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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융, 기억 꿈 사상 - 카를 융 자서전
칼 구스타프 융 지음, 조성기 옮김 / 김영사 / 2007년 12월
평점 :
1.
많은 사람들이 심리학에 대한 부푼 기대를 안고 입문하고는 표면만 더듬는 책들에게 지쳐가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에는 반짝이며 흥미진진하던 심리학 개론은 대부분의 책들에서 반복되고, 소모되며, 어느 정도 일반적인 용어나열에 그치고 마는 게 대부분이니까요. 끼워맞추기 식 사례들로 인간의 행위를 단일하게 환원하려한다는 시도 자체에서 이미 실패하는 책들이 대부분이고 오히려 심리학과 멀어지고 만 독자들이 많을 겁니다.
오늘 소개드릴 카를 융의 자서전은 그런 분들을 다시금 심리학으로 발길을 돌려줄 책이랄까요. 카를 구스타프 융은 84세가 되어야 이 책의 집필을 허가했고, 그마저 본인의 사후에야 발표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하지요. 그렇게 힘들게 나온 책이지만서도 번역의 문제로 국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던 책인데 여기에 애정과 학식을 겸비한 역자가 덧붙여져 국내에도 아주 우아하게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옮긴이의 서문에서 그러한 부분이 잘 드러나고 있어요. "나에게 가장 감동적이었던 책을 한글로 옮길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가지게 된 것에 대해, 신과 융과 그동안 수고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2.
제가 카를 구스타프 융을 소개하는 건 역시 바보짓이겠지요. 단순한 약력을 얘기하자면... 바젤 대학교의 의학부를 졸업한 심리학의 거장입니다. 학계에서 외면받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연구를 이해하고 확증한 입지론적 인물이지요.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이나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같은 저술들을 통해 그의 이론과 연구들은 이미 이쪽 학계의 시원이 되었지요. 일반 독자 입장에서 보면 그의 저술들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오히려 이 자서전이 아닐까 싶습니다.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무의식이라는 것이 자기를 실현한 게 본인의 생애라고 밝히며 책은 시작됩니다. 이럴 땐 정말 책이 도끼 같아요. 책의 프롤로그는 이렇게 끝납니다. "나는 나 자신을 내적 사건들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이 내 생애의 특이성을 이루며, 나의 '자서전'은 그러한 내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삶에서 어떤 사건들이 있잖아요. 예컨대, 이사를 간다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거나 대통령이 탄핵을 당한다거나...그러한 외적 사건들은 기억에도 남지 않고 오로지 융은 우리 내면의 사건들을 생생하게 호출해냅니다. 책의 1장은 유년시절, 2장은 학창시절, 3장은 대학시절을 다루게 되고요. 4장부터는 그의 환자들과 꿈의 분석, 마지막으로그 유명한 '집단무의식의 원형에 대하여'라는 챕터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총 13장을 다루게 되고 자서전으로서는 상당한 성취를 거두고 있는 책임에 틀림없습니다. 당장 본인이 입지론적인 이론가이자 의학자인데다가 그 책을 이루는 컨텐츠는 시종 문학적이고 철학적인데다가, 역자의 애정어린 시선이 보태어져 아주 걸출한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3.
그 말투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아,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겠다고 아버지에게 약속해다오!"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내가 좀 놀라 그에게 반문했다. "보루라니요? 무엇에 대한 보루란 말입니까?"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보루'와 '교리'같은 단어들이었다. 왜냐하면 교리, 즉 논의할 필요도 없는 신앙고백은 오직 의심을 단번에 눌러버리려고 할 때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p281
융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의학도의 길을 걸었죠. 평생을 신과 다퉈왔고 신을 믿느냐는 질문에 다만 신을 안다고 대답한 것이 유명하지요. 위에 소개한 탁월한 텍스트들처럼 시종 신랄한 서술들이 책 곳곳에 가득합니다. 본인의 일대기를 형식으로 차용해오고 있지만 심리학과 철학, 니체와 프로이트를 횡단하며 펼쳐내는 마술들이 대단한 책이에요. 비단 심리학에 흥미가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교양서로서, 혹은 입문서로서도 외연을 확장해내가기에 정말 좋은 책으로 많은 분들께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