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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여왕 - 인간의 성과 진화에 숨겨진 비밀, 개정판
매트 리들리 지음, 김윤택 옮김, 최재천 감수 / 김영사 / 2006년 11월
평점 :
1.
오늘 소개드릴 책은 매트 리들리의 <붉은 여왕>. 인간의 본성에 관한 저술 중 리처드 도킨스와 늘 함께 거론되는 바로 그 책입니다. 저자는 도킨스와 마찬가지로 동물학으로 학위를 따냈고 저널리스트로서의 이력이 돋보입니다. 소설가는 본인이 모르는 영역에 관해서도 얼마간 글을 써낼 수 있지만 저널리스트는 본인이 알아야 글을 쓴다고 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저자가 저널리스트라는 점에서 함의가 깊습니다. 우선 글 자체가 명확한 건 물론이고 굉장히 잘 읽혀요. 책의 두께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가독성이 높습니다. <이기적 유전자>보다 어떤 면에선 더욱 그래요.
2.
그러니까 붉은 여왕이 무엇인지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거울 나라의 앨리스>라는 동화에서 그 출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동화 속 붉은 여왕은 본인이 달리면 주변 풍경도 함께 달리게 돼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설정입니다. 이 아이디어는 생명체가 진화하는 만큼 그걸 둘러싼 세상도 변한다는 은유가 되어요. 동시에, 모든 생명체는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에 맞춰 진화해야 한다는 식이지요.
<붉은 여왕>을 견인해가는 핵심 아이디어는 <이기적 유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성 선택'이에요. 뭐 정확히는 조금 궤가 다르긴 한데요. 인간의 진화는 비단 생존 뿐만이 아니라 성공적인 '번식'을 지향점으로 삼았다는 겁니다. 사실 이렇게 설명하면 많은 것들이 명쾌해져요. 이를 테면, 미술이나 음악같은 것은 생존과 전혀 연관성이 없습니다. 하지만 배우자를 구하는 데는 도움이 됐을 지도 몰라요. 생존을 지향으로 삼으면 금세 고개를 갸웃거리게 돼던 부분이 '성 선택'이론을 뒤집어 쓰면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는 듯도 하거든요. <붉은 여왕>은 정확히 그 지점을 짚어냈다는 점에서 클래식이 되었죠. 심지어 인간의 지성 자체도 성선택의 산물이라는 가설을 끌어내게 되는데 '성'이라는 키워드로 그동안 잠겨있던 많은 문을 열어 젖히는 모양새가 굉장합니다.
3.
66쪽의 소제목은 이렇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경쟁자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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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진화에 대해 잘 모르는 많은 문외한들은 그 오류를 사실인 양 믿고 말한다.사람들은 진화란 종의 생존에 대한 문제라고 착각한다. 서로 경쟁하는 것은 종들이며, 다윈의 '생존경쟁'은 공룡과 포유류 사이, 토끼와 여우 사이, 혹은 인류와 네안데르탈인 사이의 경쟁이라고 생각한다. 나라 이름이나 축구 팀에 비유하자면 독일과 프랑스, 홈 팀과 라이벌팀 사이와 같은 것이다. 찰스 다윈 역시 때때로 이런 식의 사고에 빠지곤 하였다......중략.....그러나 이야기의 이면에는 검증되지 않은 이분법이 묻혀 있다. 아프리카의 사바나 초원에 사는 영양은 치타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일단 치타가 공격해올 때에는 다른 영양보다 더 빨리 도망치려고 애쓴다. 아프리카 영양에게 중요한 것은 치타보다 더 빨리 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양보다 더 빨리 뛰는 것이다....-p66
신선한 생각이죠. 그러니까 오히려 30년 전의 저술임에도 오히려 현대의 사회문화적 현상들과 어우러지는 구석이 있달까요. 작금의 통용되는 사고관이 '자신을 착취하는 것은 자신이다'라는 것이잖아요. 나는 더 나아질 수 있으므로, 더 노력해야 한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계속 착취하게 되는데 1993년도 생물학에서 이런 사유가 나왔다는 점이 역시 놀라울 따름입니다. 분명히 <붉은 여왕>이 제시하는 어떤 필터는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만능키는 아닙니다. '성 선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들도 산재해 있어요. 하지만 그 불완정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에 관한 가장 탁월한 저술 중 하나임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강력하게 권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