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을 향해 슈팅!
조경숙 지음, 오승민 그림 / 한솔수북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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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향해 슈팅!


통일을 향해 슈팅!


#육이오전쟁 직전 #경평전 선수로 뛰었던 #박창수할아버지와의 우연한 만남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함께 공을 찰날을 꿈꾼다!!!



이 책의 멋진 내용에 이끌려 #스포츠 #역사 #독서를 좋아하는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히어로덕후!!! #초3 #아들과 엄마인 으나책빵의 주인장 으나는 !!!


함께 읽고, 관련 자료ㆍ영상들도 찾아보고, 이야기도 나누었답니다.


그러면서


더불어 서로의 생각을 나누어 보기도 했구요. ^^



이 책 덕분에 저희 모자 귀하고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답니다~^^



통일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미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곱씹게 하는 의미 있는 작품인 이 책을 추천하고 싶네요.



서로를 이해하다 보면 


마음의 벽을,


세대의 벽을, 


분쟁의 벽을 허물 수 있어요.



 

 

통일을 향해 슈팅!

저자

조경숙

출판

한솔수북

발매

2021.08.31.

발로차 ~ 발로차 ~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통일을 향해 슈팅!



나는 오늘도 통일을 꿈꾼다


#통일을향해슈팅


#조경숙 글


#오승민 그림



#열린아동문학상수상



경평전을 아시나요?




https://youtu.be/fyut2ABJWx8



축구가 본궤도에 오르면서 라이벌전도 생겨났다.


경평대항축구전 (京平對抗蹴球戰)


일제강점기 조선의 양대 도시인 경성과 평양을 대표하는 경성 축구단과 평양 축구단이 장소를 번갈아 가면서 벌였던 친선 축구경기이다.


1929년 제1회 대회 관련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조선일보주최 경성평양대항축구 제일회전"


"승부를 결하지 못한 경평대항축구전"


이렇게 경평대항축구전이라는 문구가 나오고 있다. 


한편 1933년 대회 관련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전경성군 대 전평양군의 축구대항전"


"경성대평양축구대항전 제삼일"


이렇게 경평축구대항전이라는 문구가 나오고 있다.


정리하자면 경평대항축구전과 경평축구대항전이라는 명칭이 당시에 혼용되었다.


그러나 아래 전적표에 첨부된 당시 모든 기사를 종합하여 검토해보면 경성평양대항축구전 줄여서 경평대항축구전이란 명칭이 더 많이 사용되었으며 또한 대항(對抗)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일부 명사 뒤에 쓰여 그것끼리 서로 겨룸(예: 학교 대항 축구 경기, 각 도 학생 대항 연극 공연)이란 의미가 있기 때문에 경평대항축구전이 국어 어법에도 부합하며 당시 대회의 취지인 경성과 평양 두 도시가 겨루는 축구 경기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다른 종목에서도 "경평대항빙상경기"


"경평대항농구전" 이렇게 "경평대항"이란 용어가 각 종목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다른 축구 대회들 명칭을 보아도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 3지방대항축구전이렇게 전조선도시대항, 3지역대항 이런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당시 언중(言衆)들에게 대항(對抗)이란 단어는 지역 혹은 도시들이 겨룬다는 의미로 널리 쓰이던 표현으로 경평대항축구전이 보편타당한 명칭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후대에서는 경평대항축구전보다 경평축구대항전이라는 명칭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당시부터 현재까지 줄여서 경평축구전 혹은 더 줄여서 경평전이라는 명칭 역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창설 (1929년)


조선일보 주최로 1929년 10월 8일 첫경기가 개최되었으며 당시 조선일보 10월 8일자 사설은 "부지중에 민중적 차원으로 화합하자는 데"에 취지가 있다 했고, 조선일보 부사장 안재홍은 개회사에서 "경기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역량을 과시하는 기회"로 승화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경평전은 일제치하에서 민족의 단합과 극일의 저항정신을 키운 본보기로 평가 받았다. 


당시엔 '팀' 대신 군(軍)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전경성군(全京城軍), 전평양군(全平壤軍)이란 용어가 사용되었으며 경성군은 당시 축구의 명문 경신중학 중심으로, 평양군은 일본의 최강팀인 와세다 대학을 7:0으로 물리쳐 이름을 날리던 숭실학교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출신학교는 그랬지만, 평양팀의 멤버는 25세 이상의 청장년이었으며, 경성팀의 주축은 당시 민족 사학의 쌍벽을 이루던 연희와 보성 전문 선수로 대부분이 20~23세의 대학생이었다.


제1회 대회는 10월 8일 서울 원서동 휘문고등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운 7천여 관중이 열광하는 가운데 개최됐으며 1차전은 1:1로 비겼고, 9일의 2차전은 평양이 4:3, 10일의 3차전은 평양이 다시 4:2로 이겨 2승1무로 평양이 우승했으며 평양팀은 평양에 돌아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제2회 대회는 1930년 11월 28일부터 3일간 경성운동장에서 열렸다.


 2회 대회는 다소 체계가 잡혔으며 경성팀은 막강한 멤버를 갖출 수 있어 2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종합 2승 1패로 우승하며 지난 대회의 패배를 설욕하였다. 


1차전은 경성이 3:2승, 2차전은 평양이 5:3승, 3차전은 경성이 5:1로 대승했다. 


제2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조선일보 주최의 경평전은 중단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분분하지만 승부욕이 지나쳐 싸움이 잦아 중단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재개 (1933년)


그 후 1933년에 조선축구협회의 주선으로 경평 대표자들이 모임을 갖고 1933년 경성 축구단 및 평양 축구단의 각각 창단을 기념하여 봄, 가을 두차례로 나누어 경기 장소를 경성과 평양을 오가며 실시하도록 결정하였다. 


그 후 경성-평양 대항정기축구전으로 경기가 계속되어 오다가 1935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경평전은 경성, 평양 이외에 다른 도시 축구팀의 성장에 힘입어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 3지방대항축구전과 같은 도시대항 축구대회로 이어진다. 


그러나 1942년 일제의 구기종목 금지로 인해 모든 대회는 중단된다.


해방 이후 (1946년)


1946년 해방 후 서울운동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평전이 열렸다.


 1942년 일제의 구기종목 금지 이후 4년 만에 열리는 대회였기에 서울 시민들의 큰 관심과 열광적인 응원 하에 열렸으며, 그 열기가 지나쳐 3월 26일 열린 2차전에서는 관중 난동이 벌어져 경찰이 공포탄을 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38선으로 남북통행이 금지되면서 평양 선수들은 경비망을 뚫고 어렵게 내려왔던 것이었으며, 돌아갈때는 육로가 위험해 뱃길을 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서울 선수들을 초청하겠다는 그들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한 채 경평전은 무기한 중단되었다.


의미


수도와 제2의 도시 또한 지역 의식이 남달랐던 기호 지방과 관서 지방을 대표하는 양대 대도시 서울과 평양에 당시 조선의 최고 빅클럽들이 형성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 양강 구도가 이루어지면서 이들 최고의 클럽들 대결에 조선 전체가 열광하는 흡사 지금의 유럽 프로축구 리그처럼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클럽 축구가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을 살리지 못하고 80년대 프로축구 출범 후 대도시에 연고 구단이 뿌리내지리 못하고 그 후 기형적인 서울연고공동화정책 등으로 대도시 연고지 빅클럽 구조에서 중소도시 연고지 빅클럽 구조로 바뀌고 부산, 대구, 인천, 광주 같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도시들에 시민구단들이 들어선 점은 아쉬운 점이다.


한편 경평전의 주축이었던 경성 축구단과 평양 축구단은 해방 이후 각각 남한과 북한 국가대표 축구팀의 모태가 되었다. 


가난한 신생 독립국에 불과하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본선 및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북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이들간의 교류는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경평전 역시 그 명성만이 남은 채 재개되지 못하였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의 지역 예선에서 남북이 마주치기는 했으나 국가대표로서 만난 것이었으며, 경평전과 같이 남북을 대표하는 도시 간의 정기적 경기는 부활되지 못하였다. 


물론 1990년 10월 11일에는 평양에서, 10월 23일에는 서울에서 남북통일축구대회라는 명칭으로, 2002년 9월 5일과 8일에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2002 남북통일축구경기라는 이름으로 경평축구의 맥을 잇는 축구대표팀 경기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역대 전적


대회 횟수와 전적에 대한 정리


경평대항축구전의 제1회 대회를 조선일보 주최의 1929년 대회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나 1929년과 1930년처럼 경성과 평양의 선발팀 성격이 아닌 1933년 경성 축구단과 평양 축구단이 공식적으로 창단된 이후 양 축구단의 창단을 기념하여 1933년 4월 6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벌어진 대회부터를 1회 대회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이와같이 대회 횟수와 전적이 공식적으로 명확하게 확립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대회 횟수가 각각 다르게 기재되고 있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최대한 당시 언론에서 기재한 대회 횟수를 반영하여 1929년 10월, 1930년 11월, 1933년 9월에 개최된 대회와 1933년 10월 부터 정식으로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합의하여 개최되기 시작한 경평대항축구전을 분리하여 정리하였다. 


또한 1933년 4월의 대회는 아직 합의전 평양 축구단이 주최한 일종의 친선경기라는 견해가 있기 때문에 역시 분리하였다.


전적에 있어서는 1929년부터 1935년까지 6년 동안 평양 축구단 기준으로 19전 7승 8무 4패라는 기록의 기사가 있는데 이는 아래 기재한 전적에서 1935년까지의 전적인 19전 8승 7무 4패와 거의 근접한 기록이다.


또한 한겨레, '29년 첫 경평축구 개최'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총 23전 경성 6승 7무 10패, 평양 10승 7무 6패의 종합전적이 나오고 있으며 세계일보 (이동윤, 1990년 9월 20일자 11면), 기록으로 본 경평축구 - '11승 7무 7패로 평양이 우세'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총 25차례 경기가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이렇게 문헌마다 다른 기록이 나오고 있는 이유는 정기전 성격의 경평대항축구전 이외에 전조선축구대회,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 3지방대항축구전 등의 대회에서 경성과 평양의 대진 기록을 포함 한 것으로 추정되며 완벽한 전적 기록을 찾기 위해서는 축구계의 확인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통일을 해야 할까?


점진적 통일



https://youtu.be/BY8fIF6EROE



통일이 되면 나에게 무엇이 좋은가?



통일을 하면 이익이 많습니다. 


먼저 분단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분단 비용은 분단으로 인해 소요되는 비용, 곧 남북한 사이에 존재하는 대결과 갈등 때문에 발생하는 비용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군사비, 체제 유지비, 외교비와 분단으로 인해 사회 전 영역에서 발생하는 기회 비용이 있습니다.


2008년을 기준으로 남한 군인은 약 65만 명, 북한 군인은 약 119만 명인데, 통일이 되면 남북한의 군인 수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으며 이들이 경제 활동을 하게 되면 국가 생산성이 증가하여 이를 국민의 복지를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남한 군사비 26조 6,490억 원과 북한 군사비 684억 7,000만 원 중에서 상당액을 절약하여 생산 활동에 돌릴 수 있습니다. 


그밖에도 남북한이 불필요한 대결에서 소비되는 사회적 비용이 사라지고 이러한 에너지들이 사회 발전에 이용됩니다.


통일 비용으로 들어가는 돈은 얼마나 되나요?



통일 과정과 방법에 따라 많이 들 수도 적게 들 수도 있습니다. 통일 비용의 예측은 국내외 연구기관마다 다르게 나타납니다. 통일 이후 정책 목표나 인구 증가율, 경제 성장률 등 여러 가정에 따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데, 대략 최소 73조 원에서 최대 2,300조 원까지 예상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통일은 우리에게 이익


통일 비용이 당장은 손해처럼 보이지만 북한이 잘 되도록 투자하는 비용이므로 결국은 우리나라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통일 이익이 더 큰 셈이지요. 


통일 비용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이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우리나라가 행복해지기 위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일이 되면 우리나라 인구는 7천만명으로 늘어나 경제 규모도 커집니다. 


또 남북한의 자본과 노동 그리고 기술들이 모여 더욱 효율적으로 경제 활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https://youtu.be/FdnJeS2ABFg




일제침탈과 분단이라는 민족사의 수난과 같은 운명을 겪은 축구



경평전 부활을 상상해 보자


공은 둥글다.


우리는 하나다.



일제강점기의 스포츠 문화


 ‘나라 잃은 설움으로 


청년들이 어울려’


민족의 불운을 축구로 승화



‘상상’이라서 우울하지만


 ‘상상’의 가능성마저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평화 체제의 구축을 향한 발걸음



축구는 망국의 한을 풀어주는 청량제



단순한 축구 경기가 아니라 


한반도를 살짝 흔들어대는 


문화 행위가 될 수 있다.



공 하나로 


짐짓 으르렁대면서도 


다 함께 함성을 지르는 풍경이 벌어져야 된다.



경기는 격렬할수록 아름답다. 


강슛으로 골이 터지면 미안해할 거 없다. 


끝난 후 서로 안으면 된다. 


심한 몸싸움으로 넘어지면 가서 일으켜주면 된다. 


축구는 축구답게!


https://youtu.be/MuA5OAFUHqM



스포츠 교류는 


국민을 결속시키고


갈등을 해결하는 수단이 될 수있다.


스포츠교류는 가장 효과적인 대화수단이며 갈등을 해결하는 평화적 도구이다.



"경평전 축구로 통일의 물꼬가 트였으면 좋겠습니다"


스포츠가 가진 다양한 힘이 전달되기를 희망하며 통일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추천합니다



#한솔수북서평단으로 선정되서 #도서무상제공 받았으나 #으나책빵 #으나 의 개인적인 견해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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