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Mr.Vertigo > 살아야지, 악착같이 꼬리곰탕 밑바닥을 긁는 것처럼.
그 여자의 자서전
김인숙 지음 / 창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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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다음날, 나는 내 뱃속에서 거의 다섯달 가까이나 머물고 있던 아이를 없애버렸다. 넉달이 넘어 위험할 줄 알았더니, 이전의 몇번처럼 간단하고 수월한 수술이었다. 병원 아래층의 식당에서 나는 설렁탕을 사먹었다. 국물 하나 안 남기고 다 먹을 작정으로 그릇 밑바닥을 숟가락으로 긁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살아야지, 악착같이 꼬리곰탕 밑바닥을 긁는 것처럼. 감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 생각을 해야만 했으나 살아야지, 따위의 생각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보다도 더 나빴다. 그러나 그것말고는 더이상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 그 여자의 자서전.-31쪽

편지에 관한 그의 말이 거짓말인지 사실인지는 중요하지가 않았다. 공원에서 기우뚱한 자세로 착지를 한 그가 나를 향해 웃어보였을 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기억은 훼손되지 않은 채, 혹은 못한 채 아예 '종신'이 되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혹은 훼손조차 기억이 된다는 걸...... 그리하여 기억은 때묻고 더럽혀진 채로 쌓여가는 것이다. 모든 추한 꼴을 다 견디고 나서야 마침내 다가오는 생의 끝. 해피엔딩이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고 그와 나는 아직 그 끝까지 이르지 못했다는 것,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63쪽

눈물을 거두어버린 한쪽눈은 이제 한사람의 죽음 이외에는 더이상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또한 기억하려고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러나 남아 있는 눈은, 눈물을 거두어버린 눈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보다 더 흉하고 끔찍한 것들을 평생 목격하게 되리라. 한쪽 눈의 마지막 기억을 비웃으면서, 더 많은 것, 더 지독한 것들을 담아내리라.-86쪽

규상이 어쩌다 간혹이기는 했지만 엑스터시를 복용한다는 것을 알게 된 뒤, 화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신 이제보니 불량청소년이었군요, 말했었다. 그때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봐, 내 나이는 말이지, 재기가 어려운 것만큼이나 타락하기도 어려운 나이야. 사실을 말하자면 양쪽 다 불가능하지. 그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말을 해놓고 난 뒤에는 그 말이 마치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 고백하건대, 그 어느 쪽도 포기가 안되었던 것이다. 불가능을 인정한다는 것과 포기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성질의 문제였다. -127쪽

엄마, 제발 그러시지 말라고, 나와 앉아 계시고 싶으면 불이라도 켜시라고 말했을 때, 어머니의 대답이었다. 얘, 늙으면 귀가 밝아지는 모양이다. 낮에는 멀쩡한 소리도 못 들으면서 밤이 되면 모든 소리가 다 들리는 것 같구나. 캄캄한 어둠속에, 뭔지도 알 수 없는 온갖 것들이 수선수선 이야기를 하는데 어떤 때는 시끄러워 참을 수가 없다가도, 어떤 때는 내용도 모르면서 그게 그렇게 재미진다.-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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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하이드 > 쉿! 여자, 책읽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멋지다!
제목 : 책 읽는 여자 위험하다
'책과 나 사이에 당신이 들어올 빈자리는 없다!'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위의 원서 표지 그림은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vittorio matteo corcos 의 '꿈'이란 그림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바닥에 흩어진 장미는 지난 여름 순결을 잃고, 사랑과 작별한 그녀를 말하는지도 모른다. 이별은 그녀를 성숙하게 만들었다. 책의 한 장을 덮듯, 그녀는 인생의 한 장을 덮었고, 그만큼 성장했다. 이 그림의 제목은 '꿈' 이지만,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든 그녀의 모습은 꿈꾸는 모습이 아니다. ' 책 읽는 이 여자는 결코 꿈꾸는 사람이 아니다'

번역서 표지의 그림은 라몬 카사스 이 카르보Ramon Casas y Carbo의 '무도회 이후' 라는 그림이다.
같은 주제의 잡지 선전화보로 역시 나른한 표정으로 안락의자에 누워 한 팔을 늘어뜨리고, 다른 한 팔로 책을(편지) 집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다.

콜레트는 독서의 상태를 '고상한 고독' 이라고 했다.
'독서는 유쾌한 고립 행위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예의 바르게 자신을 접근하기 힘든 존재로 만든다.'
라는 말에 무릎을 탁 치며 공감하는 사람은 나 뿐은 아닐꺼다.

독서광들이 좋아하는 '책' 에 대한 재미있는 '책' 들이 많다.
문학과 미술을 연결해서 재미있게 풀어낸 책들도 많다.
이 책은 전자에 더 가까운데, 더 세밀하고, 은밀하다.
그 표지와 카피만으로도 덥썩 사서 후회가 없지만, 그 외에도 '독서' 에 대한,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독서하는 여.자. 그림' 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

모르고 있었던 완전히 새로운 사실들은 없다. 다만, 머릿속 이쪽, 저쪽 정리되지 않은채 들어가 있던 사실들에 다리를 놓아 하나의 마을이 될때 그 쾌감.
'독서' 가 '소리 내어 읽는 것'에서 지금의 '소리 내지 않고 은.밀.하.게. 읽는 것' 으로 넘어오면서 외부 세계와 소통하던 행위에서 외부 세계와 단절된 행위로 넘어오면서, 그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들을 화가들은 역사속에서 끊임없이 때로는 부러 드러내어, 때로는 아슬아슬하게 그 내면을 포착하여 화폭에 담고자 했다.  
단순히 '책 읽는 여자' 그림들을 좋아라 했던 것에서  그 그림들이 말하는 바를 읽게 되는 것은 배로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 '책을 읽는 나' 의 이야기와 18세기 '책을 읽는 그녀'의 이야기는 같고도 다르다.

이 책을 읽는 것은 ' 책을 읽는 여자들 그림으로만 이루어진 회랑이 있는 상상의 박물관'을 느릿느릿 산책하는 것'과 같다. 책 속의 흥미롭고, 도발적이고, 생각거리를 무한히 가져다주는 그림들, 사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책값이 전혀 아깝지 않은 책이다.

* 가끔 괴상한 문장들이 있어서 별 한개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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