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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 일어나기 2초 전
아녜스 르디그 지음, 장소미 옮김 / 푸른숲 / 2014년 7월
평점 :
-100page씩 끊어 읽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
Juste Avant le Bonheur(행복의 직전에). 불어로 된 이 책의 원제가 참으로 인상적이다. 과연 그 행복의 직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지 기분 좋은 호기심이 들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3살난 아이(뤼도빅, 그의 애칭은 룰루)의 엄마인 20세의 줄리이다. 아버지가 없이 자라는 아이를 위해 계산원으로 일을 하는 악착스러운 엄마다. 머저리 같은 자신의 고용주 샤송을 '머저리 샤송 놈'이라고 부르는 그녀는, 자신의 계산대에서 돈을 몰래 빼내간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면서도 고용주에게 당하기만 한다. 괜스레 자신의 비굴한 모습에 서글퍼져 계산대에서 기계적인 업무를 하고 있는데, 이때 저울에서 가격표를 붙이고 오지 않은 한 남성을 만난다. 그의 이름은 폴-그녀에게는 할아버지 뻘로 여겨지는-이다.
그녀의 모습에 연민을 느껴서였을까, 폴은 그녀에게 프랑스 서부의 한 휴양지를 가자고 제안한다. 그의 제안에 반신반의하면서도 무턱대고 따라간다. 자신의 휴가에 대체 의사를 구해놓은 후에 떠나는 제롬과, 그의 아들 룰루와 함께. 그들의 여정에서는 참으로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많았고 점차 서로를 이해하고 돈독해진다. 하지만 그들의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교통사고를 심하게 당하고, 줄리의 아들이 큰 상해를 입고 너무나도 이른 나이에 그녀 곁을 떠난다.
처음의 100page에서는 그들의 다소 개방적인 사고과 작가의 유머에 공감하며(?) 읽게 되었다면,
200~300page를 읽으면서는 줄리의 짙은 모성애를,
마지막 400page까지 읽으면서는 룰루를 가슴에 품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하는 그녀의 한층 성장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소설이 작가의 모습을 줄리에게 투영시켜 묘사되는 만큼 더욱 절절하게 다가왔고, 최근에 알게 된 안도현 시인의 '스며드는 것'이라는 시가 떠올라 더욱 숨죽여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스며드는 것/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사람을 만나게 되는 우연 또한 가벼이 여길 인연이 하나도 없다는 것, 기적을 바라면서도 그 기적이 기대를 저버릴 수도 있다는 것, 치유를 통해 자신의 제2의 삶을 시작하는 모습들까지 인생에 대해서 이토록 다양하게 다룬 소설이 있었을까 싶다. 또한 뒤로 갈수록 곱씹어볼 문장들이 많아서 좋았다.
"행복해지는 데는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답니다. 정말 아주 조금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지요." (p.109)
룰루의 물리치료를 위해 줄리가 물리치료사에게 남긴 장문의 가슴아린 편지. (p.244-248)
"운명을 거역해봤자 소용없다. 운명이 길을 닦으면 우리는 이 길을 걷든가 걷지 않든가 고민하기도 하지만, 만일 운명의 발자국을 따라 걷지 않으면 금세 길을 잃고 만다." (p.275)
우리 모두 기적을 바랐던 일이 한번쯤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 우리 앞에 놓인 운명에 순응했어야만 했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운명에 순응하면서 개개인에게 남겨진 상흔을 통해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던 것을 몸소 증명해보인 작가의 자전적인 스토리텔링이었기에 처음 그녀를 만나본 나도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된 이야기였다. 가을의 초입에 이 책을 만나보면 참 좋을 듯.
"아랍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요.
절대 두 손 들지 마라... 기적이 일어나기 2초 전일수도 있다." (p.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