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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여 안녕 클래식 라이브러리 1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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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달 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통과의례처럼 읽으며 나는 내가 이 책에 대한 세간의 열광에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임을 알았다. 『데미안』은 물론 유년기 상실의 아픔과 자아의 새로운 일면을 발견하고 가치 체계의 혼란을 마주하는 청소년기의 경험을 잘 그려낸 소설이다. 그러나 올바른 주체로 우뚝 서는 일, 오직 단단한 내면을 갖는 일을 완수하기 위하여 방황이란 준비되어 있는 것일까? 말하자면 내게 이 소설은 너무 강박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슬픔이여 안녕』은 성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알을 깨고 나오는 대신 무너져 내리는 세계의 파편에 상처 입는 새의 이야기이고, 성숙의 기회가 퇴행의 욕구에 잠식되다 끝내 굴복하고 마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며, 시간이 흘러도 극복될 수 없는 아픔에 대한, 그런데도 그런 대로 살아지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성장'이라 불리는 사건의 실체를 이 이야기에야말로 예리하게 포착하고 건져내는 힘이 있다. 성장은 반드시 슬픔을 딛고 일어나 다음 단계로 올라감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 안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그것에 인사를 건넴으로써 수행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에겐 모든 고통과 단절해야 할 필요도, 그럴 능력도 없다. 용기가 두려움에 파훼당한 폐허 위에서도 우리는 어떻게든 살 수 있다. 사강은 그걸 아프게 인정하는 것이다. 사랑받고 싶어서 미워하는 것은 애정에 대한 갈구를 저버리지 못하는 모든 인간의 콤플렉스다. 그런데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면, 우리가 이 아픔을 묵묵히 통과하는 것 말고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성장이란 미명 하에 과거에 갇히지 말라고, 알을 깨고 나오라고 많은 작가와 강사들이 소리치지만, 나는 삶이 결코 그런 식으로만 작동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부정할 수 없다면 명명하는 것이 낫다. 나로 산다는 것은, 나만의 용법으로 세계의 존재들을 호명해 나가는 과정까지 포괄하는 일이므로.


나를 줄곧 떠나지 않는 갑갑함과 아릿함, 이 낯선 감정에 나는 망설이다가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을 붙인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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