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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제목만 보고 수학에 대한 이야기인줄 오해했었다. 원주율이 생겨나게 된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수학사에 대해 설명하겠지하고 그냥 지나칠 뻔 했으나, 책 표지의 그림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책 표지에는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무리 위로 하얀 보트에 누워있는 흑인 소년과 호랑이가 그려져 있었다. 소년은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누워있고 호랑이는 보트에 걸쳐 앉아 전방을 주시하고 있다. 비현실적이면서 동화 같은 그림에 호기심이 생겨 책을 읽게 되었더니 좋더라-_-
책은 크게 3부로 이루어져 있다. 그 전에 ‘작가노트’라는 이름으로 소설의 내용이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느낌을 준다. 작가노트에는 의미심장한 말이 숨어있다.
그 때 노신사는 말했다.
“내 이야기를 들으면, 젊은이는 신을 믿게 될 거요” -p10
그렇다면 이 책은 신에 대한 이야기일까? 조금더 읽어보자.
1부에서는 책의 화자이자 주인공의 유년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가 ‘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유에서부터, 동물원 원장의 아들로써 동물학과 동물의 생태, 그리고 동물원 경영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보여준다. 이 부분이 상당히 지루하긴 하지만 읽어두면 어째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2부에서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아니라, 유년시절 그의 종교관에 있다. 힌두교 가정에서 태어나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관심을 갖고 신학을 공부한다. 그리고 주변의 타당한 반대에 이렇게 대답한다.
“간디께서는 ‘모든 종교는 진실하다’고 말씀하셨어요” -p94
거봐 종교에 대한 소설이 맞잖아. 에이 시간만 낭비했군…이라며 삐뚤어진 편견 속에 책을 덮을 뻔했다. 그러나 동물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도 흥미로워 계속 읽다 보니 어느새 2부가 시작되었다.
2부에서 파이는 동물원을 처분하고 캐나다로 향하는 배에 오른다. 그러나 항해 중 뜻하지 않는 사고로 배는 침몰하고 유일한 생존자인 그는 구명보트 위에 오랑우탄, 하이에나, 다친 얼룩말, 그리고 호랑이 한 마리씩과 함께 살아남게 된다. 마치 우화 같은 이야기가 전개될 듯 하지만, 오히려 정반대였다. 치열한 생존의 법칙에서 살아남으려는 모험이 펼쳐진다. 그래 바다 한가운데의 로빈슨 크루소라 하면 적당하겠군. 구명보트에는 다양한 물품이 구비되어 있어, 파이는 그것으로 로빈슨 크루소 못지 않는 생존기술을 보여준다. 이야기는 점점 심각하게 전개된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모든 동물은 죽고 호랑이와 파이만 남게 된다. 그러나 다행히도 파이는 1부에서 보았던 동물학의 지식으로 호랑이를 조련..은 아니고 자신을 해치지 않게 만든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 나빠져 식량은 줄어들고 구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220일이 넘도록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잃지 않은 유머와 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존재. 자연 상태에서는 당연히 자신의 포식자로써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바다라는 더 큰 두려움 앞에 함께 서게 되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서로의 삶의 의지를 돋보아 주는 동반자가 된다. 크루소처럼 점차 야생적으로 된 그는 다양한 생존기술을 터득하지만 여전히 생존은 힘겹다. 갖가지 모험끝에 그는 겨우 목적지에 도달한다. 그리고 리처드 파크는 사라진다.
3부는 파이가 자신이 겪었던 일을 또 다른 시각에서 이야기 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반전(혹은 진실)’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내용이다. 하지만 여전히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미심쩍다. 개인적으로는 ‘리처드 파커와 있었던 일을 믿고 싶다. 1부에서 보았듯 파이는 만물에 존재하는 신을 믿었다. 그와 같은 믿음 그리고 생명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뒤에 한 이야기가 합리적이기에 사실성이 있어보인다. 하지만 뒤의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에게 파이는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닐까?
불쌍한 불가지론자들이여, 조금만 상상력을 내어보자.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건 그대들의 빈약한 상상력 때문이다. 신은 존재한다. 그것은 이렇게 내가 살아남음으로써 증명하지 않았는가? 나는 227일간을 잔혹한 호랑이와 함께 험난한 태평양에서 살아남았다. 어느 쪽이 진실인가는 그대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메마르고 부풀리지 않은 사실적인 이야기, 그리고 환상과 기적이 공존하는 우리 자신의 눈과 귀로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 당신은 어느 쪽의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가?
한 줄 평 : 이야기자체로도 매우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