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1
박흥용 지음 / 바다그림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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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여행의 시작

  1. 견자, 서자로서의 차별, 편견으로 시달리다.

      급기야 살인누명을 쓰고 고문을 당하다.

   2. 견자, 고문으로 생긴 병을 장님 황정학의 침술로 치료하다.

      황정학, 서자신분으로 고통받는 견자를 구해주다.

   3. 견자, 스승 황정학을 지팡이 삼아 차별이 없는 자유의 삶을 찾아 길을 나서다. 

 

견자는, 아웃사이더이다. 서자라는 점, 에미없는 자식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우리 아버진 나이 오십이 되도록 공부해서 생원진사시에 겨우 합격해서 할일을 찾지 못해 어슬렁거리는 촌부다. 물려받은 재산이 넉넉해서 오십 줄의 무료를 기방을 찾아 달래다가 어느 젊은 기생을 통해 나를 낳았는데(난 생모를 본적이 없다. 날 낳고 산고로 죽었단다),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아버진 이미 부인과 결혼한 자식, 대 이을 손자까지 두고 있었다니. 어쨌든 난 그따위로 태어난 개자식(犬子)이다.  


견자에게는 그래서 모성이 결핍되어 있는데, 그 모성결핍이 견자를 사회에 대한 불만을 키워 싸움질로 시간을 보내게 한다. 그에게는 그의 삶은 빛이 없는 어둠의 시간이며, 그 어둠을 밝혀줄 달이 없다. 장님같은 시간을 이끌어줄 지팡이하나 없다. 그런 그에게 황정학이라는 장님 스승이 등장한다는 것은, 역설적이면서도 자연스럽다. 황정학이 서자신분이기 때문에 모진 고통을 받게 된 견자를 치료해준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상징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황정학이 장님이라는 설정은, 견자의 장님과 같은 삶에 대한 은유이자 장차 그가 걸어갈 삶의 지표라는 점에서, 황정학은 견자의 내면적 짝패이다.

황정학의 다음 대사를 보라.

밤엔 달이 있고, 컴컴한 방안엔 등잔이 있고, 이 맹인에겐 지팡이가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역설적으로 존재하며, 거기엔 짝패가 존재한다는 황정학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면, 서자라는 신분적 차별 때문에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눈은 뜨고 있으나 세상의 진실을 보지 못하는’견자에게는‘눈멀었으나 세상을 환히 볼 수 있는’황정학과 같은 짝패가 필요하다. 견자와 황정학, 이 둘은 그렇게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리고 견자는 황정학을 스승으로 모시고, 분노와 증오, 차별과 수모의 삶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세상으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Ⅱ. 자아찾기로서의 여행 

  Ⅱ- ① 내면적 자아의 인식 
    4. 견자, 스승 황정학으로부터 생각 이전의 본능을 배우다.

         기방에서 가희에게 동정을 버림으로써, 이전의 자아를 허물어뜨리다.

      5. 견자, 스승의 친구 놋각쟁이의 방짜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가다.  

      6. 견자, 길 위에서의 피투성이 처절한 싸움 끝에 기생 백지를 만나다.  

 

 

황정학은 견자에게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본능으로 볼 것을 가르친다. 그 본능은 생각/ 깨달음 이전의 차원이다. 견자가 서자로서의 분노와 증오 때문에 세상의 참모습을‘있는 그대로’보고 느낄 줄 모른다는 것을 황정학은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황정학과 견자의 다음 대화를 보라.  


  견자 - 스승님은 앞을 못보니까 잘 아시겠네요. 도대체 안보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스승 - 너는 눈을 떴으니 보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겠구나. 보인다는 것이 무엇이냐?

            가르쳐다오.

  견자 - 보인다는 것...산, 들, 강, 하늘....보긴 보는데 본다는 걸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그냥. 그냥 보는 거죠, 뭐.

  스승 - 그럼 나도 그냥. 그냥 안보일 뿐이다.

  견자 - 그럼 스승님이 말씀하시는 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스승 - 그럼 네가 알고 있는 안보인다는 것이 무엇이니?

  견자 -  스승님이 보는 그것을 저는 못본다 이거 아닙니까?

  스승 - 그럼 처음부터 질문을 다시 해라. ‘스승님은 보이니까 잘 아시겠네요. 
           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어.

  견자 - 스승님은 보시니까 잘 아시겠네요. 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스승 - 좋아. 질문 맘에 들었어.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견자 - 무엇을 알아요?

  스승 - 내가 장님이라는 걸.

  견자 - 나 참, 뭐가 뭔 말인지. 저도 스승님이 장님이라는 걸 알아요. 
  스승 - 니놈이 장님인 줄은 모르잖느냐?

  견자 - ......

  스승 - .....

  견자 - 그럼 내가 장님이란 걸 인정하면 나도 보는 거로군요.

  스승 - 아니!  

 견자 - 왜요? 스승님과 똑같은 처지가 되는데.  

  스승 - 똑같긴 뭐가 똑같니? 나는 지팡이가 뭔지 알지만 너는 지팡이가 무엇인지 모르잖아.  


황정학은 견자가 서자라는 신분적 굴레로 분노와 증오에 눈이 먼 장님이어서 세상에 대한 진실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고, 그 장님임을 깨닫지 못할뿐더러 장님의 어두운 삶을 이끌어줄 지팡이(진실을 보는 눈)를 갖지 못하고 있음을 정확히 지적해준다.

그렇다면, 그 장님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그리고 자신의 삶을 이끌어줄 지팡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황정학은 자신의 제자를 기생 가희에게 데리고 가서 견자의 동정을 잃게 한다. <구르믈버서난달처럼>에서 상당히 상징적으로 제시되는 이 대목은, 견자가 이전의 내면 세계로부터 벗어남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견자가 새로운 내면세계를 발견하는 삶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견자의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힌 내면세계를 허물어뜨리고 난 다음, 황정학은 견자를 안성 놋각쟁이(방짜꾼)에게로 인도한다. 황정학이 견자를 놋각쟁이에게로 인도한 이유는, 놋각쟁이의 다음 대사에서 잘 드러난다.  


바둑(놋쇠덩이) 앞에 서면 노비도 양반도 다 잊는다. 그저 만들고 싶은 방짜 하나만 머리 속 가득한데, 바둑이 머리 속의 방짜 모양으로 완성해가면, 나도 그렇게 새로 태어나는 것 같더니. 평생 만들어온 방짠데, 만들 때마다 이렇게 가슴 설레고 새로울까.  


그렇다, 황정학은 놋각쟁이를 만나게 함으로써 견자가 보다 진정한 내면과 자아에 눈을 뜨기를 바랐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잊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하나’를 갖는다는 것. 견자는, 스승의 그 참뜻을 영민하게 깨닫는다. 그래서 견자는 기존의 자기 내면을 철저히 허물어뜨리고 백지와 같은 내면 상태를 갖는다. 그리고 견자는 인생의 두 번째 운명의 여인 백지(白紙)를 만난다. 백지는, 견자가 황정학을 만나 이전의 자신을 버린 상태에서 만나게 되는 자신의 새로운 자아이다. 타불라 라사 상태로서의 견자의 자아. 그런데, 견자가 그 백지를 만나게 되는 것이, 자신이 피투성이가 되는 처절한 싸움터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때의 싸움은, 자신을 깨닫지 못한 견자의 자아와, 황정학을 통해 어렴풋이 자신을 깨달아가는 견자의 새로운 자아와의 싸움이다. 그 싸움 끝에서 백지를 만났다는 설정은, 견자가 백지와 같이 순결하면서도, 새로운 자아를 각성했다는 것이다. 견자는 이제 그 백지위에 새로운 자신의 삶의 내력을 써 나갈 것이다. 

 
-② 사회적 자아의 인식

    7.  견자, 서자출신으로 세상을 향해 변혁의 칼을 휘두르는 이몽학을 만나다.

       8.  견자, 부패한 세상에 저항하는 보부상의 우두머리이자 의적인 이장각을 만나다.

           그리고 황정학, 백지와 헤어지다.

       9.  견자, 세상을 여자의 몸으로 보는 환쟁이와 만나 함께 금강산으로 따라가다.

            금강산에서 환쟁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다.

       10. 견자, 금강산에서 이장작과 재회하다, 불평등한 세상을 상대로 싸우다.  

            견자, 용맹성과 뛰어난 칼솜씨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다. 이장각 죽다. 

자아에 눈뜬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회와 세상에 눈뜨는 것이기도 하다.‘나’는 나 자신 그 자체로 인식될 수 없다.‘나’는 항상 주변 누구와의 관계 속에서만 설명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견자가 새로운 자아에 눈을 뜬다는 것은, 따라서 사회와 세상에 눈을 뜬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런 점에서, 백지와 같은 새로운 자아(내면적 자아)에 눈을 뜬 견자가, 사회를 바꾸려는 의지를 가진 이몽학과 이장각을 만난다는 설정은 무척이나 의미하는 바가 깊다. 또한, 사회변혁의 주체들인 이몽학과 이장각을 만나는 순간, 견자의 내면적 발견을 이끌어준 황정학, 백지와 헤어지는 설정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이제 견자는 새로운 자아라는 백지 위에 사회적 자아를 그려 넣으려한다. 황정학과 백지와 헤어진 견자가 부패한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의적의 무리가 있는 금강산을 찾아가는 환쟁이를 만나게 되는 것은 견자가 자신의 자아 위에 사회적 자아를 그리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자유롭게 인식하려했던 그 환쟁이가 세상의 편견과 고정관념의 벽을 깨지 못하고 자살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유로운 내면적 자아가 사회적 자아로 거듭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를, 짐작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견자는 개인의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관점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그 안목을 통해 개인은 자유를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은 사회적 편견과 독사와의 싸움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편견과 독사를 깨뜨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사회적 편견과 독사에 맞서 자신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것은 개인에게는 한계상황을 이겨내는 것만큼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금강산 환쟁이는 사회적 한계상황을 넘어서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마는 것이다. 견자의 다음 대사는 그 환쟁이의 죽음을 통해 세상을 보는 안목(관점)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음을 보여준다.  

 

산중에 길 잃은 나는 이 알몸 그림 속에서 세상을 보려고 했어요. 각자 처해진 상황이라는 것이 산을 여자로 보게도 하고, 여자를 산으로 보게도 하는 안목을 만들더군요. 앞을 못보는 장님이 지팡이로 길을 찾듯,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의 안목에 의지해서 세상을 이해하잖아요.

견자는 나름대로의 안목으로 사회와 세상을 보려고 한다. 그 안목은 세상의 불평등함에 대한 저항이다. 견자가 의적 이장각의 산채를 찾아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③ 사회적 자아의 좌절, 한계인식 

    11. 견자, 산채 내의 권력다툼을 보면서, 사회조직을 통한 사회변혁의 한계를 느끼다.

    12. 견자, 백지와 다시 만나다.

         백지, 견자의 목숨을 구해주다.  

금강산 이장각의 의적떼를 찾아간 견자는, 그곳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는다. 황정학을 통해 깨닫게 된 내면적 자아를 바탕으로, 불평등한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사회적 자아로 발전해나가는 견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세상을 향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적은 당신(관군)이 아니라 불평등이오.     

 

그러나, 견자는 권력에 눈이 먼 사회조직을 보면서, 사회개혁/ 혁명의 진정성에 대해서 환멸한다. 이장각의 극적인 죽음은 견자의 사회적 자아 각성이 실패로 돌아갈 것임을 암시한다. 그래서 견자는 사회적 자아로 이끌었던 이장각이 죽고 없는 금강산 산채를 떠난다. 그것은 견자에게 끝내 극복하지 못한 하나의 한계상황일 것이다. 견자의 사회적 자아가 좌절을 겪으면서 스스로 한계상황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다시 돌아 가야할 것은 내면적 자아이다. 금강산 의적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산채 내에서의 권력다툼 때문에 죽음의 상황에 몰린 견자를 구해주는 것이 백지라는 점은, 사회적 자아로 발전하지 못한 견자의 자아가 다시 내면적 자아로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박흥용이 말하고자는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회적 변혁/ 개혁의 주체들에게 진정한 내면적 성찰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견자는 진정한 내면적 자아를 단단하게 인식하기 이전에 사회적 자아로 나아갔던 것이고, 그 결과는 자기한계의 인식이었던 것이다. 

 

Ⅲ. 내면적 깨달음으로서의 여행  
 

    13. 견자, 잃어버렸던 스승 황정학과 다시 만나 길을 떠나다.

         곤경에 처한 오위대장의 손녀를 도와주고 오위부장의 그늘에서 몸을 쉬다.

         황정학, 견자에게 칼을 겨누어야할 대상이 다름아닌 자기 자신임을 가르치다.

    14. 견자, 오위대장으로부터 벼슬을 제안받고, 그 손녀로부터 사랑받아 청혼받다.  

         둘 다 물리치다.

         견자, 견성(見性)에 이르다.

    15. 견자, 눈오는 밤 황정학의 죽음을 맞이하다.

          황정학, 견자에게 눈 오는 그믐밤에 달을 가리키며 죽다.

    16. 견자, 생과 사가 오가는 스승의 묘막 앞에서 한계로부터의 자유를 깨닫다.

 
견자가 사회적 자아로 나아가는 데 실패하고 자기 한계를 인식하기 시작한 단계에서, 백지를 만나고 황정학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황정학은 견자의 한계 너머를 가르쳐주는 견자의 지팡이인 것이다. 다시 만난 황정학은 견자를 다음과 같이 질타한다.  


칼의 노예(사회적 이상추구, 맹목적 이상 추구)가 돼서 백정짓을 하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칼을 다스리는 진짜 칼잡이가 있다. 백정 놈은 모든 걸 칼로 해결하려 하니 칼집에 칼이 있을 새가 없지만, 칼잡이는 매번 칼집을 더듬으며 ‘이 칼을 뽑아 내가 얻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니 칼집에서 칼빼기가 쉽지 않다. 백정 놈의 칼집은 제 칼 하나 간수 못해도, 칼잡이의 칼집은 칼뿐 아니라, 마음까지 단속한다, 이놈아, 이놈아. 성을 함락시키는 이보다 제 마음을 다스리는 이가 진짜 칼잡이야.           (괄호 속은 인용자 설명)

황정학은 견자가 내면적 자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회적 변혁과 혁명에 뛰어들었음을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사회/세상)을 향해 칼을 겨누기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마음)을 진정으로 돌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황정학은 견자에게 흐트러지지 않는 보법(자기 내면의 정리)과,‘내 칼로 나를 겨눈다’(치열한 자기 성찰), 그리고‘껍데기를 벗어라’(사회적 명예나 영광에 대한 집착으로부터의 탈피)를 가르친다. 황정학은 말한다.

비뚫어진 세상에 대한 분노도, 영웅심도, 그 어떤 명분도 들의 풀과 꽃과 같아서,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면 말라서 떨어진다. 내가 적으로 삼은 상대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흥하고 쇠하기를 내 칼과 관계없이 한다구. 알고 보면 이 황정학의 칼은 적이 없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랑패 광대는 얼굴을 감췄으니, 병신노릇도 좋고 미치광이 노릇도 좋고 거리낄 것이 없다. 속모습의 제 얼굴을 겉모습의 탈바가지에 의지하고 만판으로 덩실댄다. 그저 그 가면을 빙자해서 모든 굴레를 벗어던지고 살판나게 뛰어다니니-

그 가면이 광대의 자유가 아니고 뭐냐. 광대가 가면 뒤에 숨어 자유하는 것처럼, 너도 네 칼 뒤에 숨어서 자유해라. 그것이 네 칼의 용도다.

견자는, 서자라는 차별과 서러움을 받아왔다는 역방향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쳐왔음을 깨닫게 된다. 그 사회적 인정이 그의 눈을 멀게 해왔던 것이다. 황정학의 가르침에 깨달아 그는, 오위대장이 자신의 양자로 거두워 들여서 벼슬자리를 주겠다는 제안을 거부한다. 그리고 오위대장의 손녀의 청혼도 거부한다. 그에게 사회적인 성공을 보장해주는 그녀의 청혼을 거부했다는 것은, 견자가 더 이상 사회적 허명(虛名)을 좇는 집착에서 벗어났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견성한 것이다. 황정학으로부터 배운 칼을 통해 자기자신의 내면을 다스릴 줄 알게 되었고, 사회적인 인정과 성공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날 줄 알게 된 것이다. 견자는, 견성(見性)한 것이다.

견자의 견성이 이루어졌을 때, 그는 황정학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황정학이 견자의 대자적 존재로서의 내면적 짝패였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견자의 견성은 곧 황정학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황정학은, 눈내리는 그믐날 밤, 견자에게 어두운 밤하늘을 향해‘저 달을 보라’며 손짓을 하면서 생을 마감한다.

눈내리는 그믐밤, 달이 없는 그 밤하늘에서 달을 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스승 황정학의 죽음은 견자에게 또 하나의 화두가 된다. 그 화두에 대한 정진 끝에, 견자는 마침내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  


그믐엔 달이 없다. 그믐엔 달이 없다. 그믐엔 달이 없다.

없는 달을 어떻게 봐.

하하. 한계를 깨닫게 하려는 스승님의 기지였구나.

장님이 달을 본다는 것도 불가능한 한계상황이거니와, 달이 없는 그믐밤에 달을 본다는 것은 한계상황 중의 한계상황이다. 장님인 황정학은 그 이중의 한계상황을 넘어섰던 것이다. 자신을 가두는 모든 한계상황을 스스로 돌파하라는 것. 황정학은 죽음으로써, 그의 제자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전해주고 떠난 것이다. 견자는 그 의미를 깨닫는다. 현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 그 현상너머를 바라볼 것, 그럼으로써, ‘구름’이라는 장막을 벗어난‘달’처럼 자유로워질 것. 견자는 자신을 가두는 모든 ‘구름’으로부터 벗어나‘자유’하게 된다.

이제 막 눈이 열리는 장님의 탄성! -

 진짜 자유는 자존심과 오기라는 항아리가 깨어질 때 얻는다-

어디서 밀려오는 감동일까? 세상에 이토록 조용한 기쁨이 있다니. 스승님은 이미 아셨던 거야. 내 자존심과 오기가 나를 가두는 항아리라는 것을.... 스승님이 말씀하시는 달이 어렴풋이 보인다.

- 아, 한계라는..... 자유!-


 Ⅳ. 한계 넘어서기의 여행   

  17. 견자,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것을 다짐하다.

  18. 견자, 혼란한 세상에서 백지의 죽음을 전해 듣고, 다시 금강산 산채를 찾아가다. 

       그 길에, 남장을 하고 자신을 따르는 오위대장의 손녀를 만나 동행하다.

  19. 견자, 금강산에서 왜적을 맞아 크게 이기다.

  20. 견자, 사회적 혁명을 꿈꾸는 이몽학과 다시 만나 한바탕 겨루고 헤어지다.

  
견자는, 스승의 죽음을 통해 모든 한계상황으로부터의 자유로워지는 삶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견자에게 한계상황은 무엇이었나?

우선, 금강산 산채에서의 사회적 자아로서 맛보았던 좌절감이 첫 번째 한계상황일 수 있다. 자신에 대한 견성은 이루었지만, 금강산 산채에서 느꼈던 한계는 아직 극복하지 못한 상태다. 그러니, 자신의 내면을 깨닫는다는 것은 외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작의 과정일 뿐이다. 사회변혁은 자신의 내면적 깨달음 이후여야 한다는 작가의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한계상황으로 좌절감을 안겨준 금강산 산채를 다시 찾아간다.

여행의 끝이 아니라 여행의 시작이었군.

진정한 내면적 자아를 형성한 상황에서, 백지가 죽는 것도 자연스럽다. 백지는 견자의 즉자적 상태의 순수한 자아였기 때문에, 황정학을 통해 대자적 존재를 거쳐 즉자-대자의 자아로 거듭나고 있는 견자에게, 순수한 내면으로서의‘백지’상태는 이미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금강산 산채에 다시 돌아가 자신에게 좌절감을 안겨준 한계상황을 극복해낸다. 이 장면을 통해 박흥용의 사회변혁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사회변혁과 개혁, 그리고 혁명은 자신의 내면적 자유로움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내면적 자아의 충분한 성숙 이후에, 사회변혁과 혁명을 말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이 지향하는 바와 같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김수영 <푸른 하늘을> 

견자는 자신의 첫 번째 한계상황을 그렇게 극복해낸다. 사회혁명을 꿈꾸는 이몽학과의 대결은, 견자가 모든 집착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자아를 꿈꾸고 있음을 보여준다.


Ⅴ. 여행의 시작, 그리고 끝 

 

  21. 견자, 다시 떠난 길 위에서,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어머니 근처의 나무둥지에  

       기저귀 끈으로 묶인 아이를 보면서, 진정한 한계와 자유에 대해 고민한다.  

       그 둘은 결국 하나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금강산에서부터 자신을 따라온 오위대장 손녀의 이름을 묻다.  


  견자에게 남아있는 한계상황은 무엇일까? 그것은 견자가 깨달은 자유로운 내면적 자아가 사회적 자아와 이어져 있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그의 칼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겨누고 있을 뿐, 사회/ 세상을 겨누고 있지 않는 것이다. 견자의 반대편에서 세상을 향해 칼을 겨누는 자가, 이몽학이다. 사회변혁/ 혁명에의 꿈('몽학'이라는 이름)을 향하지 않은 내면적 자유로움은 무의미한 것은 아닐까? 그런 물음이 또 하나의 화두가 된다. 그러니까, 이몽학은 견자가 넘어서야할 마지막 한계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몽학과의 대결을 통해서, 이몽학이 아직 사회적 변혁/ 개혁에 눈이 먼 장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회변혁이라는‘구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달인 것이다.

견자는 생각한다. 한계란 무엇이며, 어디까지인가? 어쩌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구르믈버서난달’과 같은 자유로움에 대한 집념도 어쩌면 자신의 눈을 멀게 하는 한계상황은 아닐까?

(견자, 나무둥지에 기저귀 끈으로 묶인 아이를 보면서 운다)  

 

견자 - 저 기저귀 끈은 아이를 구속한 걸까? 보호한 걸까?

오위대장의 손녀 - 그 기저귀 끈이...이의 한계 같지만, 알고 보면..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자유하게 한단 말이죠?

견자 - 그 끈을 더듬다보면 언젠가는 그 끈의 근본을 만나게 되겠지.

오위대장의 손녀 - 근본?

견자 - 아이를 기저귀로 묶은 어머니....같은, 나를 한계와 자유로 묶어버린 더 큰 어머니. 
         스승님이 말씀하신 지팡이가 그 끈이라는 걸 이제 겨우 알게 된 거야.  


견자는 깨닫는다. 모든 자유는 한계를 가진 것이며, 그 한계 속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음을. 자유는 한계이고, 한계는 자유인 것. 그러니까 한계를 인정할 때,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장님상태에서 벗어나고자 시작된 견자의 여행은, 견자가 장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대목에서 끝이 난다. 여행의 시작은 곧 여행의 끝인 것이었다. 그것을 돌려 말하면 여행의 끝은 또다른 여행의 시작인 것이다. 그 여행의 끝에서, 견자는 금강산 산채에서부터 줄곧 자신을 따라온 오위대장 손녀와 새로운 생을 시작하려 한다. 그녀와의 새로운 삶의 시작은, 나중에 태어나게 될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한계상황이 될 것이다. 한계는 한계라고 회피하게 될 때, 극복할 수 없는‘한계’가 되지만, 한계임을 알고 그 한계를 살아가게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한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P. S. 

1.

<구르믈버서단 달처럼>은, 성장문학으로 손색이 없다. 단순히 성장만화가 아닌 성장문학으로서의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사회와 개인, 자유와 구속, 운명과 저항 등 좋은 성장문학이 갖추어야할 모든 요소들이 때로 아름답게, 때로 철학적으로 녹아있다. 단선적 변화와 발전으로서의 성장개념이 아닌, 갈등과 길항, 모순과 극복의 변증법적 전개과정이 <구르믈버서난달처럼>을 읽은 이들의 넋을 빼놓고 만다.

 

2.

<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에 의해 <구르믈버서난달처럼>이 영화화된다고 한다. 2002년경에 처음으로 읽으면서, 박찬욱이 만들 가능성이 있고 그럴경우 원작의 아우라를 충분히 담아낼거라고 생각했었다. 이준익이 만들 경우, 어쩌면 <왕의 남자> 속편이 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이준익이 최근의 흥행실패를 자신의 성공작에 기대려는 안이한 발상에 젖어있는건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이준익이 걱정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원작의 훌륭함을 그의 영화가 훼손시키지나 않을까 두렵다는 것이다.

영화 <구르믈버서난달처럼>의 캐스팅이 끝났다고 하는데, 역시 다소 의아하다.  

 

황정학 - 황정민/ 견자- 백성현/ 이몽학 - 차승원/ 백지 - 한지혜  

 

황정학 역에 황정민이 캐스팅된 것은 적절해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이문식가 어울릴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문식은 조금 가벼워 보여 황정학의 카리스마를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일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백윤식이 적임자일 수도 있을텐데. 황정민의 뛰어난 연기를 믿어볼 수 밖에 없겠다.

견자 역에는 누가 뭐래도 류승범이지 않을까? 다른 말이 뭐가 필요할까? 거칠어보이는 외모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겉도는 반항아역에 그만큼 잘 어울리는 배우도 드물것이다. 백성현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유덕환과 이준기를 섞어놓은 듯한 외모다. 이 또한 이준익의 안이한 발상일 것 같아 걱정스럽다.

차승원이 이몽학에 캐스팅된 것은 아주 적절해 보인다. 지금까지 보여준 역할보다 더 차갑고 무겁고 강하게 연기를 해주길 바란다.

백지 역에 한지혜 또한 의외다. 백지는 어떻든 견자의 내면적 자아를 나타내면서 결국엔 비극에 이르는 여인이다. 한지혜에게서 어떤 비극적 정서를 읽어내기는 조금 어렵다. 백지 역에는 윤진서가 더 적절하게 어울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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