는 감춰진 역량들이 있다. 아이는 학습을 통해 자신의 지적ㆍ도덕적 존재를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도 “목자들이 덜 활동적이고 더 조용한 것”은 숙명과도 같은 일이다. 이는 여가 및 쓸데없는 열정의 탄생이다. 이때부터 “개별적인 수준에서 기호와 비교”가 있게 된다. 개체는 종과 구별되는 것이다.


어떤 조건들에서? 종이 더 이상 신체적 종으로 정의되지 않고 도덕적 종으로 정의되는 데 따라.


새로운 이익들과 필요들 : 정착 거주가 나타난다(소유의 맹아). 결사들이 형성되는데, 이는 단지 사냥꾼들의 이익과 같은 그러한 이익에 기반한 것은 아니다.

능력들의 상태 : 신체 활동이 적어지고 그에 따라 발견되는 것은 배려와 복수의 도덕이다.

개인은 종과 더불어 있기를 멈춘다. 그는 타자들에 의해 마주침이 일어나기를 원한다. 이는 불평등과 자존심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도덕성은 우선 권리, 곧 응당 나에게 갚아져야 하는 것에 대한 의식에 의해 표면화된다. 이는 모욕을 당하고 복수를 행하는 개인과 관련된다. “각자는 자신이 당한 모욕에 대한 심판자이자 복수자이다.”

아직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도덕적 종으로서의 인류와 개인 간의 분리가 완전하지 않았음을 함축한다. 루소는 이때가 최상의 시대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고유한 도덕적 존재, 곧 자유를 발견하게 된다. 영혼과 신체의 이원론을 긍정하는 「사부아 보좌 신부의 신앙 고백」을 참조할 것. 영혼은 활동적인 것으로서, 모든 신체적 결정으로부터 독립적인 의지를 생산한다. 자유는 이미 자연 상태에 있었지만, 그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되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는 삶과 더불어 있는 일자로 계속 남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가 도덕적 존재를 구성함을 발견하는 한에서 자유에 대한 의식을 갖추게 된다. 자유가 자연 상태에 존재했었다고 우리가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완전화 가능성을 통해서 우리가 도덕적 상태로 넘어가고 나서다.


두 가지 이원성이 형성된다. 첫째는 신체적 종으로서의 인간과 도덕적 종으로서의 인간(영혼과 신체), 둘째는 개인과 종. 첫째가 발견될 때 둘째는 더 깊어진다. 도덕적 종 속에서 미덕에 대한 사랑이 발전함과 동시에 개인 속에서 악의적 존재가 갖는 이익이 발전한다.


두 이원성이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은 통치화한 상태(état policé)에서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야금술과 농업이 쌍을 이루며 성립하고 여기에 새로운 이익들이 결합된다. 야금술의 성립이 먼저인데, 야금 작업을 할 이들을 키워내기 위한 필요성에서 농업이 탄생한다. 노동 분업은 철과 농업 생산물 간의 교환에 기초한다. 이어 최초의 소유, 곧 토지의 분배가 나타난다. 소유와 노동 간의 협약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노동자가 땅을 점유한다. 그는 그 땅이 노동의 결실들을 생산할 때까지 노동이 행해질 그 땅에 대한 모종의 권리를 갖는다.

수확기에서 수확기까지 계속되는 이러한 점유는 자연적 기원에 속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오는 것이 정의의 도덕으로 향하는 도덕적 존재의 진화이다. 단, 이 진화는 소유 관념 이후에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유 관념은 도덕적 존재의 발전이 놓이는 토대인 셈이다.

그러한 정의는 각자에게 당연히 갚아야 하는 것을 부여함으로 이뤄진다.



8.3. 기만, 악의, 양도


야금업자들과 경작자들의 관계에서 어떤 “비율 배합 상의 불평등”이 존재하게 된다. {옮긴이―가령, 철 소비와 식량 소비 사이의 불균형, 야금업과 경작 각 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재능의 차이로 인한 불균형 등등. 주경복ㆍ고봉만 옮김, 󰡔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 2003, 110쪽.} 소유는 정의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러한 목소리는 여전히 약하다. 그런 정의감에도 불구하고 개체적 인간은 노동 분업에 기인하는 소유물의 불평등에서 소유자가 갖는 이익을 발견하고 다소간 탐욕적인 소유자를 자임하려고 한다.

따라서 새로운 불평등, 곧 탈취(usurpation)의 불평등이 존재한다. 힘의 관계가 소유자들 간의 관계에 확립된다.

부자들은 루소가 신중을 기한 기획이라고 부른 것을 구상한다. 그것은 “허울좋은 근거들”에 의한 기만이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115쪽.} 부자들은 무소유자들에게 전쟁 상태의 종결과 함께, 모든 의지를 단 하나로 재결집시키는 것, 곧 최고 권력의 구성을 제안한다. “매우 일반적인 협약”인데, 기만적인 것이다.


여기서 루소는 아주 고전적이라 할 그러한 이론들을 답습하는 듯 보이지만,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위와 같은 계약이 하나의 기만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추구하는 것은 기만 없는 계약이 일어날 수 있는 추상적 조건들이다.


루소의 선학들은 계약에서 자유와 안전의 교환을 본다. 이러한 교환을 계약의 효과로 보는 데에 루소 역시 동의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그러한 계약이 하나의 기만이며, 합의(consentement)를 통해 얻어질 수는 없는 것이라는 한에서만 그렇다.


ㆍ 논리적 논거 : 우리는 타인에 대한 의존에 빠지지 않기 위해 협약을 받아들인다.

ㆍ 심리적 논거 : 자연적인 예속 성향이란 것은 없다.

ㆍ 사회학적 논거 : 사회 상황과 가족 상황을 동일화하는 부권(autorité paternelle) 테제에 대한 반박.

ㆍ 도덕적 논거 : 나의 신체적 존재와 더불어 있는 생명과 마찬가지로, 자유는 나의 도덕적 존재와 더불어 있는 일자일 뿐이다. 생명과 자유 모두 양도 불가능한 것들이다.


루소는 우리가 자유를 잃어버렸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심지어 계약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는 그 계약에 대해 속았던 것이다. 기만으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나서 정의될 수 있는 계약은 있는 것인가? 󰡔사회계약론󰡕이 검토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우선, 역사적인 검토를 한다. 계약이라는 발상에는 두 가지 테마가 존재한다. 곧, 복종과 결사.


­ 복종에 관해서는 주로 16-17세기에 다뤄졌다. 여기서는 계약의 두 당사자가 있다고 가정한다. 하나는 신민이고, 다른 하나는 주권자이다.

홉스의 이견 : 주권이 이중화된다. 제3의 역량이 쟁론을 심판하기 위해 필요하게 된다.

­ 결사란 모두의 의지를 하나로 재결집시키는 것이다. 결국 신민이 되는 자들 사이에서 무수한 계약 행위들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루소의 비판 : 홉스는 결사가 원초적인 것임을 잘 파악했지만, 복종이 결사가 되게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렇다면 우리는 계약에 가담하지 않은 주권자에 대하여 신민으로 구성된다.

루소에 따르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제안한 재결집의 산물로서의 결사다. 우리는 하나의 공중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계약이 기만이라는 것은 원래부터 결함이 있는 계약이라는 말이다. 가난한 자들은 그 의지가 공통적이지 않음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통치 계약이 필수적이다. 통치 계약은 제2의 기만이다. 왜냐하면 집정관들이 아무리 정직하다 한들 그 근원적 결함 때문에 집정관들은 부자들이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의감은 여전히 약하다. 겨우 그러한 사기의 실현을 허락하기에 충분할 뿐이었다.


이제 악의적 존재가 갖는 이익이 등장한다.


인간은 악의적 존재가 갖는 이익을 발견한다. 소유는 우리에게 정의감을 줌과 동시에 하나의 특수한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소유는 불평등이라는 내적 운동에 의해 발전한다는 것은 루소 이전에 여러 경제학자들이 말한 바 있다.

루소는 좀더 복합적인 발상을 갖는다. 문제는 내적 운동이 아니라 이중의 작용, 즉 새로운 필요와 타인의 노동에 대한 착취이다. 이는 탈취의 단계다. 도덕적 종으로서의 인간과 특수 이익을 가진 개인이라는 이원성이 발전한다.

악의적 존재가 갖는 특수 이익은 집요하다. 정의의 목소리는 약하므로 그러한 이익에 복무할 것이다. 이로부터 가난한 자가 받아들인다는 것을 전제하는 부자의 속임수 제안, 곧 강제로 내세워진 정의가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사회계약론󰡕에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것인가? 계약은 속임수이다. 아무리 평등한 자들로 상정된 당사자들의 관계를 조정하는 정의를 방패로 삼는다 할지라도, 계약은 평등하지 않은 두 당사자 간에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계약론󰡕에서 정의는 구별되는 당사자들 간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것에 의해 이뤄진다. 사회 계약에 의해 산출된 것은 양도 불가능한 것이다.

󰡔사회계약론󰡕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본성상 우회 불가능하고, 어떠한 양도도 끼어들 여지가 없으며, 우리의 잘못된 이익에 의해 이용되지 않을 그러한 정의의 형태가 존재하는가? 사실 루소는 그러한 정의가 양도된다고 여러 차례 말하고 있다. 신민과 주권자 간의 관계는 악의에 대한 섬김으로 옮겨갈 수 있다. 국가 안에 부분적 결사들이 형성되는 것으로 족하다 등등.

따라서 그 자체로는 양도 불가능한 정의의 양도가 있을 수 있다. 일반의 행세를 하는 부분적 결사가 정의를 탈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두 당사자가 평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그 관계가 평등하다고 말해지는 정의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전개된 두 개의 발상이 󰡔사회계약론󰡕에서 재발견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 사회는 상호 간의 복종 관계 위에 정초될 수 없다. 모든 복종은 결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 결사가 별개의 두 당사자들 간의 관계로 나타나는 한, 계약은 기만일 것이다.


이는 사회 계약을 예고하는 논리적 입론인 셈이다. 이제 사회 계약은 결사의 계약으로 정의된다. 별개로 간주되는 두 당사자들 사이에 수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루소는 자신의 선학들에 대한 도발적인 풍자를 행한다. 루소가 그들에게 동의하는 것은 그들이 구상한 바와 같은 계약이 실제 사회의 토대라는 것이다(결사에 앞선 복종 등등). 그러나 루소가 말하듯이 엄연히 그것은 실제 사회가 본질적으로 기만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실제 사회는 더 이상 자유가 존재하지 않기 곳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는 그 원리에서 기만으로 인해 결함을 지닌다. 그래서 루소 자신은 그것을 원죄라며 비난한다. 그것은 인간의 도덕적 존재가 잘못된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다.



8.4. 이로부터 어떻게 벗어나는가?


1) 너무 늦은 것이 아니라면 정치적 행동, 곧 혁명을 통해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 제2부.

-<에밀> 제5부 : 각종 빚들을 없애버리는 데 만족하면서 어떤 대폭적인 변화도 꾀하지 않은 솔론에 비해, 소유를 집산화하고, 또 그를 통해 결함 자체를 소멸시켜 버린 리쿠르고스의 경우.

{국역본에서 해당 부분이 나오는 단락을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에게서 자연적 자유와 시민의 자유를 비교한 후, 우리는 재산에서 소유권과 주권을 비교하고, 사유지와 공유지를 비교할 것이다. 만약 주권이 소유권에 토대를 두고 있다면, 소유권은 주권이 가장 존중해야 할 권리다. 소유권은 개별적이고 사적인 권리로 남아 있는 한은 주권에게는 신성 불가침의 권리다. 그러나 소유권이 모든 시민에게 공통적인 것으로 간주되면 곧바로 그것은 일반 의지에 복종하게 되며, 이 일반 의지는 소유권을 무효화할 수 있다. 그리하여 주권자는 한 개인의 재산도 여러 개인의 재산도 건드릴 어떤 권리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주권자는 리쿠르고스 시대의 스파르타에서 그러했듯이, 합법적으로 모든 사람의 재산을 독점할 수 있다. 그 반면에 솔론에 의한 부채 탕감은 불법 행위였다.” 이용철ㆍ문경자 옮김, <에밀 또는 교육론>, 2권, 한길사, 2007, 482쪽.}

-<사회계약론> 제8장.


2) 혁명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너무 늦어버렸다. 가정 교육의 길이 남는다.


교육은 퇴락과 잘못된 이익을 소멸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2가지 방법, 즉 쥘리의 방법인 미덕과 볼마르의 방법인 지혜가 있다.


이는 가정의 수준에서 개인과 도덕적 종 사이의 화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은 주관적이고 부정적인 것이다.

이 자체로는 충분치 않은 화해인데, 왜냐하면 사회적 삶은 내가 그것을 피한다 할지라도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개인과 도덕적 종 사이의 실정적이고 객관적인 화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는 사적인 교육 다음에야 가능하다. 사적인 인간이 시민을 재창출할 수 있을 것인가? 계약은 자연에 속한 인간, 즉 󰡔에밀󰡕에 따른 양성된 인간을 전제한다.


그런데 <사회계약론>에도 자연 상태에 대한 암시들이 있다. 제1부 6장과 8장.


<에밀>의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에밀은 시민이 될 수 있는가? 즉 “동료 시민들과의 시민적 관계”를 이룰 수 있는가? 바로 이때 루소는 에밀에게 자연 상태에 관해 성찰해 볼 것을 권한다. 따라서 그러한 성찰이 사적인 인간에서 사회 계약의 시민으로의 이행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유비 관계가 있는 것이다.

자연 상태의 인간 – 시민적 인간

자연 상태 – 사회 계약

이러한 성찰의 본질은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정의가 양도 가능하지 않은 계약의 가능성이 나오는 것이다.



9. 루소 저작의 통일성 (II)



확실히 자유는 루소 저작 속의 영속적인 항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유는 항구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자유가 통일의 요인일 수 없는 것이다.

통일성을 만드는 것은 개인과 인간 종 사이의 관계의 문제이다. (칸트의 해석은 이것이다.)


- 신체적 종과 신체적 개체성 = 아름다운 조화.

- 발생론적 관점

신체적 수동성에서 신체적 활동성으로

신체적 활동성에서 도덕적 종으로

-  도덕적 종으로서의 인간, 그러나 개인과 종의 단절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상호 간에 벌어지는 사기

- <신엘로이즈> : 스스로에게 행해지는 사기

- 개인과 도덕적 종 간의 주관적 통일성을 재창출하는 도덕적 의지의 행위

: <고백>과 <신엘로이즈> 제2부

-  개인과 도덕적 종 간의 객관적 통일성을 창출하는 정치적 행위의 규정 : <사회계약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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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omadist.tistory.com/521

 

실재의 정치 : 들뢰즈의 루소 강의_두번째








질 들뢰즈 / 황재민 옮김 



타자기로 친 들뢰즈 루소 강의록 (생클루고등사범학교 도서관 소장)




2. <신엘로이즈> : 미덕, 객관성, 위계적 단계들



루소가 골몰한 것이 정치 제도들이긴 하지만, 루소의 계획에는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어떤 주제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쓰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루소가 그 책에 붙일 제목은 “감각적 도덕 또는 현자의 유물론”이었다. 책은 물론 미완으로 그쳤지만, 우리는 그러한 발상을 <신엘로이즈>에서 접해 볼 수 있다.


뷔르줄랭의 가설 : <신엘로이즈>의 주인공들 속에서 파이드로스 신화에 대한 예증을 볼 수 있다. {Burgelin, Pierre (1952). La philosophie de l’existence de Jean-Jacques Rousseau. PUF.}

생프뢰 : 검은 말

쥘리 : 마음/의욕 (coeur)

볼마르 : 지성 (noû̂s)


{<신엘로이즈>(서익원 옮김, 한길사, 전2권, 2008)의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난한 출신 성분을 가진 생프뢰가 귀족의 딸 쥘리의 가정교사로 들어온다. 생프뢰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데, 쥘리는 당혹스러워하며 그의 사랑이 잘못된 것임을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결국 쥘리는 생프뢰와 깊은 사랑에 빠진다. 생프뢰와 딸의 관계가 못마땅한 쥘리의 아버지는 생프뢰를 멀리 쫓아내고 볼마르와 결혼시키고자 한다. 생프뢰가 다시 찾아와 쥘리는 그와 뜨거운 사랑에 빠지게 되고 임신까지 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쥘리를 때려 쥘리가 유산에 이르게 된다. 한편 쥘리와 생프뢰 사이에 오고간 편지가 쥘리의 어머니에게 발각되고 이로 인한 충격에 어머니는 병에 걸려 죽는다. 이후 생프뢰는 떠나고 쥘리는 볼마르와 결혼해 두 아들의 엄마가 된다. 몇 년 뒤 볼마르는 두 사람의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생프뢰를 가정교사로 불러들인다. 생프뢰는 쥘리에게 사랑을 갈구하지만 쥘리는 거부하면서 볼마르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남는다. 그러나 우연한 사고로 죽게 된 쥘리는 임종 직전 자기가 사랑한 유일한 이는 생프뢰임을 고백한다. ― 옮긴이}


루소가 보기에 쥘리와 생프뢰는 아주 잘 어울리는 한쌍이다. 왜냐하면 그 둘 모두 미덕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랑이 미덕을 지니는 것에 대해 장애를 이루는 객관적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쥘리는 그러한 갈등을 겪는다. 쥘리는 미덕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미덕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다. 그녀는 생프뢰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쓴다.

“저는 당신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덕에 대한 사랑이 볼마르에게 있기에 제 부모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식 날에 어떤 사실이 폭로된다. “우리를 둘러싼 여러 상황들은 변하게 마련이고 그러한 상황들이 또한 우리를 거슬러 우리 마음의 변용을 규정한다”(제3부 편지 20).

그런데 우리가 사악해질 수 있는 것은 그러한 특정한 객관적 상황들 속에서다. 어떻게 미덕과 사회의 이익을 조화시킬 것인가? “우리는 존재에 관련한 이익을 가지는 한에서 악덕을 가질 수 있고 사악해질 수 있다.”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변화를 바라는 것은 루소가 보기에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의 영혼(âme)은 객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


의지는 그 자체가 상황의 객관적 요소로서 개입함으로써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 쥘리는 볼마르가 죽는다 할지라도 생프뢰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정치 철학 상에서 아주 흔한 하나의 관념―곧 사람들이 사악하게 될 수 없는 상황을 창출하는 것―의 사적인 전위(transposition)이다. 흄에 따르면, 정치 철학의 문제는 정의와 이익이 화해할 수 있는 객관적 상황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적인 삶에서는 상황에 속한 객체적 요소로서의 강한 의지를 개입시키는 것이 된다.

볼마르가 가진 구상은 육체적 존재자를 실재(choses)에 복종토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쥘리와 생프뢰를 위한 치유책이다.

제4부에서 생프뢰는 이제 쥘리가 결혼해서 두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생프뢰더러 돌아오라고 청하는 것은 볼마르이다. 볼마르의 의도는 인간들을 관찰하는 것, 인간들을 실험하는 것이다. 볼마르는 애초 미덕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수로 그것을 잃어버린 쥘리가 치유되길 원한다.


편지 12 : 나무숲(Bosquet)의 치유법 (이 나무숲은 생프뢰가 쥘리를 껴안은 장소이자 그녀가 결코 다시 찾을 수 없었던 장소였다.)


“쥘리, 이제 이곳을 두려하지 마세요. 이곳은 이제 성스러운 곳이 아닙니다.” 달리 말해 고립된(désocialisé) 공간이 아니라는 얘기다.

편지 18 : 볼마르는 그들이 사랑을 나누던 당시 생프뢰가 추방당해 머물렀던 곳에 쥘리와 생프뢰를 두고 간다.

볼마르의 계획. 그들은 과거 속에서 사랑하고 있다. 지금의 쥘리는 그때의 쥘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제 미덕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프뢰는 그걸 알지 못한다. “그의 기억을 지워 버리세요. 그의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닙니다. (…) 생프뢰가 혼란에 빠져 잘못 생각하는 것은 시간을 혼동하는 데 따른 겁니다.” 생프뢰는 고착된 상태이다. (이는 정신분석학적 고착이다.)


- 볼마르의 계획은 결국 생프뢰가 이러한 고착을 자각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즉 그가 사랑하는 쥘리는 현재의 쥘리가 아니다. 자각을 통한 치유법인 셈이다. 그러나 볼마르는 여전히 쥘리가 아주 위험한 상태라고 생각한다. 자각으로는 치유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현재의 쥘리를 사랑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그가 가진 시간의 기억을 잃어버리게 하는 편이 더 낫다. 이렇게 되면 생프뢰 자신이 애지중지한 관념들을 다른 관념들이 교묘히 대체하게 됨으로써 그는 그러한 기억을 잊을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대체 조작인 셈이다. “저는 현재를 가지고 과거를 덮어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젊은 처녀 쥘리에 대한 사랑을 성인이 된 그 여성에 대한 지속적인 우정으로 대체하는 것이 문제다. 정신분석가들이 말하는 전이가 바로 이것이다.


관건은 상황을 변화시켜 미덕을 지닌 이가 되는 것이다. 현자는 미덕을 획득하기 위해 결정론을 피하는 자이다. 우리는 의지를 통해 상황을 바꿀 수 있다. 이것은 쥘리가 취한 방법이다. 볼마르는 상황 자체 속에서의 실행을 더 선호한다. 전이를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자의 유물론이다.)

루소는 “고결한 영혼”이 취하는 위계적 단계들이라는 구상을 내놓는다. 상이한 그 네 가지 단계들은 아래와 같다.


1) 영혼의 기원적 선함

2) 자연적 선함 또는 미덕에 대한 사랑

3) 미덕 그 자체

4) 지혜



2.1. 단계 1 : 영혼의 기원적 선함


이는 자연 상태에서의 영혼의 선함을 말한다. 이러한 선함의 긍정은 결정론의 긍정과 구별되지 않는다. 즉 상황들이 우리의 변용을 규정한다. 영혼은 무엇보다 느끼는 능력이다. 이성이 아니다.

우선 분명한 것은 이것이 자연적인 “실재들에 대한 의존”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긍정은 자연 상태에서 우리의 모든 변용들이 선하다는 것이기에, 곧 객체에 적합하다는 것이기에, 기원적 선함에 대한 긍정을 끌고 온다. (달리 말해서 이는 실재성 = 완전성이라는 개념화의 자연주의적 옮겨 쓰기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은 선함 속에서 각자는 자기에 대하여 전체로 존재한다. 선함이란 곧 실존의 감정을 가진 일자를 이룰 뿐이다. 그렇지만 기본 능력들의 차이에서 오는 영혼의 자연적 다양성이 있다.

쥘리의 영혼 : 활력, 상태를 변화시키는 데서의 안이함, 내면적 감수성.

생프뢰 : 내면적 감수성. 약한 영혼.

볼마르 : 감수성 부족. 냉철한 영혼, 이성에 대한 취미.

클레르 : 충동적. “광적인 사람.”

그럼에도 각각의 영혼은 기원적 선함을 갖는다. 이 수준에서 가능한 사악함은 없다. 왜냐하면 직관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의 이러한 유형에 따라 각각의 영혼은 자연의 질서 속에서 자리를 갖는 것이다.



2.2. 단계 2 : 자연적 선함 또는 미덕에 대한 사랑


이는 사악함의 발생이라는 문제와 관련 있다. 사회가 등장함과 함께 비로소 악덕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 상황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의 선함을 가로막고, 우리 안에 사악함에서 오는 이익이 펼쳐지도록 하는 새로운 관계들이 사회와 더불어 나타난다.

이 새로운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실재와 더불어 있는 각자의 자기에 대한/대자적 관계였다. 사회가 창출하는 의존 관계는 서로서로에 대한 것이다. 각자는 더 이상 전체로서가 아닌 상대방으로 취급된다. 이는 유년기부터 시작하는 관계이다. 잘못 자란 아이란 남들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법을 배운 아이다. “남들이 순순히 응해주는 것을 하나의 권리로 만들어냄으로써 아이들은 거의 태어남과 동시에 자연 상태에서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신엘로이즈> 제5부 편지3. {서익원 옮김, 한길사, 제2권, 2008, 235쪽.}


<에밀>의 목표 : 의지에 대한 의존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의존인 교육을 되찾는 것.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이 실재들에 대해 무기력하다는 것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사회와 더불어 각자는 항상 누군가에 대해서 주인이 되고 노예가 된다. 이러한 인위적 관계가 바로 악덕을 발생시킨다. 이제부터는 사악함에 대해 이익이 걸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원적 선함은 존속한다. 자연적 선함이란 곧 이와 같은 새로운 관계들 하에서 존속하는 한에서의 기원적 선함이다.


- 정도 차가 존재한다. 잡다한 사회적 관계들에 의해 기원적 선함이 지워진다. (이런 의미에서 고독을 좋아하는 것이 곧 선함의 기준이다.)

- 중간 매개들이 존재한다. 선한 영혼은 자신의 사회적 관계들을 경계하고 선별한다. 그러나 선한 영혼은 상황으로부터 허를 찔릴 수 있으며, 결정론에 떠밀려 자기 자신의 선함에 반작용할 수 있다. (이것이 자신의 경우라고 루소는 말한다.)

미덕에 대한 사랑이란 곧 상황을 무릅쓰고 자신의 선함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적 선함은 미덕이 아니라 미덕에 대한 사랑이다.

이것이 <신엘로이즈>의 문제이다. 쥘리는 아주 선하다. 그의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객관적인 사회적 상황들 탓에 그녀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서는 생프뢰를 사랑할 수 없다. 그녀를 사랑함에 있어 생프뢰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남은 것은 바로 미덕에 대한 사랑뿐이다.



2.3. 단계 3 : 미덕 그 자체


이는 미덕에 대한 사랑이 사악함에서 오는 이익보다 우세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즉 미덕이란 미덕에 대한 사랑을 실현하는 수단인 것이다. 「소피에게 보내는 편지」 참조. “우리는 잡다한 인위적 관계들에 힘 쏟으면서 선함을 잃어버린다. 그때까지 나는 선했다. (…) 이제 나는 미덕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루소는 투쟁으로서의 미덕의 효능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그는 미덕에 대한 사랑과 이익 간의 투쟁에 대해선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 결말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운 것이다. 미덕은 “항상 전쟁 상태이다.”


- 이때 투쟁은 플라톤적 도주(쥘리)나 스토아학파적 도주(에드워드 경)라고 할 만한 까다로운 투쟁이다. 왜냐하면 물리쳐야 할 적이 이성 그 자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쥘리는 결혼 이후 또 하나의 방법을 찾는다. 직접적 투쟁은 더 이상 아닌 의지를 통한 상황의 변환이 그것이다. 즉 간접적으로 악덕을 제거해야 한다. 루소는 이 경우에도 회의주의적이다. 의지가 상황 속에 개입한다 하더라도, 무엇이 변화가 확정적임을 보증할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쥘리는 실패한 것이다.

스토아주의와 기독교의 오류는 의무와 미덕을 과장한다는 데 있다.

“지혜는 우리의 의무가 지닌 난점을 떨쳐 내는 데 있는 것입니다. (…) 무릇 탁월한 자란 선행을 하는 자가 되는 데 만족함으로써 미덕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그런 필연성 속에 머물지 않는 법이죠.” (Lettre de janvier 1764 à Carondelet.)



2.4. 단계 4 : 지혜


미덕은 상황이 그것을 요구한다는 그러한 틀 내에서의 투쟁이다. 지혜는 미덕이 무익한 상황들을 창출한다. 오직 지혜만이 루소가 꿈꾼 우리 안에서의 미덕과 이익 간의 통일의 재창출로 이끌 수 있다.

지혜는 향락/주이상스(jouissance)와 분리할 수 없다.

지혜는 무엇보다 볼마르의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의지가 아닌, 상황 자체 속에서 실행되는 선별에 기대는 것이다. 곧 시간과 장소의 선별이다.


시간 : 현재를 가지고 과거를 덮어버리기.

장소 : 성스러운 곳을 친숙한 곳으로 만들기.

“진정한 행복은 내가 있는 곳에 내가 온전하게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성립한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루소가 강조하는 것은 실존의 감정이다. 우리의 불행은 우리가 미래를 과거를 소환해서 미래를 예상한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항상 지속하면서도 자신의 지속을 표시하지 않고 연속의 감정이 없는” 현재를 살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실존의 감정 : (“신처럼 자기에 대하여 만족한다는” 이유에서 영원성, 신적인 상태와 닮은) 스쳐가는 순수 현재.


볼마르는 현재의 요소들을 선별하려고 한다. 이행으로서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 바로 그러한 계기에서 대체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러한 선별의 방법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까지 이어진다.

이 수준에서 존재하는 것은 시간을 이식시키는 객체들의 선별이 아니라, 객체들의 모든 연속을 박탈당하는 시간이다. 이렇게 실존하기의 수월함이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에 우리는 실재들에 대한 의존 관계를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루소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에 가서 이러한 의존에서 해방되어야 함을 긍정한다. 또 공백을 창출해야 함을 긍정한다.

현자의 유물론에서 관건은 상황의 결정론을 이용해 그로부터 풀려나는 것이다. 볼마르는 객체들을 통제한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방법일까? (<신엘로이즈>의 결말 부분을 참조할 것.)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루소는 행복을 위해서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루소는 그것을 대신해 객체들이 우리에 대해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경우에 시간의 순수 이행과 일치할 수 있게 하는 몽상을 내세운다.

<고백> 제9권 : 루소는 자신의 책 “감각적 도덕”에 담길 테마들을 여기서 되풀이하고 있다.



3. <사회계약론>과 <에밀>은 평행하다



시민이라는 평면 위에 있는 <사회계약론>은 사적인 평면 위에 있는 <에밀>과 평행을 이룬다. (교육가와 입법가도 평행하다. 루소는 이들이 신화적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이들이 현실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미덕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사회계약론>과 <에밀> 사이에는 본질적 연속의 관계가 있다. <사회계약론>은 교육 받은 양성된 사적인 인간을 전제한다.


<에밀>에서 루소는 세 가지 교육이 있다고 말한다.

- “우리가 가진 능력들 및 기관들의 내적 발전”으로서 자연에 관한 교육

- 자연의 “그러한 발전에 관여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관례(usage)”로서 인간에 관한 교육

- 실재들에 관한 교육

<에밀>의 흐름에서 보면, 이러한 교육들은 두 가지로 축소된다.

- 가정 교육 내지는 자연에 관한 교육

- 각각의 인간이 당사자로서 관계들을 맺는 것과 관련된 공교육


첫 번째 교육은 하나의 전체로서의 인간을 고려한다. 따라서 이는 자연인에 대한 교육이다. 이때 자연인이 관계 맺는 것은 실재들 및 동류들인데, 이들 각각은 대자적 전체를 이룬다.

두 번째 교육은 시민으로서의 인간을 고려한다. 즉 다른 당사자들과 관계하는 당사자로서의 인간.

이 두 가지 교육은 모순된다. 현행하는 사회 안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원하면서 그 어느 것에도 가닿지 못한다. 곧 “인간도 아니고 시민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본성의 차이를 의식해야 한다. 루소의 말 : 이제 공교육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적 교육의 길로 들어서야 하며,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일단 그 끝에 이르게 되면 공교육의 재창출이 가능한 것인지를 묻게 될 것이다. 요컨대, <사회계약론>은 <에밀>을 전제한다.



4. 자연 상태



이는 전(前)사회적ㆍ전(前)정치적ㆍ전(前)시민적 상태이다. 이 자체는 새로운 관념은 아니다(홉스 참조). 어째서 전(前)사회적인 것으로 나타나는가? 평등과 독립의 상태이기 때문이다(<인간 불평등 기원론> 참조). 그러나 루소는 자신의 독창성을 여기서 구하지 않는다. 루소는 자연 상태를 분산으로 정의한다.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 주석 12{김중현 옮김, 펭귄클레식 코리아, 2010, 165-171쪽}에서 자연 상태의 부부 관계 문제에 관한 로크의 입장을 비판한다. 로크에게는 아이가 혼자만의 상태를 벗어날 때까지는 자연적 인연이다. 루소가 보기에 로크는 문제인 것을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연 상태에서 남녀의 동거를 전제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연 상태는 우연한 마주침들의 상태이다. 루소에게는 이러한 고립이야말로 자연 상태를 평등과 독립의 상태로 설명할 수 있게 한다. 평등과 독립은 분석의 귀결점인 것이다.)


어떤 점에서 홉스와 멀어지는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이고 토미즘적인 관점에서 자연적 질서는 완전성의 질서 같은 것이다. 사회성은 자연적 질서의 일부를 이룬다. 홉스에 와서는 더 이상 완전성의 질서가 문제되지 않고 필요와 욕망이라는 힘들로 이뤄진 기계 장치가 문제된다. 따라서 자연권이란 곧 자신의 세력이 미칠 수 있는 한에서 욕망을 실현하기이다. 권리는 의무와 달리 원초적이고 자연적이다.

이러한 관점은 어떠한 의존 관계도 배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전통에 대한 반발이라고 볼 수 있다. 곧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다. 평등은 힘이 불평등한 가운데 존재하는 상호 간의 평형 속에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가장 강한 자도 언제라도 자신보다 강한 자를 만날 수 있고, 가장 약한 자도 가장 강한 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는 강할 수 있다.

자연 상태는 사회적 삶을 함축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 것으로 충분한가? 홉스에게 사회적 삶은 권위, 곧 권력에 대한 의존을 함축한다.

자연 상태는 시민적 상태로서의 사회를 배제한다. 그러나 또한 독립적 개인들이 이루는 관계들의 총체로서 자연적 사회를 허용하는 사회성(그로티우스)도 배제한다. 사회성이 있다면 그것은 이성을 가진 인간들 간의 자연적 동일성에서 유래할 것이다. 푸펜도르프가 말하길 “자연 상태와 사회적 삶은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은 완전하게 형성된 이성이 즉각 주어진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런데 홉스에게는 이성의 발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루소는 홉스에 반대해 홉스의 자연 상태가 기대고 있는 그러한 복합적 정념들에 대한 발생도 요구한다. 홉스의 인간은 루소에 따르자면 역사적으로나 생겨나야 할 몇 가지 능력들을 “남용”하고 있다.

루소는 문제가 제기되는 평면을 변화시킴으로써 홉스가 맞이한 난점들을 모면하는 것이다. 분산 테제를 받아들인다면 그런 부류의 문제는 더 이상 맞이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자연 상태에서는 모든 사회 형태가 필연적으로 배제된다.

홉스에게 필요는 서로를 가깝게 하는 것이지만, 루소에게 필요는 서로를 떼어놓는 것이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동시적으로 쓰였을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는 필요의 자연적 효과가 인간들을 분리시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전쟁 상태가 도처에 넘쳐났지만, 지상 전체로 보면 평화 속에 있었다.” 우연한 마주침들 속에서도 전쟁이 가능했지만 그것은 장소를 갖지 않았다. “이는 황금시대였는데, 인간들이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소가 가진 스토아주의적 토대 : 필요란 분리시키는 것이다. 필요는 자기 충족(auto-suffisance)으로 정의된다. 자연적 필요는 육체적으로 필수적인 것으로 제한되며, 그 필요를 느끼는 자가 가진 힘을 넘어설 수 없다. 우리의 필요는 우리의 힘에 비례하며, 우리의 힘도 우리의 필요에 비례한다. 상호적인 조절이 있다는 말이다(<에밀> 제2부 참조).

따라서 자연 상태는 힘과 욕망의 균형(équilibre)이다. 홉스에게는 만물에 대한 권리(jus in omnia)이 있다. 이에 대해 루소는 ‘아마도’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경우 각자는 자신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것만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곧 그를 끌어당기고 그가 다다를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무제한적 권리이다. 그러니까 이 권리는 자연 상태에서 사실적으로 제한되는 것이다. 루소는 이러한 자연 상태를 아타락시아에 비유한다. “각자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전체이다.”

자연권의 기초는 연민에 의해 절제된 자기애(amour de soi)이며, 이것이 균형을 낳는다.



5. 루소에게서 ‘자연’의 의미



루소에게 자연적이라 함은 무엇보다 ‘시초의’ 또는 ‘근원적’의 의미이다.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이나 “시초의 인간” 등에서 그렇다. 여기서는 사회성을 내포하지 않는다.

두 번째 의미는 「사부아 보좌 신부의 신앙 고백」에 나온다. “인간은 본성상/자연적으로(par nature) 사회성이 있다. 아니면 최소한 그렇게 되려고 만들어졌다.”

자연 상태에서의 사랑은 사소한 일이므로 쥘리와 생프뢰 간의 사랑과 비교된다. “우리의 영혼은 서로를 위하도록 만들어졌다. 자연이 바라는 바다.” (<신엘로이즈> 제3부 편지 11)

“만약 사랑이 퍼진다면, 자연이 이미 그리 선택했기 때문이다. (…) 이것이 자연에 속한 신성한 법이다.” 이를 어겼다가는 벌을 받을 것이다.

가족 같은 느낌은 습성, 즉 마치 두 번째 자연/본성처럼 형성되는 하나의 발전을 필요로 한다.

자연적인 것은 더 이상 시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원에서부터, 또한 기원 속에 잠재적으로 포함돼 있는 방향들을 따라 형성되는 발전이다.

이와 연관된 것이 루소에게서 “자연법”의 문제이다. 많은 경우 문제되는 것은 자연 상태에 군림하는 법이 아니라 “자연인”, 곧 근원적 상태 속에 기입된 잠재성의 발전 법칙을 따른다고 가정되는 한에서의 인간의 발전을 지배하는 법이다.

<에밀>에 나오는 “가정” 교육 또는 “자연” 교육은 자연에 관한 교육(우리가 가진 능력들 및 기관들의 내적 발전)과 실재에 관한 교육(우리를 변용시키는 객체들에 대한 경험으로 형성되는 습득)을 포함한다.

따라서 자연인은 양성되고 교육 받는 한에서의 인간이다. <에밀>은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l’homme à l’état de nature)을 자연인(l’homme naturel)에 이르게 한다고 여겨진다.

루소에게서 의식, 이성은 사회와 사회성과 마찬가지로 많은 경우 “자연적”이라고 말해진다.

악덕의 계보학과 이성의 발생에 관해 <보몽에게 보내는 편지>를 참조할 것. 이성은 그것이 아무리 자연적이라 할지라도 자연 상태에서 출발하는 발전을 요구한다. <주네브 수고(사회계약론 초고)>에는 자연 상태에 관한 장이 있었는데 <사회계약론>에서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이 장이 상이한 문제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회계약론>은 자연인을 전제한다. <사회계약론>의 문제는 인간에서 시민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이지, 사적인 인간으로서의 자연인이 아닌 것이다.

완전화 가능성(perfectibilité)이라는 통념 : 자연 상태는 잠재 역량들(potentialités), 잠재성들(virtualités)로 가득찬 발생론적 요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발생론적인 계통은 악덕의 발생에 의해 변질된다. 이는 우발 사건인가, 필연성인가?

루소는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이 지닌 특성들을 찾아내기 위해 분석적이고 역진적인 방법을 채택한다. 원리를 찾아내야 할 필요성에서다. 우리는 무엇을 정의하고자 하는가? 자연 상태를 여러 능력들이 현행하는 상태로서 정의할 수는 없다. 그것은 잠재적ㆍ발생론적 상태로 정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기애와 연민은 그 잠재성들이 발전되지 않은 정념의 상태이다. <에밀> 제4부를 참조한다면, 우리는 연민이 잠재적 사회성을, 자기애가 타자들에 대한 사랑을 가득 품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분석적 방법은 역학적 원리, 곧 현행적인 것에서 잠재적인 것으로의 역진 없이 자연 상태에 대한 정의에 이를 수 없다. 루소의 선학들이 가진 분석적 방법으로는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신엘로이즈>에서 말하는 바대로 “자연이란 곧 그 속에서 읽는 법을 배워야 하는 한 권의 책이다.” 우리가 만약 해독할 줄 모르는 상태라면 분석하기로는 충분치 않다. 현행적이고 형성된 모든 것은 자연 상태 바깥에 있다. 루소 이전에는 야생인과 시민적 인간에 대해서만 말해온 것이다. 발생이란 정확히 자연 상태에 속한 잠재성들의 활동으로의 이행이다. 자생적 이행은 없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나오는 바대로,

- 능력은 그것이 필요나 이익에 부응하지 않을 경우 발전되지 않는다.

- 필요는 상황에 의해 규정되지 않을 경우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의 상태는 다음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

- 객관적 정황들

- 이 객관적 정황들이 규정하는 필요들

- 이 필요들의 충족에 필요한 주체적 능력들


예컨대, 파롤은 사회 상태를 전제한다.

루소가 보기에 자신의 선학들은 그러한 능력들이 이미 형성되어 주어진 것으로 보고, 그 다음 그로부터 상황들을 도출하면서 원인들의 순서를 오해한 것이다. (가령, 인간이 말을 한다. 따라서 인간은 사회 속에 산다.)

그와 달리 루소에게는 그 능력들이 발생을 갖는다. 만약 인간이 이미 완전하게 형성돼 있는 능력들을 가진다고 하면, 그러한 능력들을 이용할 필요를 갖지 않을 것이다.

루소는 자연 상태를 전쟁 상태로 만든 홉스를 비판한다.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은 전쟁 상태 속에 존재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행은 이렇다. 즉 공격성이라는 능력이 주어져 있다고 치자. 그것은 어떤 이익을 전제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이익은 어떠한 상황을 전제하는가?

- 법적ㆍ객관적 문제 : 폭력이라고 다 전쟁은 아니다. 전쟁은 상태들 사이의 관계와 일정한 지속, 그리고 힘을 수단으로 해서 가정된 손실의 보상을 얻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그 목표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은 소유를 전제한다. “전쟁을 구성하는 것은 인간들이 아닌 실재들 간의 관계이다.” 

따라서 전쟁 상태는 사회를 전제한다.

이익이라는 주체적 문제 : 인간적 이익/이해관계(intérê̂t)인 자존심(amour-propre)은 마찬가지로 사회 상태를 전제한다.


여기서는 <반뒤링론>을 참조할 만하다. 엥겔스는 여기서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채택된 변증법적 방법을 칭송한다. 사실상 엥겔스는 홉스를 마주한 루소의 상황 속에서 뒤링을 대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금요일을 노예를 만들기(asservir) 위해 로빈슨은 무엇을 이용하는가(se sert)? 그것은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구성된 사회 상태일 수밖에 없다. 미국의 주인들은 자신들의 노예들을 면 생산에 매이게 한다(asservissent).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5권, 박종철출판사, 1994, 182-183쪽 : “그렇지만 뒤링 씨의 이 전능한 “폭력”을 좀더 자세히 고찰해 보도록 하자. 로빈슨은 “손에 검을 쥐고” 프라이데이를 예속시킨다. 그는 이 검을 어디서 구하는가? 로빈슨 이야기에 나오는 환상의 섬들에서도 아직 검이 나무에서 열리지는 않으며, 뒤링 씨는 이 물음에 대해서 아직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다. 로빈슨이 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프라이데이도 어느날 아침에 장전된 권총을 손에 쥐고 나타나리라고 가정할 수 있으며, 그 경우에는 “폭력”-관계 전체가 뒤집힌다.”}



6. 자연 상태는 현실인가, 허구인가?



ㆍ이 문제가 중요성을 가지는지는 다소 의심스럽다. 몇몇 이들은 이 문제에 중요성을 부여하는데, 거기엔 기초와 기원을 구분하는 칸트의 역할이 있었다.

ㆍ루소의 선학들에게서 자연 상태는 기초임과 동시에 기원이다. 홉스에 입각해 보자면 자연 상태는 전(前)사회적 삶으로 간주된다. 자연 상태는 어떤 의미에서는 허구적인데, 왜냐하면 인류가 거기서 스스로를 발견했던 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상황들에서는 현실적이다. 홉스에게 시민적 전쟁은 그러한 상황들 가운데 하나이다.

ㆍ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는 이와 관련한 서너 군데의 대목이 있다. “사실들 일체는 제쳐놓고 시작해야 한다.” “반성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을 관찰이 확증하는 것이다.” “자연 상태라는 가정.” “아마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고, 십중팔구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상태.”

- 자연 상태는 관찰의 사실이 아니다. 자연 상태는 요람기도 아니고 야생의 상태도 아니다.

- 인용문들의 맥락 : 여기서 “사실들”은 경전이 증언하는 사실들이다. ‘일정한 능력들을 갖추고 창조된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 자연 상태는 결코 문제 설정의 방식으로 정립되지 않는다. 가설적인 것으로 정립되는 것은 바로 자연 상태와 현행 상태 사이에 일어나는 것, 즉 모든 중간 매개들이다. 두 끝은 현실적인 것으로 주어진다.

자연 상태는 인간을 형성하는 운동의 출발점으로서 현실적이다.

자연 상태에서 출발하는 발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발생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한 가지 방식을 제안한 것이다.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이나 <풍속의 역사(Histoire des mœurs)>(에두아르트 푹스)는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관점은 동일하다. <에밀>은 아이의 관점에서 발생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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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정치

: 들뢰즈의 루소 강의





질 들뢰즈 지음 / 황재민 옮김

 




 

< 옮긴이의 말 >

1. 이 번역 연재물의 원전은 들뢰즈가 1959-1960년 소르본대학에서 행한 루소 강의를 요약해서 기록한 문서이다(생클루고등사범학교 도서관 소장(문서번호 CI 12167)). 27쪽짜리 타자본 문서인데, 기록 자체는 들뢰즈가 한 것 같지 않다.원본 파일은 http://www.webdeleuze.com/php/texte.php?cle=232&groupe=Rousseau&langue=1에서 구할 수 있다.

2. 옮긴이는 아르옌 클레인헤렌브링크(Arjen Kleinherenbrink)가 영역한 문서도 참조할 수 있었다. 해당 파일을 구해다 준 김상운 선생님과 전주희 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영역본은 불어 원본과 쪽수는 물론 글씨체까지 비슷하게 편집한 축자적 판본과, 영역자가 논문 형태로 좀더 체계적으로 절을 구분하고, 단락 및 문장의 완성도를 높이고, 주석 처리를 하는 등으로 다소 양이 늘어난 (리좀론적) 확장판 두 가지로 이뤄져 있다. 옮긴이는 불어 원본에 최대한 충실하게 번역하되 내용 및 표현을 최대한 분명하게 한다는 태도로 확장판 영역본도 자유롭게 활용했다. 절 구분도 영역본을 따랐으며, ‘실재의 정치’라는 제목도 실은 영역자의 것이다(A Politics of Things).

3. 원어 병기는 괄호 ( ) 안에 넣었다. 원문 고유의 괄호와 헷갈릴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개입은 어디서든 중괄호 { } 안으로 묶는다. 대개는 주석에서 국역본 출전을 가리킬 뿐이다.

4. 호치키스 한번 철할 만한 짧은 문서이지만 총 4회에 걸쳐 나눠 실기로 한다. 전체 차례는 아래와 같다.



< 차 례 >

영역자 서문

1. 세 가지 자연 상태 개념

2. <신엘로이즈> : 미덕, 객관성, 위계적 무대들

2.1. 무대 1 : 마음의 근원적 선함

2.2. 무대 2 : 자연적 선함 또는 미덕에 대한 애정

2.3. 무대 3 : 미덕 그 자체

2.4. 무대 4 : 지혜

3. <사회계약론>과 <에밀>은 평행적이다

4. 자연 상태

5. 루소에게서 ‘자연’의 의미

6. 자연 상태는 실재인가, 허구인가?

7. 루소 저작의 통일성 (I)

8. 어떻게 자연 상태를 벗어나는가?

8.1. 자연 상태에서 야생의 상태로

8.2. 도덕성과 자유의 도래

8.3. 기만, 사악함, 소외

8.4. 어떻게 벗어나는가?

9. 루소 저작의 통일성 (II)

10. 사회 계약

10.1. 주권자는 환원 불가능하다

10.2. 주권자는 어떻게 분할 불가능하게 되는가?

10.3. 계약의 실정적 특성은 무엇인가?

10.4. 의무, 총체성, 순간성

10.5. 왜 주권자가 일반 의지를 구성하는가?

10.6. 일반 의지는 무엇을 원하는가?

10.7. 루소의 시민법 이념




영역자 서문



들뢰즈는 1959년과 1960년에 걸치는 1년치 학기를 자크 루소에 할애했다. 루소라면 들뢰즈의 유명한소수적철학 영웅들 가운데 거론됐던 이름은 아닌 같다. 아닌 아니라 들뢰즈와의 깊은 연관을 드러내기에는 루소가 가진 대체적인 인상이 너무 낭만주의적이고, 너무 귀족풍이며, 지나치게 국가 사상가다운 데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온라인 공간을 통해 구해 있는 27쪽짜리 타자 기록 강의 요약본이 시사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문서는 들뢰즈와 루소 사이의 놀라운 마주침의 기록이다


여기서 들뢰즈는 정확히 발생잠재성현행성 사상가로 루소를 변환시킨다. 알다시피 가지 개념은 들뢰즈 자신의 사유에서도 핵심을 이루는 것들이다. 이러한 연관 내지 변환이 1962 출판된 들뢰즈의 유일한 루소론에서는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이처럼 들뢰즈가 루소 안에서 간파해낸 내적 구조가 드러나지 않고 있기에 강의 요약은 우리가 기댈 있는 유일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들뢰즈와 루소의 마주침이 루소를 읽는 이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들뢰즈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도 얼마만큼 유의미할 있는지에 관해 간단히 짚어 보고자 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들뢰즈의 손에 맡겨진 루소가 무엇이 되는가 하는 물음부터 던져 보자.


들뢰즈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루소의 작업은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문제는 자유의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사회의 이익을 미덕과 조화시키는 문제이다(p.3). 그것은 개체적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해소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p.18). 상이한 수준들에서 존재하는 바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쏟은 단일한 노고로서 루소의 저작을 읽어야 한다. <신엘로이즈>와 관련해서 보면 문제는 가지 상이한 무대들과 얽혀 있다. 번째는 마음의 근원적 선함이라는 무대이다. 그것은 실재들(things) 대해, 온전한 자체의 존재를 갖는 각각의 존재자 실존의 감정을 지닌 존재자에 대해 의존 관계를 갖는 상태이다. 이는 어떠한 사악함도 가능하지 않은 상태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따가 알게 것인바, 이러한 상태는 현행 상태들의 발생 낳는 잠재적 출발점으로서 사유되어야만 한다. 번째 무대는 마음의 자연적 선함이다. 바로 지점에서 사람들이 맺는 관계들 속에 사악함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근원적 선함이 존속하는 가운데 미덕에 대한 사랑, 여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선함을 유지하려는 욕망이 출현한다. 결과, 번째 무대로서, 미덕을 악해진 존재자의 이익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야기된다. 이때 들뢰즈가 언급하게 되는 것이 바로현자의 유물론이다. 현자의 유물론은 인간 존재자들이 변화할 있도록 실재들 상황들 사용함에 있다. 마지막 번째는 지혜의 무대, 실존의 수월함을 발견하는 회복의 무대이다. 이는 실재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해방되어 어떤 공백으로 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몽상 무겁게 내포하는 바는 무대가 비록 최종 무대라고는 해도 불충분하게 남는다는 사실이다. 보다 나중에 계기에서 확정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들뢰즈가 다음으로 주장하는 바는 위와 같은 무대가 <에밀>과 <사회계약론>에서 공히 발견된다는 점이다. 들뢰즈는 작품을 2 제단화(二連祭壇畫)처럼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회계약론>과 <에밀> 사이에는 본질적 연속 관계가 있다. 계약이란 교육을 받은 양성된 사적 인간을 전제한다.” 우리는 분산 사회의 완전한 부재로 특징지어지는 사회 이전의 자연 상태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개인들은 전체와 동일한 것이 된다. 누구도 다른 이들에 대하여 명의 개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구별해내려고 하지 않는 까닭이다

사악함이란 오직 사회적 수준에서만 생겨나기 때문에 이러한 자연 상태는 선악을 넘어서라기보다 선악 이전에 존재하는 상태라고 있다. 게다가 들뢰즈-루소는 이러한 상태가 결코 현행화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전한다. “자연 상태는 역량과 잠재성으로 가득찬 발생론적 요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자연 상태는 관찰의 사실이라기보다는 현행하는 사회의 초월론적 조건에 가까운 것이다.


번째 무대는자연인또는사적 인간 무대다. 이러한 인간의 발전은자연법”(이는 분명 잠재성들이 현행화되는 과정을 가리킨다는 들뢰즈의 설명이다) 지배된다. 번째 무대는 <에밀>에 나오는 자연과 실재에 관한 가정 교육, 의식, 이성, 사회, 사회성을 싹트게 하는 그것과 관련 있다. <신엘로이즈>에서는 악덕의 발생도 함께 나타나는데, 이는 번째 무대로 이끈다. 사회 상태의 타락이자 도덕적 인간의 타락이 동시에 도래하는 셈이다. 소유와 불평등은 부자에게 빈자가 예속되도록 만드는 기만적 합의를 양산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도덕성 정의감 역시 출현하는데, 이는 다시 앞선 무대에서 잠재적인 측면으로 있었던 것의 결과이다. 자연법은 타락한 사회에서 형성될 있다”(p.12).


마지막 번째 무대는 사회 계약의 무대이다. 계약은 <에밀>에 나오는 양성된 사적 인간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번째 무대에서 번째 무대로 향할 있는 것은 번째 무대로의 복귀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사적인 측면에서는 도덕적 의지의 행위가 개인적 종과 도덕적 사이의 주관적 통일을 복원해야 한다. 다음에는 정치적 행위가 객관적 통일을 실현하도록 해야 한다. 계약은 자유를 현행화한다. 자유는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진 못하지만 이미 자연 상태에서 현존한다. 전체로서의 인민이 주권자로의 전면적 양도를 발생시켜 신민/주체(subject) , 모든 것은 순간에 인민들에게 회복된다. 인민들은 개인 주체임과 동시에 주권자의 일원이다. 그들 모두는 일반 의지를 통해 스스로를 다스린다.


들뢰즈의 이러한 루소 논의에는 놀라운 결말이 있다. 들뢰즈는 우리에게 주권자란 순수 형식적 의미에서 자체만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달리 말해서 번째 무대가 완료된 후에 우리가 인식하게 되는 것은 어떻게 입법을 행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지, 무엇을 입법의 대상으로 것인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분명 가지 점을 덧붙여야 하는데, 그것은 실재들과의 관계 또는 인민이 처한 구체적 상황들과의 관계이다. “일반 의지는 법을 규정함에 있어 충분치 않다. 의지의 형식적 규정은 주어진 사회의 객관적 정황들이라는 내용과 결합되어야 한다”(p.26). 들뢰즈가 보는 입법가의 모습은 그러한 물질적 정황들의주입 의거한다. “입법가가 없다면 일반 의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형식적으로만 인식할 뿐이다. 그러나 또한 입법가는 물질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좋은 법은 특수한 인물들―곧 형식적 측면―을 고려함에 있다기보다는, 구체적 상황들―곧 물질적 측면―에 적응함에 있다”(p.27).


타자 원고에서 주목해서 봐야 측면은 무엇일까? 당연하게도 첫째는 루소가 무대에 오르는 방식일 것이다. 루소 사상이 지닌 본성에 관한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 루소의 사상 체계는 단일한 체계인가? 체계는 역설들로 똘똘 뭉쳐 있지 않은가? 아니면 그저 자체 안에 놓인 여러 긴장들만을 인정할 뿐인가? 그것은 적극적인 강령인가, 아니면 어떤 이상과 실패에 관한 명상인가? 등등. 들뢰즈는 시종일관 단호하다. 루소는 발생의 사상가, 잠재적 역량의 현행화의 사상가이며, 그렇기 때문에 루소의 모든 작업은 하나의 발생론적 노선을 따라 깔끔하게 정돈될 있다는 것이다

(시민) 종교에 관한 루소의 고찰은 무심하게 지나쳐 버린 격이었고, 알려진 입법가 교육가와 관련한 문제들(그는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그는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는가? 어떻게 그는 우리가 겪는 고난들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는가?) 실종돼 버린 셈이었다. 루소가 모든 글이 가지 무대들 그것들의 역동적 상호작용이라는 단일하고 엄격한 구조 위에 토대를 두었다는 것은 여전히 크게 의문을 가질 만한 사항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들뢰즈가 그와 같은 발상을 크게 지지할 있는 방식으로 펼쳐 나갈 있을지 확인해 보는 일은 흥미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들뢰즈 자신과 관련해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비록 루소는 이후 들뢰즈 저작들에서 거의 등장하진 않더라도, 원고는 들뢰즈 자체가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읽힐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들뢰즈의 정치 철학은 저항ㆍ탈주ㆍ국지성ㆍ소수파적 몸짓들 등에 거의 배타적으로 집중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것은 항상 국가에 맞선 전쟁 기계, 국왕들에 맞선 유목민들, 몰적인 것들에 맞선 분자적인 것들이다. ‘들뢰즈적 정치 이론 있다면, 가능한 한에서체계로부터 탈주하는 법을 일러주는 설명서일 것이라 주로 여겼다


하지만 루소 강의안은 하나의 뚜렷한 대안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발생ㆍ잠재성ㆍ현행성은 정의롭고 좋은 사회의 구축을 위해 자리한다. 우리는 현행하는 불평등의 상황에서 상황을 발생시킨 잠재적 조건들로 복귀한다. ‘선악 이전에존재하는 것으로서자연적 선함 항상 존속해왔다는 하나의 발견이 이뤄진다. 이러한 발견은 새로운 현행화(대항 현행화ㆍ재영토화) 기회를 제공한다. 이때까지는 결과가 형식적이다. 어떤 위계 속에서의 권력과 위세의 현행적 분배가 아닌, 실재들 집중할 있도록 하는 공백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때부터 인민은 진정으로 그들을 통일하는 그것에 집중하기로 결정하는데, 그것이란 바로 (미리 규정된 추상적 관념들이 아닌) 그들 자신이 직면한 상황들일 수밖에 없다. 사회가 이와 같다면,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현재를 미래로 열어놓을 것이다. 정의가 법체계와 동의어가 것이다. 목적론(과거를 미래로 투사하는 ) 전부 포기하고 실용주의와 구성주의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상황 속에 자체로 현존하는 실재들(기계들, 집합체들) 맞는 내재적 기준에 따라 행동할 있게 되기 위하여 모든 초월적 과잉코드화(overcoding) 가능한 많이 내던져 버릴 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들뢰즈 사상의 자구와 정신에 크게 조화를 이룬다. 게다가 <안티 오이디푸스>에 관한 입문서를 유진 홀랜드는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전체가 (야생적 사회ㆍ전제군주적 사회ㆍ자본주의적 사회 이후에) 창출 있는 번째 가능한 사회를 암시하고 있다고 이미 지적한 있다(Eugene Holland, 1999). 또한 휴즈가 최근 설득력 있게 논증한 바에 따르면, 들뢰즈의 흄으로의 복귀는 제도들을 구축하는 종별적 방식에 초점을 실정적인 정치 강령을 드러낸다(Joe Hughes, 2012). ‘도래할 인민이라는 통념에 관한 로널드 보그(Ronald Bogue) 저술에서도 강조되고 있는 것은, 개념이 비록 예술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수준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있다는 현실적 가능성을 표시한다는 점이다. 이제 강의록이 지닌 가장 커다란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있다


그것은 바로 단지 국지적인 수준에서 사회를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닌, 가장 규모에서 사회의 구축 사고하기 위해서 알려진 들뢰즈의 개념들을 전부 동원할 가능성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있을 것이다. , 들뢰즈가엄밀하게는 제안할 만한 정치적 강령이 있지는 않다 말한다 해도, 그것은 단지 사전에 내용 위계 규정하는 것에 대한 거부에 해당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러한 형식적 방법 관련해 들뢰즈적 원리들에 토대를 두었을 과연 사회는 무엇으로 나타나는가이다. 이런 점에서 특별히 흥미로운 일은 들뢰즈의 루소 재해석에 나타난 상쇄운동이라는 들뢰즈적 변주의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이다


운동은 타락한 집단(몰적인 , 국왕적인 , 국가)으로부터 사적ㆍ개인적 수준(탈영토화, 도주선)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이것이 완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집단이 나은 세계를 구축(재영토화, 대항 현행화, 도래할 인민) 있도록 하는 자신의 본성/자연에 관한 어떤 것을 배운 이후에 다시 사회적 수준으로 복귀해야 한다. 최소한 분명한 것은 사회가 가능한 모든 관념론들, 모든 선험적인 것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짐들을 내던져 버리려고 분투하는 사회라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그만큼 더욱 우리가 직면한 현실적ㆍ물질적 정황들에 참여하게 된다. 이제는 추상적 관념의 정치가 아니라 진정한 실재의 정치이다.



참고문헌

Bogue, R. (2006). Fabulation, Narration and the People to Come. In: Deleuze and Philosophy. Ed. Constantin V. Boundas. Edinburgh University Press

Burke, E. (1963) [1759]. Review of Rousseau’s Letter to d’Alembert. In: Edmund Burke: Selected Writings and Speeches. Ed. P.J. Stanlis. Garden City

Deleuze, G. & Guattari, F. (1983) [1972]. Anti-Oedipus. Trans. By R. Hurley, M. Seem & H.R. Lan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김재인 옮김,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2014.}

Deleuze, G. & Guattari, F. (1987) [1980]. A Thousand Plateaus. Trans. By B. Massumi.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김재인 옮김, < 개의 고원>, 새물결, 2001.}

Deleuze, G. (2004) [2002]. Desert Islands and Other Texts 1953-1974. Trans. by M. Taormina. Semiotext(e). {(부분번역) 박정태 편역,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이학사, 2007.}

Holland, E. (1999). Deleuze and Guattari’s Anti-Oedipus: Introduction to Schizoanalysis. Routledge.

Hughes, J. (2012). Philosophy after Deleuze. Continuum.

Patton, P. (2000). Deleuze & the Political. Routledge. {백민정 옮김, <들뢰즈와 정치>, 태학사, 2005.}



1. 가지 자연 상태 개념


자연 상태에 관한 가능한 가지 개념화가 있다.


1) 고대적 개념화 = status naturae.

이는 중세에까지 이어진다(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키케로, 토마스 아퀴나스). 자연 상태는 자연권과 결부되며, 항상 완전성들의 질서에 어울리도록 정의된다. 자연 상태는 합목적적인 발동이다. 요컨대, 자연권 = 자연에 대한 순응이다.

자연 상태에 속한 사회성 사회는 자연권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 완전성의 질서 속에서 자연적으로 정의된다. 자연 상태를 ()시민적이나 ()정치적 상태로 생각해서는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키케로의 󰡔최고선악론󰡕을 참조할 .

그렇다면 사회의 문제는 계약이나 기타 다른 것에 의한 사회의 창설이라는 문제는 결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상적으로는 가장 나은 통치를 추구한다. 그것은 현자들의 통치라 있다. 허나 사실적으로는 현자들이 인간들을 통치하길 바라지 않으며, 인간들도 현자들을 원하지 않는다. 현자들을 대신해 정부가 필요한 것이다. 이로부터 가장 좋은 체제라는 문제가 나온다. (플라톤의 󰡔법률󰡕을 참조할 . 노모스(νομος) 지혜의 현실적 대체물로서 필요하다.)

이러한 개념화는 근대 정치 철학 속에서도, 그러니까 철학자들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이론가들ㆍ법학자들에 의해서 계속된다.


2) 홉스를 통한 새로운 의미


- 자연 상태는 힘들로 움직이는 기계 장치로 정의된다. 이제 자연적인 것은 완전성들의 질서가 아니라 권력 체계로서 이해된 권리이다. 권리는 절대적인 것이 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에 대한 반동이라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다. 자연 상태는 각자를 심판자로 허락하게 된다. 지혜의 특권이 폐기되는 셈이다.


- 이제부터 사회는 기원에 따라 좌우된다. 기원이란 자연 속에서 확립되며, 동시에 자연적인 것의 극한을 표시한다.

개인들 간의 갈등은 기계적인 측면에서 개인 내부의 갈등(, 변사에 처할지 모른다는 공포와 야심(ambition) 간의 갈등) 끌고 온다. 어떤 종별적인 행위 = 계약 통해 그러한 모순을 제거할 유일한 수단으로서 사회가 나타나는 것이다.


루소는 위와 같은 말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변환시킬까? 루소는 사회성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는 점에서 홉스에 동의한다. 그러나 루소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연 상태로부터 빠져 나오게끔 하는 모순들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는 홉스에 반대한다.

계약은 무엇으로 성립하는가? 계약의 법적 정의는 당사자들 간의 관계로 이뤄진다.

- 계약은 규정된 시간 동안 쌍방을 이루는 권리와 의무를 가진 각각의 당사자에 관계한다.

- 계약은 자발적인 것이다.

- 계약은 3자에 대해 항변할 없다.


루소의 사회 계약이라는 통념은 바로 이러한 정의에 손질을 가하는 것이다. 무규정적인 시간, 3자에 대한 적용 등등.


그러나 계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저자들은 자발적 측면을 강조한다. 의지의 철학으로서 정치 철학.


누가 계약의 당사자들인가? 신민과 주권자? 이는 법학자들의 관점이다. 그렇다면 계약이 준수되고 있는지는 누가 판단할 것인가? 권력의 원천이 이중화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러한 판단을 위해 3자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3자는 주권자일 수밖에 없다. (이는 홉스의 이의 제기인데, 우리는 이를 루소에게서 재확인하게 된다.)

홉스에 있어 계약 관계는 장차 신민이 자들끼리만 이뤄진다. 각자들끼리 이뤄지는 일련의 계약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한 계약에 따라 각자는 계약에 가담하지 않는 3자에 대해 신민으로서 구성된다. (타인을 위한 약정을 담은 계약인 이것의 근대적 유형으로는 예컨대 생명보험이 있다.)


루소는 계약과 관련한 앞선 설명에 대한 홉스의 비판을 계승하지만, 홉스의 해법 자체는 거부한다.


계약에서 생겨나는 책임은 무엇인가? 이는 계약의 목적성이라는 문제이다. 이때 목적성은 계약의 산물 속에서 인식되어야 한다.

18세기 정치 철학의 공통의 장소는 고대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인간-시민이라는 이중성의 발견이다. 인간은미덕(vertu)’ 지닐 능력이 있었다. 근대적 사실은 이중성이다. 인간은 사적 인간이자 시민이 되었다.

사실상 사적 인간은 시민이 능력이 없고 시민의 규정으로서의미덕 불가능하다. 오로지 사적인 미덕만 남는다.

몽테스키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인류를 얻는 대신 미덕을 잃어버렸다.” (Carnets)


이유들 : - 이데올로기적 이유 = 종교 기독교 

            - 경제적 이유 = 재산 소유의 발전


루소가 <학문예술론>에서 말하길, “고대 정치가들은 명예와 미덕에 대해서만 말했다. 우리들의 정치가들은 거래와 돈에 대해서만 말한다.” {김중현 옮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외>, 한길사, 2007, 52. 들뢰즈는 단어 하나를 잘못 옮겼다. 루소 원문은명예(honneur)” 아니라습속(moeurs)”으로 있다.}

주네브 시민들 가운데 가장 덕망 있는 자들과 로마인들 가운데 가장 변변치 못한 자들 간의 본성의 차이도 여기서 비롯한다.


헤겔 역시 이러한 정치 철학의 비관주의를 공유한다. 민주정이 가장 좋은 체제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펼칠 능력이 없다. 이러한 이중성을 감축시킬 매개가 필요한 것이다.

<에밀>의 도입부 참조. 교육의 유형엔 2가지가 있다. 시민 양성과 사적 인간의 양성. 그러니까 선택을 해야 한다.

시민은 자유로운 시민으로서 자신이 속한 국가에 놓이며, 사회에 대해 자유를 요구한다. 사적인 인간은 국가에 대해 안전, 다시 말해 자신의 소유권에 대한 보장을 요구한다.

계약은 어떻게 이에 응답할 것인가?


나는 나의 자연적 자유( 전부 내지는 일부) 교환한다. 그리고 주권자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는다. 홉스에게서 계약의 자유는 확실한 안전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몇몇 권리들은 양도 불가능하게 남아 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에게 저항할 권리 .


스피노자는 시민적 상태 속에서 자연 상태에서와 같은 자유를 보존한다. 나는 단순한 필요성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근대 세계에 보존된 이러한 새로운 자유는 사고의 자유일 것이다.


루소는 자유를 양도 불가능한 권리들과 결합시킨다. 법을 제정할 권리가 그것이다. 헤겔은 루소를 질책한다. 우리는 이상 시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는 󰡔사회계약론󰡕에 대해서는 맞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루소 저작 전체를 놓고 본다면 틀린 말이다.


18세기의 한복판에서 솟아오른 자연 상태에 관한 번째 개념화 유형 있다. 바로 공리주의적ㆍ실증주의적 개념화이다.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론 고대 형이상학에 반대한다. 그러니까 형이상학적 계약 통념을 반대하는 것이다. (흄과 벤담을 참조할 .)

흄의 가지 논증이 있다.


- 자연 상태의 전면적 부정. 자연 상태는 권리의 상태가 아니라 필요의 상태이다. 그러니까 자연 상태는 부정적으로만 정의될 있는 것이다.


- 사회는 언제나 자연적 권리들의 제한 행위일 수밖에 없는 계약을 기원으로 갖지 않는다.

사회를 구성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실정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흄에게 필요한 것은 (예컨대 젖는 이들 간의 조화와 같은) 묵계(convention)이다. 

벤담에게 이러한 묵계의 목적성은 안전에 있다.

반면 스피노자, 루소, 칸트는 계약의 옹호자들 위해 자유를 요구한다.


  1. 특히 http://www.webdeleuze.com/php/texte.php?cle=232&groupe=Rousseau&langue=1에서. [본문으로]
  2. Desert Islands, pp. 52-55. {박정태 편역, 「카프카, 셀린, 퐁주의 선구자, 장 자크 루소」,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이학사, 2007, 149-160쪽.} [본문으로]
  3. “이러한 몽상이 구현되는 현실의 상황들은 항상 애매하다. 우리가 잘못 처신한다거나 혼자만 겉도는 사람이 된다거나 해서, 아니면 둘 다이든지 해서 상황은 나쁘게 돌아갈 수 있다.” Desert Islands, pp. 53. {박정태 편역, 「카프카, 셀린, 퐁주의 선구자, 장 자크 루소」,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이학사, 2007, 153쪽. 번역은 표현만 조금 수정.} [본문으로]
  4. 잘 알려진 에드먼드 버크의 비판을 상기해 볼 수 있다. “[루소에게는] 역설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어떤 탄탄한 앎을 바라는 자에게는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 [루소와 같은] 그러한 천재에게서 얻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함직한 많은 좋은 효과들을 가로막았다”(Burke, 1963: 89). [본문으로]
  5. 루소는 <천 개의 고원>에 있는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이라는 장에서 다시 나타나는데, 한번은 명령어(order-word; mot d’ordre)와 관련해서(A Thousand Plateaus, p. 81), 다른 한번은 목소리와 음악에 관련해서(A Thousand Plateaus, p. 96)이다. {김재인 옮김,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1, 159; 186쪽. 국역본의 해당 부분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명령어의 이러한 순간성은 아주 기묘해서, 무한히 투사될 수도 있고 사회의 기원에 놓일 수도 있다. 예컨대 루소가 볼 때 자연 상태에서 시민 상태로의 이행은 제자리 뛰기와도 같으며 0의 순간에서 일어나는 비물체적 변형과도 같다”(159쪽). “무엇보다도 랑그-파롤이라는 구분을 거부해야 하는데, 그 구분은 표현이나 언표행위를 작동시키는 모든 종류의 변수를 언어의 바깥에 두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장 자크 루소는 음악-목소리라는 관계를 제안했는데, 이 관계는 음성학과 작시법은 물론이고 언어학 전체를 다른 방향으로 가져갈 수도 있었다”(186쪽).} [본문으로]
  6. 주목할 만한 예외로 폴 패튼의 작업이 있다(가령 Patton, 2000 {백민정 옮김, 󰡔들뢰즈와 정치󰡕, 태학사, 2005}). 패튼이 보는 들뢰즈는 늘 사회의 하부 구조 그 자체의 구축에 관한 대규모의 실정적 정치와 관련된 사상가였지, 그러한 하부 구조 안에서 작은 틈새 찾기를 주문하는 철학자가 아니었다. [본문으로]
  7. “목표는 […] 정설들 및 결정론적 역사들의 연속성을 끊어 내는 일이며, 또 그와 동시에 집단적 작동 주체(agency)의 새로운 양태를 구축함에 있어 관습적 서사들로 뒤얽힌 연상들에서 벗어나고 종별화되지 않은 가공에 열려 있는 그러한 이미지들을 빚어내는 일이다”(Bogue, 2006: 221, 강조는 영역자). [본문으로]
  8. Anti-Oedipus, p. 379. {김재인 옮김, <안티 오이디푸스>, 민음사, 2014, 624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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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계의 기표들은 기본적으로 알튀세르에 의해서 일신교 담론에서, 특히 모세에 의한 그것의 재창설(“저는 당신을 섬기는 자 모세입니다.”)과 그 복음주의적인 변형 반복(“너는 베드로이니라.”)에서 차용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알튀세르가 아주 난폭하게도 상상계 영역 및 상상계를 특징짓는 거울 관계 영역으로 라캉의 상징계를 가지고 와서는 그것을 상상계의 내적 기능으로 만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알튀세르가 그와 동시에 암묵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물음은, 널리 알려진 라캉적 체계화에서 무의식 과정들을 해명하는 세 번째 기둥을 이루는 실재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한 가지 점을 가리키고 있다. 즉 알튀세르는 라캉처럼 실재계를 어떤 불가능, 또는 상징화할 수 없기에 재현 불가능한 어떤 외상성의 사건, 요컨대 초월론적 물 자체와 같은 부정적 기능으로 동일화하기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상상계의 물질성과 상관적인 이 실재계의 실정성은 무엇으로 성립하는가? 여전히 매우 불가사의하다 할지라도 텍스트의 지평에서 보자면, 이 물음이 나쁜 주체”, 홀로서기에 성공하지 못한 주체, 또는 호명을 거역하는 주체라는 물음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은 시사 받을 수 있다. 게다가 이때 말할 수 있는 것은 주체가 지닌 허약함 자체에서 기인하는 주체의 권력 초과분이 바로 호명의 고리에서 관건이라는 점이다. 물론 호명은 주체를 구성하고 주체에 형상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자주 주의했던 것)은 알튀세르에게서 이상한 유보조건 같은 그것, 즉 우리가 또한 저항이나 부인의 형태로 해석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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