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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믿다 - 2008년 제3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권여선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8년 1월
평점 :
소설이 많이 건방지다. 독자에게 숙제를 주는 것처럼 줄거리가 적다. 아니, 줄거리가 비었다. 어찌어찌 해서 이러이러하게 되었다가 다소 생략된 형태로. 마치 살짝 술에 취한 남자가 앞뒤 사정 전혀 모르는 낯선 이 앞에서 어떤 그녀의 이야기를 해대듯이.
권여선 작가의 [사랑을 믿다]는 약간 의외의 설정으로 시선을 끌었다. 평범함에 지루해진 심사위원들에게 산뜻함을 주기엔 충분했을지도 모르겠다.
내용 감추기. 독자로써 감추어진 내용을 좀 추측해 보며 엮어야겠다.
남자는 6년 전 그녀와 헤어졌다. 사귀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스타일과 감각이 통해서 또 하는 일이 연관되어 있어 자주 만나곤 했던 그녀는 살가운 편은 못되지만 시선을 끌만한 매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업무가 바뀌면서 소원해진 그녀에 대해, 남자는 아깝다는 생각과 더불어 약간의 기대감으로 만났던 자신을 기억한다. 같은 시점 한 여자를 사귀게 되었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3년 후 그녀에게서 배신을 얻는다. 사랑을 믿음과 조율하며 보냈던 시간을 기억하며 여자와의 헤어짐을 남자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배신이라는 언어로 표현한다. 그리고 같은 시점, 다시 예전의 그녀를 만나게 된다. 무언가 변한듯 한 그녀에게서 예전의 까칠함 보담은 편안해 보이고 소탈해 보이는 모습을 본다.
그녀는, 6년 전 사랑하던 남자와 헤어졌다. 많은 것이 통했고 서로에게 호감도 있었고 모든 것이 잘 될 것만 같은 느낌이었는데, 왠지 헤어졌다. 업무도 바뀌게 되어 핑계로 만날 이유도 사라졌다. 그녀는 남자가 자신을 버린 이유를 ‘금전적인 문제’라고 못 박았다. 그 밖에 특별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연 중에 (자신의 경제적인 면에 분명 도움이 될) 고모댁을 방문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겪은 고통의 시간을 조금은 손쉽게 도려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점집인줄 알고 들어앉은 고모댁 낯선 여인네들 속에서, 삶의 분명한 어둠을 목격하고 자신의 찬란한 실연도 별것이 아닌 묵직하고 의미 없는 보따리일 뿐임을 알게 된다. 무겁게 지고 갈 이유가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1년 후, 경제력의 확인이 필요 없음에도 고모님의 3층짜리 건물을 물려받고, 기차를 흉내 낸 주점에서 실연당한 친구에게 ‘희망’ 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녀는 2년 후 그 주점을 남자에게 소개한다.
남자와 그녀 이야기. 작가는 그 이야기를 감춘다. 기차를 닮은 술집에서 안동소주에 맥주를 섞어 마시며 남자는 자신이 ‘발등을 짓찧을 죄’ 라고 생각할 그녀의 사랑을 듣는다.
그녀를 표현하기를, ‘나만큼이나 서툴고 겁이 많은 인간이었다는 걸 나는 안다. 넘쳐 흐르는 감정의 절실함보다 한 오라기의 자존심을 택하는 인색한 성격이었다.’ 라고.
어떤 내용인지 누가 물어보면, 쉽게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한 여자가 사랑한 남자가 있었는데, 남자는 자신만큼 그 여자를 사랑한 것 같지는 않고, 자존심이 있어서 더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러다가 다른 여자에게 남자가 갔어. 고통스러워 한 여자는 나중에 자신에게 3층짜리 재산이 생긴 걸 은근히 복수의 화살 끝에 바르고 자연스런 모습으로 별 거 아닌 듯이 남자에게 얘기하지. 뭐 그런 얘기야” 라고. 유치하게 해석해 버릴 수도 있겠다 싶다.
작가는 이렇게 얼토당토않게 해석 되어 질지도 모르겠다 여겼는지, 그녀의 입장에 한마디로 침을 박는다. ‘금전적인 문제는 아니었어. 하지만 워낙 몰리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잖아’ 라고. 그리고 알 수 없는 ‘피식’ 이란 행위를 통해 독자에게 또 다른 의문을 갖게 한다.
업무가 바뀌었다는 것은 어쩌면 적당히 꾸밀 줄 알았고 당찼던 그녀에게 업무적 자존심이 눌리는 위기가 왔던 때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여자는 자신이 부족할 것도 없는데 남자에게서 멀어짐을 그렇게 해석 할 수도 있겠다. 3년 만에 만난 그녀의 수수한 옷차림과 보잘 것 없을 것 같은 주점을 비싸다고 평하는 모습이나 그녀가 자기 위주로 음식을 시키는 것에서 유독 경제적인 것과 연관 지어 보려는 남자는 겉으로는 아닐지라도 내심 금전적인 문제를 중시하는 경향으로 비춰졌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그때의 그녀에게는.
‘그녀는 훨씬 더 관대해 지고 자연스러워졌지만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라고 말하는 남자는 자기에게 올 그녀에게서의 새로운 실연을 예감한다. 그녀는 성공한 것이다. 그녀의 ‘피식’웃음의 의미를 그렇게 해석하고 싶다.
나에게 제목을 다시 짓게 한다면 조금 직설적이지만, ‘내 오랜 그녀’ 라고 하고 싶다.
왜 제목을 ‘사랑을 믿다’ 로 했을까. 줄곧 과거의 이야기와 시점이 나온다. 3년 전 2년 전 1년 전 다시 그 3년 전 그리고 남자의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3층짜리 건물 등. 모두가 과거형인데, 제목은 현재형이다. 남자가, 자신을 버렸다고 여기는 한 여자와의 사랑을 부정하고 싶은 것에서 시작된 것일까, 또는 그녀가, 상대는 알아채지도 못할 사랑을 했던 자신을 부정하고 싶은 자존심에서였을까. 또는 강한 부정이 긍정이 되듯이, 진행형이 주는 늬앙스로 지금 사랑을 믿지 않게 된 남자와 그녀를 긍정으로 끌고 싶은 의도일까. 아니면 바로 해석되어버릴 제목 보담은 좀 더 뇌리에 박힐만한 것으로 찾은 것일까.
책표지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포리즘 적 문체’ 라고 평한 것이다. 책 속엔 유독 눈에 띄이는 글귀가 많다. ‘훼방을 놓아야 거기에 희망이 있다는 걸 안다’ ‘고통은 무례를 용서하게 만드는 법이다.’ ‘언젠가 내가 누군가의 문을 열고 들어가 그런 고통을 안겨주고 유유히 빠져나온 적이 있었다는 사실’ 또 워낙에 몰리면 든다는 그녀의 생각과도 같은. 이런 멋진 글귀는 나로 하여금 작은 탄성을 지르게 한다.
[사랑을 믿다]는 책 속에 액자형태가 여러 개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 의미를 굳이 해석할 필요는 못 느낀다. 삶의 이야기는 어떤 형식으로든 서로 연결 되어 있으니까. 단지, 그 연결점을 발견하고 거기에 시선을 고정 시키도록 독자를 이끄는 것이 놀랍다.
주점이라는 장소를 설정하고 음식을 나누며 이어가는 시간 속에, 자신들의 사랑을 기억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다루어진다. 거기에는 사랑에 관한 것 보담은 그녀와 함께 하는 안주, 술, 술집의 묘사 등에 더 초점이 맞춰지면서, 소설 초반부 남자가 들른 동네술집에서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게끔 하는 작가의 솜씨가 빛난다.
..2008. 03. 10 네모망상_