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 수프 soups 500 시리즈
수잔나 블레이크 지음, 구혜영 옮김, 민혜련 감수 / 세경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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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좋아요. 한끼 식사로도 뚝딱 먹을 수 있는 게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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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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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를 구구절절 설명한다면 스포일러가 될 것이다. 아니, 줄거리를 구구절절 설명하기만 한다면 이소설의 코털도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야기는 그만큼 단순하지만 또한 단순하지 않다.

소설 분량의 반을 차지하는 1부에서 사건은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일어난다. 하루, 아주 무덥고 둔한 공기가 온 사방을 가득 채운 날, 오랜만에 집을 방문하는 오빠를 위해 연극 대본을 쓴 소녀 브리오니는 전 인생을 좌우할 오해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간다. 그 날 하루에 모든 것이 잉태되었다. 죄를 저지른 자의 '길' 날의 여운이, 불행하게 막 내릴 갑작스런 사랑의 신열이, 너그러웠던 인간의 돌변이, 그리고 한 인간의 기나긴 속죄의 시간이.

그래서 그 소설가(이 또한 특별하달 것은 없지만 재밌는 장치의 하나)는 그렇게 말이 많다. 몸짓 하나에 바쳐진, 말 없음 하나의 이유가 변명처럼 길게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곳에 속한 거의 모든 사람의 인생을 속박한 날의 몸짓, 사건 하나하나를 어떻게 허투루 놓쳐버릴 수 있겠는가.

영화처럼 그 장면들은 떠오른다. 그 순간의 풍경, 바람,구름, 햇빛의 조도, 햇빛이 드린 그림자, 햇빛의 느낌, 나무, 꽃, 새 울음소리, 풀 등을 비롯해, 트리톤 분수, 건물의 내력, 꽃병, 연못의 내력, 터너 가 집의 묘사 등 , ... 수영장으로 뛰어들기, 쐐기풀 치기, 엄마의 편두통, 남편의 야근 등 상황의 묘사까지 어느 여름날의 하루는 그렇게 길다. 머릿속에서 너무나 많이 떠올려 보았기 때문에 잊혀지기는 커녕 더욱더 분명해지고 점점 더 시간이 길어지기만 하는 지나간 과거의 하루. 숨을 죽이고 그림자 속에서 수군수군 말하는 사람들의 나지막한 소리처럼 불안스럽고 조심스럽다.

2부와 3부의 책략은 좀더 다르다. 좀더 집중적 조명으로 다가간 다. 2부의 전쟁은 자꾸자꾸 침이 마를 정도로 위급하다. 3부는 속죄의 시간을 지내는 작가의 모습이다. 작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곳에서는 허구가 끼어든다.

장중하고 그 단단한 맛은 고전소설의 거장에게서나 맡았던 것이며, 완벽한 반전은 지극히 현대적인 작가들만이 베풀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에 여운에 빠르게 책장을 넘기다가 다음 대화를 발견하고 그랬지 하며 쓸쓸해졌다.

'이제 길은 구름의 오른쪽, 됭케르크의 동쪽 지역과 벨기에 국경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브레이 듄스' 지도에서 읽은 지명이 떠올라 로비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거, 괜찮은 이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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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0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리버 타운 - 양쯔 강에서 보낸 2년
피터 헤슬러 지음, 강수정 옮김 / 눌와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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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헤슬리는 미국인 남자다. 그는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겠다는 간절한 소망은 품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평화봉사단으로 애담과 함께 중국의 쓰촨 지방 푸링으로 가서 그곳 대학에서 영어과 학생을 가르친다. 푸링은 양쯔강이 우장강과 만나는 곳이다. 그가 있는 아파트에서 강이 보이고 모든 일은 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는 강을 이렇게 표현한다. '...양쯔 강에 닿은 배는 물살을 만나 빙그르르 돈다. 모터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난다. 위로는 산, 앞으로는 도시가 보이는 두 강의 합류 지점에서 배는 물살에 밀려 잠시 멈칫한다. 그러다 프로펠러가 빠른 양쯔강의 물살을 움켜잡으면, 배는 퍼덕거리며 상류로 올라간다.'(아름다운 문장이다. 번역이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미국인이지만 지금의 애국적인 마음으로 똘똘 뭉쳐 겁나는 게 없어 보이는 미국인이 아니라 인종문제나 종교문제 등에 대해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진 미국인이다. 다시 말하면, 반골 기질이 있는 비판적 지식인 정도. 그는 중국의 체제 문제에 대해서 일단 객관적인 시각으로부터 접근한다. 그리고 그에게 중국의 체제가 판단을 내리는 지점은 객관적인 실체로 드러날 때이다. 이런 면에서 미국인, 귀납적 추론의 대가들답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연역법의 대가들이다. 무조건 표어를 내건다. 그가 조깅을 꾸준히 하면서, 동시에 중국어를 익히면서, 그냥 검은 건 글씨요 흰 건 바위다 하던 글씨들이 점점더 의미를 생성해갈 때, 그것은 모두 별다른 의미없는 표어였다. 귀납법은 연역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연역법은 귀납법을 두려워한다.

<리버 타운>을 보면 그의 마음 씀씀이와 중국인을 이해하려는 노력, 자연 풍광에서 인간의 역사를 읽으려는 인문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리버 타운>을 읽고 나면 중국인에 대해서 알기보다는 피터 헤슬리라는 미국 남자에 대해서 더 많이 안 듯한 기분이 든다. 그는 와이궈런(外國人)으로 2년을 이방인으로 살았다. 그의 중국어를 배우려는 노력은 눈물겹고 결국 2년이 되자 마음이 편안하게 되고, 2년째의 말에는 친구랄 수 있는 사람들도 생긴다. 하지만 그가 그들의 내면 속에 가까이 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돌아오기 얼마전 시장통에서 벌어진 일이 이런 일의 절정이다.

그가 왜 학생들을 모두 영어 이름으로 불렀는지 모르겠다. 중국 영어 배우는 전통일까? 어색하고 이상한 영어 이름을 이야기하는 에피소드는 재밌지만 푸링 시장의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으로 부르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때가 훨씬 더 생기 있어 보였다. 양쯔 강이 아니라도 중국에서의 2년이 아니라도 피터 헤슬리의 글은 아름다울 것이다. 책의 곳곳에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도 섞여 나온다. 그가 중국인들을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도 문학을 통해서였다. 그곳은 잠겼을까. 양쯔강 댐 공사는 2003년에 첫 단계가 끝나고 수위가 높아진다고 한다. 무려 52.72미터. 푸링도 마찬가지다. 댐이 완공되는 2009년이면 거기서 40미터가 더 높아진다고 한다.

** 첫번째 리뷰를 쓰신 분이 지적하신 사항에 대해서 읽고 나니 항변의 기분이 든다. 1. 한자를 어떻게 읽느냐는 표기 원칙을 정하고 그대로 따르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채택하고 있는 표기 원칙이 무리가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으며 읽으면서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2. '일주일 내내 테니스 구입반대운동을 펼쳤다'라는 대목에 대해서는 앞뒤 문맥을 읽지 않은 오해라고 생각된다. 이 말은 피터 헤슬리의 조크다. 처음에 푸링에 갔을 때 중국 당국은 최고의 대우를 그들에게 약속한다. 아파트도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전화기와 세탁기도 사준다. 하지만 이런 구입에 대한 것은 모두 상부에서 결정한다. 당국은 일행에게 '테니스를 사주기'로 결정한다. 피터 헤슬리 또한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결정한 것인지에 대해서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므로 당국에 대해서 '테니스 구입 반대운동'을 벌이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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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 오늘의 일본문학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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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슈이치, 그의 2002년 아쿠타카와 수상작인 <파크 라이프>가 열림원에서 출간되었고 유일한 장편 소설 <퍼레이드>가 5월 9일 출간되었으며 문학동네에서 조만간 <열목어>가 나온다고 한다. 중앙일보에서 보고 줄거리가 재밌을 것 같아 교보문고에 가서 사서는 커피숍에 앉아서 읽었다. 꽤 재미있어서 열림원에서 나왔었다는 <파크 라이프>도 샀다. 이 표지 또한 예쁘다. 집에 돌아와 읽었다. 그리고 나오키의 버릇대로 책 뒤에서 적었다. 2003.5.17.

<퍼레이드>는 아파트에 어떻게 모여 살게 된 다섯 명이 이야기다.

‘사람들이 보는 것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이 책에서는 형식적인 기법으로 부각시킨다. 즉 5명의 시점 ‘퍼레이드’를 통해 당사자는 제삼자가 되고 관찰자는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주인공이 된 제삼자는 다른 사람의 기술로 드러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비친다. 예를 들면 첫 번째 장의 주인공인 요스케는 응석을 부리는 것을 잘 못하겠다, 구역질이 날 것 같다고 하는데 두 번째 장의 고토미는 요스케는 “저것도 재능이야, 응석 잘 부리는 것 말이야”라고 말한다.

이 다른 모습은 객관적인 상과 주관적인 상의 괴리만은 아니다. 주인공으로 등장한 인물이 자신을 파악하는 자아상 역시 분열되어 있긴 마찬가지다. 고토미는 남자 친구의 어머니를 봤을 때 잡아끄는 나와 도망치는 나가 나뉘고 나오키는 아파트 저편에서 관찰하는 자신을 다시 본다. 그래서 나오키의 이 말이 가장 정확한 말인 것 같다. “네가 아는 사토루는 너밖에 모르잖아” “그러니까 넌 네가 아는 사토루밖에 모른다는 말이야.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아는 사토루밖에 몰라. 그러니까 요스케나 고토도 그들이 아는 사토루밖에 모르는 것은 당연한 거야.”

인물은 주인공일 때 드러나는 혼자만의 비밀을 한 가지씩 안고 있다. 만화 컷 같은 그들의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비밀스럽긴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등장인물들 간에) 면은 그 사람의 어떤 ‘본질’과 맞닿은 부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니까 ‘알고 보니’ 식으로 말이다. 아무도 모르는 우정을 나눈 친구(이 말로 짐작되는 것과는 좀 다르다)가 있는 요스케, 강간 장면만을 비디오로 모은 미라이, 남의 집을 몰래 찾아가는 사토루, 그리고 (중앙일보에서 스포일링한 거의 끝장까지 읽어야 드러나는) 나오키의 비밀까지. 하지만 이 꽁꽁 싸놓은 비밀은 절대로 ‘본질’이니 ‘진실’이니 하는 말로 통하는 통로가 아니다.

“진실이란 말, 난 도저히 그 말에서 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나오키) 그러니까 진실 같은 건 없다. 그냥 사실만 있을 뿐이다. 비밀을 알았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껏해야 과거에 대한 조그마한 이해나 친밀감이 생기리라는 기대 정도?

그렇다고 이 소설이 섬으로 고립된 현대인상을 보여주는 데 역점을 두었다고 확대해석될 여지도 없다. 그러니까 이런 비밀로 드러내려는 것이 현대사회를 사는 사람들의 고립감, 이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간의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고,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지만 일껏 생각해서 던지는, “만약 내가 도울 만한 것이 없을까?”(고토미) 이런 말들은 진짜 골치 아픈 일들이 막상 닥치면 쓸모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와야 하는 심각한 순간도 우리는 알아챌 수 없다. 친한 친구는 모르는 곳에서 죽고, 그들의 우정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낙천적이다. 사토루 말대로 “아무리 생각해도 그 집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절대 말도 걸고 싶지 않았을 타입의 인간들뿐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무리 속에 섞이고 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함께 있는 게 즐거워 견딜 수가 없다.” 그냥 주어졌으니 사는 것이다. 즐거우면 더욱 좋고.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처럼 거북이가 한걸음 한 걸음 열심히 앞으로 나갔기 때문에 이긴 게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기어가는 모습을 토끼에게 들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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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죽음
짐 크레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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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처음부터 누워 있는 죽음이다. 이 죽음의 성격은 아주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서 여러 가지로 변주된다. 그리고 그 내에 위치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면)는 얼마나 생생한지.

먼저, 바리톤만. 다양한 악기로 연주할 수 있기 때문이며 까딱 잘못했으면 '음치 만'이 될 뻔한, 처음과 끝은 있었을 것이나 여기 등장하는 세월에 비한다면 없다고 해도 무관할... 어느 30년 전 부부로 맺어지기 전의 남녀가 찾아와 몸을 비볐고 그리고 오늘 그들이 주인공(죽음)을 맞이한 곳...

세월. 묘사에 따라 길고 당기고가 가장 심해 형편없이 체면이 구겨진다. 그리고 가장 하찮은 존재인 인간. 그들에 끼어든 죽음은 삶보다도 더 생생하다. 죽음은 자연으로 돌아가 벌레들과 어울리는 평화로운 '삶'이다. 자신들의 추억이 쌓인 곳이 개발된다는 소리를 듣고, 하필이면 날씨가 좋은 아침에, 그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옛 장소를 찾아가고 세상에서 가장 볼썽 사나운 모습으로 죽는다. 남자 동물학자는 옷을 몽땅 벗은 상태, 여자 동물학자는 아랫도리를 벗은 상태다. 이미 남자 동물학자는 한번 피식 싼 상태이며, 갈매기는 이것을 물고기 냄새로 착각하고 쪼아댄다.

두 생물학자는 처음부터 죽어서 나온다. 신의 버림을 받은 듯이 건조한 죽음이다. 생물이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나가는 것으로 축복을 내릴 뿐이다. 죽음을 처음에 묘파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 죽음의 이유를 알게 되고, 가슴 찡한 감동을 주기 위해서일까. 아니다. 단지 죽음이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과, 성장을 한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가는 것이라는 사실, 정자가 난자를 향해 돌진하는 그 순간이 죽음을 향한 돌진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죽음과 삶은 같은 비중으로 놓여 있다. 그곳에서 찾아지는 우연과 비극의 묘미는 과학자의 일지 같은 꼼꼼함으로 기록되어졌기 때문에 지이익 '배어나올' 뿐이다.

하지만 이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죽음이다. 작가가 '주인공'인 여러 죽음의 성격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고 고르고 골랐을테니 그 점은 믿어도 좋다. 여자가 남자보다 조금더 나았다. 하지만 30분 늦은 남자의 죽음은 소망의 제스처를 만들었다.

우리의 바람-아주 처음에 피력되고 나중에 그 유일한 소망마저 짓뭉개짐을 파악하게 되는-의 흐름을 읽기 위해서, 그리고 앞뒤로 성실하게 짜맞춰진 것을 알기 위해서 꼼꼼히 읽든지, 한번 더 읽을 필요가 있다.

** 오자를 몇 개 발견했다.
97쪽 반드시->반듯이, 모든 '톡토기'에 비해 하나의 털이 부족한 '독토기'(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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