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 맑스 박사 학위 논문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2
칼 마르크스 지음, 고병권 옮김 / 그린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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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인가, 입대를 앞둔 몇 개월 전, 맑스의 박사학위 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가 번역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우리 학교 노동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수유 연구실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병권씨가 번역했더랬다. 깔짝거리던 희랍어, 라틴어도 원문이 실려있다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구입했다. 2만 3천원. 역자의 고생에 비하면 2만 3천원이 대수겠느냐!

책을 펴는 순간 희랍어 오기(誤記)에 약간 실망했지만, 그건 너무나 지엽적인 것인지라, 기쁨이 줄어들지 않았다. 그 책을 '인문고전강독반' 커리로 강력 추천했기에 첫 발제는 내가 맡았었다. 물론, 아직도 이 책은 소화불량을 유도한다. 제대로 읽지 않았을 뿐이라며 스스로 위안해보지만, 역시나 내 게으름과 무지의 소치인 것이다.

무비판적 글쓰기와 제도권적 글쓰기에서 탈피하지 못한 난 첫 발제문을 줄간격과 여백을 줄여가면서도 무려 6-7장으로 작성했다. 첫 발제를 위해 읽은 책도 본 텍스트 이외에 여러 권이 됐었다. 나름대로 뿌뜻했고, 문제의식도 있었다고(그 나이에 비하면) 생각했지만, 한 학형의 한 마디에 난 좌절했다. 다시는 이 따위 글을 쓰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수준은 유치하고 미미한 것이었지만, 어쩌면 자기에게 실망하여 절필을 선언한 글쟁이들의 마음과 비슷했는지도 모른다. 그 학형의 비난은 '글이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는데, 어쩌면 그 말보다도 그리고 술자리에서 나에게 쏟아부은 상스러운 욕설에 기가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 때는 왜 그 말들에 연연해서 위축되었는지 모르겠다. 그 땐 어리고 혈기도 왕성했는데. 그냥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였는데. 여튼, 그 '사건'을 계기로 그 형과 나와의 대화가 카페 게시판에서 내왕했고, 주제는 '자기의식'과 '클리나멘clinamen'이었다. 그 학형은 텍스트를 너무 원심적으로 읽었고, 난 구심적으로 읽었던 게 첫 번째 충돌의 이유였다.

내 책장에 꼽혀있던 맑스의 책을 보다가 불현듯 그 시절 생각이 났다. 내가 하는 말을 스스로 이해못하는 나. 그렇게 내 말들은 나를 떠나갔다.

지금 다시 이 책을 펼쳐 보다가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을 다시 주절거렸다:

"우리는 에피쿠로스에 의해 적용된 충돌의 구체적인 형식들도 발견할 수 있다. 정치적 영역에서는 계약 사회적 영역에서는 우정이 최고의 선으로 칭찬된 것이다."

'충돌'은 또 다른 자기 자신과만 관계하는 원자들 사이에서 '휘어짐'(편위; 클리나멘)을 통해 발생한다. 클리나멘을 통해 원자는 '자기의식'을 드러낸다. 그래서 맑스에 따르면, '원자들의 충돌 안에서 직선으로 낙하하도록 위치지워진 그들의 물질성과 편위 안에서 정립된 원자의 형식규정은 종합적으로 통일'된다. 이런 통일이 자기의식의 첫 번째 형식이란다. 나에겐 이런 개념이 중요치 않았다.

다만, 충돌은 어쩌면 반동(혹은 반발)이라는 것이 중요했고, 그런 흐름들이 계약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 위치한 우정만이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정의로운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라는 2장 마지막 구절이 중요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맑스는 별다른 설명을 남기지 않았다.

잠깐, 선배 H의 말을 떠올려 본다. 내가 벽을 손으로 민다고 치자. 벽을 구성하는 원자와 내 손을 구성하는 원자, 현대 물리학의 개념으로 보면 미립자라든지 소립자 따위를 생각해야겠지만, 이 두 부류의 원자 더미들이 서로 융해되지 않아야 난 벽을 손으로 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충돌이고, 반발이다. 벽과 손이 서로 반동하지 않으면 내 손은 벽에 흡수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과 손은 붙어있다.

내가 생각하는 관계의 최고 형태는 이런 거다. 붙어있지만, 자기가 남아있는 것. 계약적 관계의 망 속에서 인정되는 우정으로 서로 붙어있지만, 끊임없는 반발력으로 주체성을 지속적으로 재정립해 가는 것.

내 친구들과의 지난 대화나 내가 그네들에게 보였던 태도, 그네들이 나에게 보여준 태도를 떠올려보면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관계'라는 것과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관계'라는 것이 어쩌면 매우 다른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서로 말은 하지 않지만, 실망도 하고, 언짢아도 하고, 속으로 욕도 하는 게 인간이다. 하지만, 이런 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어쩔 수 없다'라..

우린 같이 인간이지만, 같은 인간은 결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추상적 질료'이다. 인간이 관계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지만, 다른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다. 단지, 인간들 사이에서 충돌을 통한 관계 형성에 따라 특수하게 규정될 뿐이다. 그래, 동일한 생각을 갖지 않는다고, 동일한 태도를 교환하지 않는다고 화내지 말자. 씨부렁거리지도 말자. 다만, 우린 서로에게 자신만의 질료성을 드러내 보일 뿐이다. 내 고유한 질료성을.

어쩌면, 정의는 각자 안에 있지 않고 서로의 질료성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닌가. 구차한 말들은 집어치우자. 대신 그 선배가 좋아하던 <before sunrise>의 대사를 떠올려본다.

"You know, I believe if there's any kind of God, it wouldn't be in any of us. Not you, or me... but just this little space in between"

"만약에 신이 있다면 너와 내 안에 없어. 너와 나 사이의 이 작은 공간에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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