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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평점 :
소년은 미소짓는다. 하나하나 익혀나가는 문자와 언어, 먼 미지의 나라의 역사와 풍물, 저 오랜 옛날 전쟁과 사랑의 이야기들……. 지식의 빛줄기가 소년의 뺨을 밝게 비춘다. 햇살과 단비를 맞으며 자라나는 나무들처럼, 조금씩 쌓여가는 지식들. 그 지식은 바로 소년의 즐거움이었다. (p.14)
런던 미술관을 돌아보던 저자 서경식은 17세기 스페인 화가 무리요의 '소년'이라는 그림을 보고 지식의 세계에 눈을 떠가는 소년의 즐거움을 읽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소년시절에는 지식을 향한 동경과 환희만큼이나 깊은 슬픔이 배여 있다.
모두들 “어린 시절은 참으로 좋았다. 가능한 일이라면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나 역시 그 같은 마음이 없지 않다. 하지만 지난 시간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하나하나 꼼꼼히 되짚어보면, 그리움이나 즐거움과 마찬가지로 어린아이 나름의 슬픔과 괴로움이 마음속 저편에서 되살아온다. (p.81)
재일조선인 2세, 이 단어가 우리에게 안기는 복잡한 심사는 곧 그가 '타고 난' 불행을 뜻한다. 섬세하고 여린 심성의 소년 서경식은 자신이 친구들과 다른 존재임을 점차 분명하고 처절하게 느끼며 학창시절을 보낸다. 그리고 한국의 차가운 감옥에 갇혀 있는 두 형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스스로의 무력함을 원망하며 어른이 되어간다.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20년 가까운 세월을 감방에서 보낸 서준식과 서승이 바로 그의 두 형이다. 그래서 그의 성장기(記)는 '소년의 미소' 혹은 '소년의 기쁨'이 아니라 '소년의 눈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서경식의 에세이 <소년의 눈물>은 데라다 도라히코에서부터 프란츠 파농에 이르기까지, 그가 소년 시절의 대략 10년 동안 읽어왔던 책들을 다시 펼쳐보며 자신의 성장통을 드러내 보이는 책이다. 서경식은 보통의 사내아이들과 달리 야구시합의 주전에 뽑히는 것보다, 친척 어른들 사이에서 재롱을 떠는 일보다 다락방 한 구석에서 책장 넘기는 시간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는 형들이 꽂아놓은 책들을 하나하나 뽑아 보며 이야기의 세계로 푹 빠져드는 기분을 끔찍이도 사랑했다.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인물과 마주했을 때, 마음속 한 구석에서 느껴지는 덜컹거림에 가볍게 떨기도 했다. 점점 깊어지고 넓어지는 책 속의 세상에서, 거친 세상에 상처받았던 그의 영혼은 비로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그는 체육시간보다는 지식의 세계에 침잠해 있을 때 마음의 평화를 맛보았던 것이다. 그만큼의 독서 편력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방안에 웅크린 채 책장을 넘기는 아이를 떠올리며 나 역시도 어떤 안도감 같은 걸 느꼈다. 서경식이 다자이 오사무에게서 보았던 일치감과도 비슷한 느낌.
남다른 기호와 성격을 가졌던 소년은 자신이 그 이상으로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막연히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다름이 야구시합을 피하는 것처럼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앞으로의 삶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 많은 상처를 내게 될 거라는 사실도 함께 깨달아갔다. 그래서 그는, 중산층 이상의 아이들이 다니는 중학교에 유일한 조선인으로 입학한 날 이렇게 다짐한다.
나는 ‘이들 무리와 나는 다르다’, ‘이들에게 결코 내 마음을 허락하지 않겠다’며 몸과 마음을 가다듬었다. (p.114)
즐거움과 평온을 위한 것이었던 그의 독서는 감옥에서 보내온 형의 편지를 읽으면서 '의무'라는 또 하나의 길을 트게 된다.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自己硏鑽)으로서의 독서, 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p.146)
이제 독서는 연약한 그가 펜 하나로 세상의 모순과 싸워나가기 위한 무기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마음 내키는 대로 책을 잡던 손이 빼곡히 적힌 '읽어야 할 도서목록' 위에 놓일 때, 그 손의 주인은 이미 어른이 된 것이다. 가장 사적이고, 그 어느 순간보다도 주체적인 독서의 시간에마저 ‘의무’를 의식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인간의 성장은 곧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깨닫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어른의 독서에는 언제나 얄팍한 수준이나마 그 한 권의 책이 탄생하기까지의 역사와 그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경건함이 뒤따라야 한다. 나 역시도 서경식의 이 작은 에세이를, 안식을 위한 독서에서 책을 만드는 이 혹은 2005년의 한국을 살아가는 젊은이로서의 어떤 의무를 상기시키는 독서로 살며시 옮겨놓으며 소소한 경건함을 품어본다.
초등학교 때는 무슨 책을 읽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의 본격적인 독서는 아마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쯤, 엄마와 아파트 상가의 도서대여점을 수시로 드나들며 세계명작 문고본들을 빌려보던 때 시작되었던 것 같다. 쉽지 않았을 책들을 참 많이도 읽었는데, 대부분은 희미한 인상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 때도 지금처럼 책을 읽는 족족 이렇게 끄적이는 습관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손때 묻은 옛 책들을 뒤적이는 서경식의 섬세한 감성을 대하며, 설사 그 유치함이 부끄러워 몇 장 넘기지 못할지라도 그 시절의 비밀노트를 한번 꺼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겐 무거운 통증을 동반하는 성장사(史)는 없지만, 그래도 그와 비슷한 감상을 적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이의 유년시절에는 크든 작든 저마다의 희망과 절망이 수놓아져 있는 법이니 말이다.
낙서와 손때로 지저분해진 책을 한 장 한 장 들추고 있노라면, 어린 시절 기뻐하고 슬퍼하던 감정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어수선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성장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 자부심과 열등감, 희망과 실의가 격렬하게 교차하던 그 나날들이. (p.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