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 기적을 만든 한 정신과 의사 이야기
이브 A. 우드 지음, 김무겸 옮김 / 글항아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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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원과 학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벌써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양자 모두 ‘교화의 주체’라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 고장난 정신활동을 ‘정상’적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약물 투여에서 감금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폭력을 행사하는 정신병원과, 학생들에게 지식을 투여하고,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교실을 떠나지 못하게 하며, 때로는 직접적인 형태의 물리적 폭력(체벌, 근신, 봉사활동, 퇴학 등)을 행사하는 학교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병원과 학교는 근대성이 설정한 ‘정상’이라는 기준을 두고, 그와 다른 형태를 띠는 모든 것들을 ‘병리현상’, 즉 ‘교화의 대상’으로 응시한다. 이들은 보편적 이성을 가지고 보편적인 역사를 살아갈 ‘근대적 인간’을, ‘이성’과 ‘문화’라는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직조해내고 있다.

나는 미셸 푸코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런 재미없는 말들은 정신과 의사들을 생각할 때마다 구역질이 올라오는 내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나에게 정신과 의사들은 하얀 가운을 입고 환자들의 수퍼에고가 되기 위해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매우 싹수가 노란 이미지이다. 환자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고 자신은 멀리 떨어져서 약물을 투입하여 진정시키기 급급한 그런 의사들만 봐왔기 때문일까.

군 시절 내가 아끼던 소대원 두 명이 정신이상을 판정받고 국군통합병원에 감금되었을 때, 의사들은 그 아이들에게 어떠한 따뜻한 인사도, 반드시 치유케 해주겠다는 믿음도 주지 않았다. 그저 알약을 정기적으로 복용케 하면서 아이들의 머리를 멍청하게 했을 뿐이었다. 아이들의 눈동자는 흐려져만 갔고, 급기야는 군 복무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사회로 배출되었다. 군에서 수용해 문제를 발생시킬 수 없으니 사회로 나가 각자의 길로 가라는 것이다. 책임 회피다. 어쨌든 내게 정신과 의사의 이미지는 그렇다. 정신과 의사를 생각할 때 프로이트의 대화요법이나 최면술 등 매력적으로 보이는 상황들만 생각하는 소박한 친구들이 있다. 이들이 간과하는 것은, 거의 모든 정신 치료의 첫 단계는 약물요법이라는 것이다.

<희망>의 저자 우드 박사의 이야기는 너무나 간단하다. 어쩌면, 책을 다 읽고, ‘에게~ 그냥 이런 내용이야?’하며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문학 밥을 한 숟가락이라도 자신 분들이라면 당연히 육체와 정신, 영혼의 조화로운 관계를 도모하고, 각 영역에 균형있게,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치료법이야 말로 효과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 효과는 둘째치고라도 도의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상식이다. 우드 박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육체, 정신, 그리고 영혼이라는 세 개의 다리를 한 개의 의자 아래에 놓아두는 방법이다. 고장난 주체를 치유코자 할 때에는 이 세 영역을 모두 고려하는 통합적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우드 박사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은, 그간 통합되지 못한 방법론들을 한데 묶어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우드박사와 그녀의 책에 박수를 보낼 만한 이유는 따로 있다.

먼저 개인적인 이유 하나, 정신과 의사에 대한 나의 편견을 누그러뜨렸다는 것. 바로 첫번째 이유다. 개인적 이유만으로 이 책을 평가하는 무책임한 태도를 용서하시라.

육체와 정신, 영혼의 관계를 설정하는 일은 무척이나 애매모호하다. 가령, 사물에 대한 집착증(정신적 문제)이 대뇌의 이상(육체적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육체적 결함이 없음에도 정신 그 자체의 문제 때문에 나타난 것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각 부분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여서 특정 영역에만 국한된 치료는 결코 완벽한 치료 모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소박한 생각인데, 우드 박사 역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주체를 붙들고 있는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의 각 부분들을 통합적으로 끌어안고 가야만 환자가 치유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녀가 인간을 육체와 정신, 영혼으로 쪼개어 파편화시키지 않고 온전한 주체로서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점이 그녀와 이 책이 칭찬을 받아 마땅한 두 번째 이유다. 의사들이 환자를 이렇게만 바라봐준다면, 환자들은 의사들에게 깊은 존경을 표할 것이다. 이는 환자와 의사 간의 친밀감, 믿음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우울증, 조울증, 공황장애, 강박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등의 질환을 앓고 있던 환자들을 ‘완치’해 내었다는 저자의 생생하고 재미있는 치료 이야기가 바로 이 책을 빛나게 하는 세 번째 이유다. 우드 박사는 다중인격자였던 질리, 중독 장애를 앓고 있는 신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환자 새뮤얼 등 자신이 치료한 실제 사례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생생하게 증명해보이고 있다.

칭찬받을 만한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몇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과연 정신질환에 있어 ‘완치’라른 게 가능하긴 한 걸까.

그녀의 이론대로라면, ‘육체의 다리’는 유전적인 요소를 포함하며 이는 평생을 살아도 변하기 어려운 기질적 특성을 의미한다. DNA에 따라 결정된 사항이 과연 약물치료와 대화요법을 통해 변화될 수가 있을까. 완치나 치유라고 하기 보다는 부정적 기질을 무의식의 더 깊은 심층으로 내려보내, 표층으로 발현되는 것을 좀 더 지체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어떠한 계기를 만나게 되면, 다시 그러한 기질은 표면에 부상하고 마는 건 아닐까.

그리고 보다 근본적인 의문. 과연 정신질환이라는 개념이 성립가능한 것일까. 좀 더 다르게 행동하고 좀 더 다르게 논리를 조직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정확한 것이 아닐까.

정신과 육체에 관한 서양의 폭력적인 이분법. 플라톤에서 데까르트로, 그리고 중세시대를 거쳐 근대,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사고방식은 사실상 별로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 정치 논리에 따라 동양은 서양의 사유를 답습해왔으며(한탄하고 비참해할 일이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발기발기 찢어놓고, 둘이 통합될 수 있는 모든 순간에 분석의 메스를 들이대었다.

더 이상 육체와 정신을 구분하지 말자. <희망>에 나오는 육체, 정신, 영혼의 통합적인 사유체계와 방법모델은 조각나지 않은 온전한 주체를 위한 하나의 전범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당연한 발상이 맘에 든다. <희망>은 주체를 조각내는 것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 책이며, 인간성을 파편화하는 것을 반대하는 책이다. 밋밋하고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는 모범생 같은 제목과, 궁금증을 유발시키지 않는 매우 ‘친절한’ 부제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별 다섯개를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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