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설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51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송태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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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당신이 옆에 있었다고 해도 처제가 제대로 대응했을 것 같지는 않아. 게다가 흔쾌히 그쪽 요구를 받아들여 같이 산책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면 상대는 역시 불만을 품었을 거야. 결국 오늘 일은 처제의 성격에서 기인한 문제라는 거지. 그러니까 당신이 옆에 있었든 없었든 그것과는 무관한 일이야. 오늘은 어떻게 잘 대처해서 넘겼다고 해도 앞으로 이와 비슷한 일이 몇 번이고 일어날 텐데 뭐, 그러니 결국 이 혼담은 성사되지 않을 운명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겠어? 처제가 완전히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이렇게 되는 건 숙명인지도 모르지."
"당신처럼 말하면 유키코는 결국 시집을 갈 수 없다는 거잖아요."
"그건 아냐. 내가 말하는 건, 그런 식으로 매사에 소극적이고 전화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사람한테도 역시 장점이 있는데, 그런 걸 시대에 뒤쳐졌다거나 고리타분하다고 보지 않고 그런 사람 안에 있는 여성스러움이나 고상함 같은 걸 인정해 주는 남자도 있을 거라는 거지. 그걸 아는 사람이어야 처제의 남편이 될 자격이 있다는 말이야."

그건 그렇고 유키코는 과연 오늘의 실수를 '실수'리고 생각하긴 하는 걸까?
그렇다면 형부한테 '미안해요'라고 한마디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그런 걸 알고 있어도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사치코는 다시 유키코가 얄미워졌다.

처음부터 '아니'라고 말하지 않고 아무리 물어도 애매하게 대답하다가 이러기도 저러기도 어려운 막판에 와서야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다쓰오는 몹시 화를 냈다.
다쓰오가 그 점을 비난했을 때, 젊은 아가씨의 몸가짐으로는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명료하게 대답할 수 없는 것이고 그 사람한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도 태도를 보면 대충 알 수 있는게 아니냐고 말했지만.....

"그럼 형부는 하룻밤에 결정하라는 거야?"
유키코는 불만스러운 말투로 이렇게 물었다.
"그래도 난 네가 싫어하지 않을 것 같아서 승락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형부나 언니가 가라고 하면 갈 생각이지만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니깐 적어도 이삼일 동안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주었으면 싶었는데...."
유키코는 마음속으로 각오하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우물쭈물하면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형부가 하룻밤에 결정하라고 했으니..."
하며 다시 원망하는 듯이 말했다.
조금도 기뻐하는 것 같은 얼굴이 아니었고 지금까지 일을 진행해 준 사람에게 감사한다는 말 같은 것은 전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언니가 울던데.."
자동차가 도겐자카를 지났을 때 유키코가 말했다.
"왜 울었을까? 이상해, 이타니 씨 일로 울다니."
"아마 다른 이유가 있겠지. 이타니 씨 이야기는 어색함을 숨기려고 한 이야기일 거고."
"가부키 극장에 같이 가자고 안 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런 것 같다. 가부키가 보고 싶었던 거야."
사치코는 가부키를 볼 수 없어서 우는 어린아이 같은 언니의 그런 점이 내심 부러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처음에는 열심히 참고 있었지만 결국 참을 수 없어 울음을 터뜨린 게 분명해 보였다.

특히 유키코는 단정하게 똑바로 앉아서 많이 받아 마셨다.
그리고 여전히 잠자코 있으면서 생글생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사치코는 유키코의 눈이 전에 없이 흥분으로 빛나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대여섯 해 전의 일이다.
사치코는 한 번 유키코가 큰집 형부 다쓰오를 붙잡고 이런 식으로 퍼부어 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내성적인 사람은 어쩌다가 터무니없이 강해지는 법일까?
분명히 그때도 머뭇거리기만 하는 평소의 유키코답지 않게 논리정연하게 따지고 들며 다쓰오를 호되게 닦달했던 것이다.
"이용할 수 있을 때는 실컷 이용해 먹고, 이제 이용 가치가 없어졌다며 무능한 오쿠다바케 씨한테 좋은 자리가 있으니까 혼자 만주로 가버리라고?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느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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