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글쓰기 전설들 - 콘텐츠 발굴에서 스토리텔링까지, 12인의 스타일리스트에게 묻다
조문희 외 지음 / 서해문집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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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논픽션이 인기를 얻는 장르가 되었다면, 그것은 세상이 더 이상 개연성이 필요없는 충격적인 사건들의 연속이 되어버렸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소설가가 공들여 개연성을 고민해 만들어 낸 이야기는, 상상을 뛰어넘는 사건들로 인해 무기력하게 파괴된다. “현실이 소설보다 더하네.”라는 농담은 우리가 멸망의 코앞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징조다. 고통을 판매하고 중계하는 일을 하는 저널리스트들이, 보부상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가득한 글을 읽으며 마음이 서늘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변명을 위해서라도, 이 세계가 고통으로 넘실대는 동안,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에게 고통을 더 잘 팔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 속에 어떤 넘지 말아야 할 어떤 선을 발견하고 싶었다.      


논픽션이라는 모호한 용어는(애초에 ‘~이 아닌’ 것들의 집합이다), 그 자장 안에서 글쓰기를 감행하는 이들에게도 통일된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진 않다. 논픽션도 이야기고, 쓰기 위해 사용하는 재료가 작가의 상상보다는 취재에 기초한 사실에 더 의존한다는 점에는 대부분 동의하는 듯이 보이지만, 문체, 서술 방식, 지향점은 제각각이다. 어떤 저널리스트에게 논픽션은 기사의 연장선이고, 다른 이에게는 문학의 하위 장르다. 유머를 중간 중간 섞는 데 거리낌이 없는 이가 있는 반면, 기록으로서 충실하기를 요청하는 이도 있다. 이 모두를 아우를 수 있다는 점에서 묶음의 꼭지로서는 유의미하나, 그만큼 공허한 것도 사실이다. 내용이 흥미롭고, 유의미하며, 배울 점들로 넘쳐난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논픽션’은 여전히 모호하다.     


왜 기사와 소설 사이에 있는 논픽션이라는 장르를 시도해야 할까? 그것이 이 세계에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논픽션의 힘을 믿고 좋아하는 나로서, 사실을 재료로 삼는 일의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흔히들 논픽션을 판매할 때 사용하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라는 포인트는 어딘가 기괴했다. 이 책에는 왜 저널리스트가 논픽션을 (끝내는 픽션으로 넘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쓰고자 하는지, 그 욕망을 읽을 수 있는 단초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도처에 존재하는 일상화된 고통들은 기삿거리가 되지 못한다. 너무 많은 기사를 써야 하고, 사실 확인을 할 시간이 부족하며, 소송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마감은 언제나 촉박하게 다가온다는 물리적인 구조는 기자 개인의 의지를 체계적으로 좌절시킨다. 누군가 죽거나, 다치지 않으면 뉴스로 낚여 올려지는 순위가 밀린다. 그마저도 반복되면, 『고통 구경하는 사회』의 저자 김인정의 표현대로 ‘문화’가 되므로 뉴스가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모두가 서로를 용서하는 기가 막힌 일들이 일어난다. 어쩔 수 없이 제한하고, 어쩔 수 없이 따르며 결국 일상이 되어버린 고통은 뉴스로서의 값어치를 상실한다. 나는 이것이 언론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일상적인 비겁함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기사화의 과정에서 탈락되는 일이 빈번할수록, 저널리스트들은 새로운 언어를 찾는다. 부끄럽지 않기 위해, 논픽션이라는 수단을 택할 동기는 그런 점에서 구조적으로 발생한다.     


뉴스도 결국 사람들에게 읽혀야 그 효과가 있다. 팔리지 않는 기사나 콘텐츠는 침묵과 마찬가지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낼 것인지 궁구한 끝에 도달한 지점이 논픽션이다. 이야기에 끌리는 인간의 본성을 이용해 재미있는 이야기로서 뉴스를 제공하는 것. 그 과정에서 기존의 뉴스 작법을 종종 위반한다. 유머러스한 일화를 중간에 섞고, 취재할 수 없는 과거의 인물이나 죽은 자의 말을 1인칭 시점으로 언급하고, 문학적 표현들로 문장 자체를 재미있게 만든다. “소설 쓰냐?”는 빈정거림은 일정한 사실이다. 논픽션은 재료의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 소설과 다르지 않다. 단지 그들이 택한 재료가 요즘 잘 팔리고 있을 뿐이다. 기자가 특종에 욕심을 내야 한다는 조갑제의 말은 꽤 적나라하지만 틀리지 않다.     


그럼에도 선은 있다. 취재한 사실을 오도하지 않을 것, 취재하지 않은 내용을 단정하지 않을 것. 그리고 이 수단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지를 잊지 않을 것. 이문영이 말하는 바처럼, 논픽션이라는 작법은 그것이 지리멸렬한 이야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목적에 부합할 때만 정당하리라는 믿음이 있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믿음은, 이 사실을 만들어 낸 원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그 원인을 해결하고자 하는 충동을 유발하는 데 중요한 동력이 된다. 그 믿음을 저버리는 순간, 논픽션은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논픽션을 쓰는 이들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선, 이것이 언제나 자신들이 취재하는 세계의 구원에 한 발짝 다가가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해져야 할 대상을 알리는 것일 뿐임을 명백히 하지 않으면, 자신이 그러니까 작가로서의 영달에 좀 더 중점을 두고 있다면, 논픽션은 언제나 타인의 고통을 바탕으로 부와 명예를 쌓는 방법이라는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영화 《펄프 픽션》의 삭제된 캠코더 신에는 이런 대화가 있다. 당신은 듣는 편인가요, 말하려고 시도하는 편인가요. 책 속에서 이문영도 비슷한 말을 한다. “인터뷰는 질문이라고 보통 생각하잖아요. 인터뷰 관련 책도 다 질문을 어떻게 잘 할 것인지를 다루죠. 그런데 저는 질문만큼 중요한 것이 잘 듣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이야기는 질문과 무관하게 나오는 것 같거든요.” (59) 듣는 편인가, 말하는 편인가. 논픽션의 성패가 여기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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