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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독
박완서 지음, 민병일 사진 / 열림원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올해 봄, <노란 집>을 읽었다. 그리고 완연한 가을의 초입에 <모독>을 읽었다. 같은 작가가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두 권의 책을 정녕 같은 작가가 썼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낯설다 느껴진다. 어딘가 허름하고 오래된 서재에서 먼지를 얹혀두었던 에세이가 우리를 만난다는 소식과 함께, 우리나라와 가까우면서도 더없이 멀게만 느껴지는 티베트와 네팔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이 무엇보다 나의 가슴을 뛰게 했다.
-“당신들의 정신이 정녕 살아 있거든 우리를 용서하지 말아주오.”
표지는 박 완서 님이 땅을 향해 고개를 수그린, 그리고 그 모습에서 범접할 수 없는 경외로움마저 느껴지는 사진 한 장이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 에세이에 <모독>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했을까? 게다가 그 당시 연로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티베트와 네팔로 함께 여행을 갔던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두 가지 궁금함이 일었다.
책은 티베트에 대한 여행기, 네팔에 대한 여행기로 나뉘어 실려 있다. 그리고 각각의 여행에서 찍었던 사진들과 그 여정을 함께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달라이 라마로 모든 것을 안다고만 생각했던 티베트에 대해, 티베트 인들의 가난한 삶, 역사,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에 이르기는 많은 내용을 참 알차게도 담아냈다. 또한 자본주의가 폴폴 풍겨난다는 네팔의 방문기를 통해서도 지금의 내가 작가와 함께 여행을 떠난 듯한 생생함을 준다.
지리적이고 종교적인 특성 때문에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고, 지구상 가장 가혹한 환경에서 자연친화적이고 자급자족인 사회(p. 159. 수정 발췌)를 이룩해왔던 티베트였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풍족했던 과거의 삶을 뒤로 하고 부유하지 못한 현재를 살고 있다고 한다. 식사를 하러 들어갔던 식당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작가는 같은 인간에게 더없는 치욕스러운 행위를 한 어느 한족 여자의 ‘인간에 대한 모독’을 비꼰다.
만났던 작품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 작품들 모두 전쟁에 대한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주변의 사랑으로 이겨내는 공통적인 모습이 그려졌기에, 내게는 마치 한국의 안네 프랑크 같은 성숙한 소녀의 느낌마저 주던 박 완서 님이었다. 이 짧은 에세이 <모독>에서는 의도치 않게 걸인들에게 본인이 상처를 준 듯한 미안함이 극에 달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렇지만 다른 시각에서는 같은 인간에 대해 미안함을 느낌으로써 그들을 한 번 더 생각하는 박 완서님의 따뜻한 사랑이 전해진다.
라다크의 이야기를 다룬 <오래된 미래>와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 핀란드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적은 <핀란드 슬로우 라이프>, 다른 사람들은 쉽게 가려고 하지 않는 박노해 그만의 <다른 길>, 그리고 이 책까지. 모두 비슷하면서도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 읽은 이 책의 감동을 더욱 배가시켜준 까닭은, 이 에세이를 소개하는 민병일 님의 글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 책을 읽은 모든 이들에게 故 박 완서를 추억할 수 있는 특별한 느낌을 전해주지 않을까 추측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